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대구여행*문화탐방/봉화군

계서당(이몽룡 생가)

자즐보 2012. 9. 23. 21:09

 

 

 

 봉화 계서당(이몽룡 생가)

 

소나무 숲이 우거진 동산 기슭에 남향으로 자리잡고 있는 집으로

조선 중기의 문신 계서 성이성(1595∼1664)이 조선 광해군 5년(1613)에 지었다고 전한다.

성이성은 문과에 급제한 후 6개 고을의 수령을 지냈고, 3차례나 어사로 등용되었을 정도로

청렴한 관리로 이름이 높았다. 사랑채는 후에 넓히거나 다시 지은 것으로 추측된다.

아래쪽 마당 끝에 대문간채를 두고 그 북쪽 높은 곳에 사랑채와 안채가 하나로 연결되어

ㅁ자형 집을 이루고 있다. 대문간을 들어서면 비교적 넓은 사랑마당이 있고 맞은편 높은 곳

서쪽에 중문간채가 있다. 동쪽에는 사랑채가 자리잡고 있고, 사랑채 서쪽의 중문으로 들어서면

안채가 있다. 또한 동북쪽에 따로 담장을 둘러 사당을 배치하였다. 이곳의 안채와 사랑채는

다른 곳과는 다른 특징을 보이고 있다. 안채는 도장방이 많은 것이 특징이고, 사랑방은

대부분 홑집으로 구성하는데, 이 집은 겹집으로 만들어 안채의 날개집 구조에

큰 변화를 가져왔다. 안채부분은 약간 변형은 되었지만 경북 북부지방

ㅁ자 민가의 옛 모습을 잘 간직하고 있다.

 

 

 

 

 

얕으막한 산을 등지고 가지런히 자리하고 있는 계서당...

 

 

 

정면 6칸의 긴 대문채가 본채를 가로 막고 있다.

 

 

 

 

 

대문을 들어서면 높게 쌓은 자연석 기단 위에 본채 건물이 덩그러히 앉아 있다.

 

 

 

사랑채인 계서당, 아래를 높여 2층처럼 보인다.

 

 

 

 

중문채, 안채로 출입하는 중문이 있다.

 

 

 

 

 

5단으로 높이 쌓은 자연석 기단 위에 앉아있는 안채...

 

 

안채 좌측면의 모습

 

 

사랑채 우측면의 모습

 

 

 

 

위패를 모신 사당

 

 

 

 

500년이나 된 노송

5번이나 몸을 비틀면서 계서당을 향해 절이라도 하는 듯...

넘어질세라 2008년에 봉화군에서 버팀목을 세웠단다.

 

 

 

 

△ 성이성(成以性)과 이몽룡(李夢龍)

성이성은 광해군 때 남원부사를 지낸 부용당(芙蓉堂) 성안의(成安義,1561~1629)의 셋째 아들이다.

창녕 사람인 성안의는 남원에서 4년을 선치하며 이름을 높였고 광한루 옆에는 그의 선정비가 세워져 있다. 성이성은 어릴 때부터 총명하여 1616년 생원시에 합격하였지만 광해군 시기의 혼란과 아버지의 명에 따라 벼슬길에 나가지 않았고, 인조 5년(1627년) 식년시 문과에 급제하고서야 녹봉을 받기 시작했다.

주로 언관직을 거치면서 곧은 말과 품행으로 오히려 주위의 견제를 받곤 하여 높은 관직에는 오르지

못했다. 하지만 왕의 두터운 신임을 얻어 진주부사 등 6개 고을의 수령을 지냈고, 네 차례나 어사(御使)에 중용될 만큼 청렴한 관리로 이름이 높았다.


훗날 부제학을 추서 받았으며 사후 청백리로 녹선되는 등 성이성은 청렴의 상징이 되었다.

지금도 사랑채 옆 대청에는 전백당(傳白堂)이라는 현판이 있다. 이는 성이성의 청백함을 이어온

집을 뜻하는 것으로, 계서의 후손들 역시 그의 청렴함을 깊이 새기고 있음을 엿볼 수 있다.

그런데 선비 성이성이 최근 더욱 조명을 받는 이유가 따로 있다. 바로 한국 최고의 로맨스이자

고전소설 춘향전의 주인공 ‘이몽룡’의 실존 모델이었음이 밝혀졌기 때문이다.

