사미정(四未亭)
사미정은 조덕린(1658∼1737) 선생이 말년에 수양하기 위하여
경치 좋기로 이름난 곳을 찾아서 조선 영조 3년(1727)에 지은 정자이다.
계곡을 낀 경사진 곳에 자리잡고, 앞면 3칸·옆면 2칸 규모에 마루를 중심으로
양쪽에는 온돌방을 두었다. 현판 ‘사미정’과 내현판 ‘마암’은
정조(재위 1776∼1800) 때 이름난 정승 채제공의 친필이라고 한다.
조덕린(趙德鄰)은 조선 후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한양(漢陽). 자는 택인(宅仁),
호는 옥천(玉川)이다. 1677년(숙종 3) 사마시에 합격하고 1691년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
설서·교리·사간 등을 역임하였다. 1725년(영조 1) 노론·소론의 당론이 거세지자
당쟁의 폐해를 논하는 10여조의 소를 올렸다가, 노론을 비난하는 내용이 있어
당쟁을 격화시킬 염려가 있다 하여 종성에 유배되었다.
70여세의 나이로 3년간의 적거(謫居)끝에 1727년 정미환국으로 소론이 집권하자
유배에서 풀려 홍문관응교에 제수되었으나, 서울에 들어와 숙사(肅謝)한 다음
곧 고향으로 돌아갔다. 1728년 3월 이인좌(李麟佐)의 난이 일어나자
영남호소사(嶺南號召使)에 피임, 격문을 돌리고 의용병을 규합하여 대구에 내려갔으나
난이 평정되자 파병(罷兵)하였으며, 이 공로로 동부승지에 임용되고 경연(經筵)에 참석하였다.
얼마 뒤 병으로 사직하고 다시 환향하여 학문에 몰두하자 원근에서 제자들이 모여들었다.
1736년 서원의 남설을 반대하는 소를 올리자, 1725년의 소와 연관되어 노론의 탄핵을 받고
제주로 유배가던 중 강진에서 죽었다. 그의 상소는 몇 차례에 걸친 소론들의 재집권을 위한
난언(亂言)·벽서사건(壁書事件)의 실마리를 만들기도 하였다.
정자 앞을 흐르는 운곡천, 사미정이 있어 사미정계곡이라고 하며
맑은 물과 바위, 울창한 소나무가 빼어난 경관을 연출한다.
옥계정(玉溪亭)
옥계 김명흠(1698~1773)의 효행과 학덕을 기리기 위하여 사림과
의성김씨 문중에서 건립한 정자이며 졸천정사(拙川精舍)라고도 한다.
김명흠의 본관은 의성, 자는 백해, 호는 옥계이다. 그는 13세 때
조덕린(1658~1737) 문하에서 수학하였으며, 스승이 유배를 가게되자
신원을 회복할 방법을 궁리하면서 스승의 가족들의 생계를 도왔다.
스승 사후에는 그 자식들을 극진히 돌봐서 인륜에 합당한
참되고 진실한 제자로서 모범이 된 인물이다.
정자 뒤쪽에 옥계종택이 있고 현재는 수리중이다.
옥계정 앞을 흐르는 운곡천, 그 아래쪽에 스승 조덕린의 사미정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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