성이성의 4대손 성섭(成涉)이 엮은 ‘교와문고’에 춘향전의 어사출도 장면과 흡사한 내용이 기술되어

있는 점 등을 고증함으로써 실존인물인 성이성의 행적에 부쩍 관심을 갖기 시작하였고,

최근 계서당을 찾는 탐방객들의 발길이 잦은 이유이기도 하다.
이는 오랫동안 춘향전 연구에 몰두해 오면서, 춘향전에 역사적 실체가 숨어있으리란 가정 아래

이를 밝히는데 끈질긴 집념을 보인 국문학자 설성경 교수의 추적 성과물이라 할 수 있다.


그는 자신의 가정을 뒷받침할 결정적인 자료로 성이성 본인의 일기 따위를 후손이 편집해낸

계서선생일고(溪西先生逸稿)와 성섭의 필원산어(筆苑散語)를 손에 넣고서 조선왕조실록 등

각종 사료는 물론 민간에서 구전된 설화와도 면밀히 대조·분석해 이몽룡의 모델은 성이성이라는

결론에 이른 것이다. 춘향전의 주인공은 지금껏 성춘향과 이몽룡으로 알려져 있지만,

사실에 근거한다면 ‘李도령’은 이제 ‘成도령’으로 바꿔 불러야 할 것이고 자연스레 ‘成춘향’도

‘李춘향’이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


그런데 어찌하여 성씨 성을 춘향에게 붙여 주었던 것일까. 성이성의 내력에 대해서 공개를 거부하고

숨기기만 하던 성씨 문중이 근년에서야 이몽룡이 성이성을 모델로 했음을 인정함과 동시에

그 후손들이 기생과 사랑 놀음에 빠진 조상을 부끄럽게 여겨 공개를 막았음을 실토하였다.

 

△ 암행어사 출두

성이성은 남원부사로 부임한 아버지를 따라 남원에 머무르는 동안 기생을 사귀었고

수십 년 세월이 흐른 뒤 암행어사가 되어 전라도지역을 순행하다가 남원을 찾았다.

성이성은 다시 옛 연인을 만나려 했지만 그녀는 죽고 없었다.

십이월 초하루 아침 눈을 부릅뜨고 남원으로 들어갔다. 오후에는 눈바람이 크게 일어 지척이 분간되지

않았지만 마침내 광한루에 가까스로 도착했다. 늙은 기녀인 여진과 기생을 모두 물리치고 소동과

서리들과 더불어 광한루에 나와 앉았다. 흰 눈이 온 들을 덮으니 대숲이 온통 희도다.

거푸 소년시절 일을 회상하고는 밤이 깊도록 능히 잠을 이루지 못했다’ 이 구절은 성이성 자신의

암행어사 활동 행적을 기록한 ‘호남암행록’의 한 대목이다.


실제인물 성이성의 행적과 춘향전 주인공 이몽룡과의 밀접한 관계는 춘향전의 하이라이트라 할

‘암행어사 출두 장면’이 그대로 유입된 필원산어의 한 대목에 의해 더 구체적으로 뒷받침된다.

성섭은 필원산어에서 자신의 고조 성이성이 남원 땅에서 행한 '암행어사 출두사건'을 비교적

소상히 기록해 놓았다. ‘독에 든 아름다운 술은 천 사람의 피요, 소반 위의 기름진 안주는 만백성의

기름이라, 촛불 눈물 떨어질 때 백성의 눈물 떨어진다.’ 전후 사정의 기술은 춘향전의 암행어사

출두장면 그대로다. 특히 성이성의 한시 구절은 ‘춘향전’에서 이도령이 지어보인 칠언절구와

정확히 일치한다. 암행어사 출두장면은 그것이 판소리 계열의 춘향가든, 소설의 춘향전이든

‘金樽美酒千人血’로 시작되는 시구는 예외 없이 실려 있다.


이쯤 되면 기왕의 춘향전은 형성요소의 절반이 역사적 사실에서 출발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를테면 춘향전은 ‘팩션’의 효시인 셈이다. 설성경 교수의 주장에 의하면 춘향전은 성이성 등

실존인물의 역사적 사실을 절반으로 하고 각종 고사·설화 등 허구를 절반으로 하여,

한 유능한 작가의 창작에 의해 최초의 텍스트가 성립된 이후 각양·각층의 민중 참여(첨삭)를

통해 오늘날의 춘향전으로 진화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내용은 1999년 12월4일 KBS

‘역사스페셜’에서 방영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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