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대구여행*문화탐방/봉화군

법전강씨 종택 & 이오당

자즐보 2013. 3. 21. 23:34

 

 

 

법전강씨 종택  

 

조선 인조 14년(1636) 병자호란이 억울하게 끝나자 도은 강각(姜恪)이

형인 잠은 강흡(姜洽)과 함께 법전 양촌에 은거하며 절개를 지키던 곳으로

일명 ‘도은구택’이라고도 한다. 1798년에 수리하였고, 60여 년 전에 다시 고쳤다.

 

사랑채와 안채가 튼 ㅁ자형으로 배치되어 있으며,  ㅁ자형의 살림집에

안채와 사랑채가 있고, 그 왼쪽에 재실과 사당이 있다. 안채는 가장 오래된

건물로 사랑채보다 높은 곳에 있다. 대청을 중심으로 왼쪽에 윗방·안방·부엌이

사랑채를 향하여 있으며, 부엌 왼쪽은 다락으로 꾸며 안방에서 통하게 하였다.

오른쪽에는 광과 그 앞에 작은사랑방, 누마루를 놓아 작은사랑 공간을 형성하였다.

사랑채는 안채보다 나중에 세운 것으로 보이며, 안채 앞에 一자형으로 놓여 있다.

왼쪽부터 문간방·대문간이 있고, 큰사랑 공간으로 온돌방 2칸과 마루를 놓았다.

마루는 주인이 손님을 맞거나 일상생활을 하는 곳으로 쓰이고 있다.

재청은 뒤쪽에 온돌방과 마루방이 있고, 앞쪽에는 개방된 마루를 놓았으며,

전면에서 양측면의 툇마루까지 난간을 둘렀다. 이곳은 60여 년전에 수리하여

보존 상태가 비교적 양호하나 원형은 일부분 없어진 것으로 생각된다.

 

 

 

 

ㅡ자형으로 놓인 사랑채

 

 

 

사랑채 대청 "도은구택" 현판

 

 

 

사당

 

 

 

 

 

이오당(二吾堂) 

조선 현종 때 잠은 강흡(1602~1671)선생이 건립하였다.

강흡의 본관은 진주. 자는 정오, 호는 잠은·이오당·잠노,

할아버지는 홍문관응교를 지낸 강덕서, 아버지는 의금부도사 강윤조,

어머니는 한양조씨 조숙의 딸이다. 동생이 도은 강각이다.

강흡한양에서 태어났다. 어려서 김영남으로부터 『사략』을 배웠는데

몇 편만 배우고 나머지는 스스로 그 뜻을 익혔다. 이후 이이성혼의 학통을

 이어받은 신흠김장생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1630년(인조 8) 진사시에 합격하였으며,

1635년 성균관유생으로 송시형과 함께 이이, 성혼의 문묘 배향을 소청하였는데,

논리 정연하여 서인들의 존중을 받았다. 세자익위사세마·세자익위사시직·

세자익위사부수를 역임하였다.

효행으로 천거되어 성현도찰방을 거쳐 산음현감을 역임하였다.

병자호란 때 노친을 모시고 태백산 아래 춘양현 법전리(현, 봉화군 법전면 법전리)로

피난하였다. 인조가 1637년 삼전도에서 나라에 무릎을 꿇자 통분함을 이기지 못하고

벼슬을 버리고 그대로 은거하였다. 정양, 심장세, 홍석, 홍우정 등의 학자들과

교유하였는데 훗날 그들과 함께 태백오현(太白五賢)으로 추앙받았다.

30여 년 동안 은거하면서 혈통이나 고하를 막론하고 모두를 반갑게 맞이하여 즐겼으며

향리에서 강흡를 비방하는 이가 한 사람도 없었다. 스스로 호를 잠노(潛老)라고 하였는데,

이는 중국 동진 때의 시인 도잠(도연명)이 벼슬길에 나아가는 것을 후회하고

자연으로 돌아갔던 뜻을 취한 것이다. 또 태백오현과의 교유를 위해 정자를 짓고

이오당이라 하였다. 이오당이란 이름은 ‘낙오천종오년

(樂吾天終吾年: 자연을 즐기다가 생을 마침)’에서 취했다고 한다.

 

 

 

 

 

 

법전리 진주강씨 이야기

옛날 법전에는 법흥사라는 절이 있었고 그 앞에 큰 밭이 있었다. 그 밭에 마을이 생겼다고 해서 법전

(法田 : 또는 法典)이라고 한다. 법전은 진주강씨(晉州姜氏)가 많이 살고 있는 집성 마을이다.
버전이라는 명칭도 있는데 이 지역 사람들은 법전리에서 3백 수십년간 세거하는 진주강씨네를 버전이

강씨 혹은 버재이 강씨라고 한다. 법전리는 법전면의 중심소재지로서 봉화읍과 소천, 현동을 연결하는

국도 36번이 통과한다.
법전리 가운데 남향으로 흐르는 폭이 5, 6m쯤 되는 조그만 개울이 있는데, 조선시대에 개울의 오른쪽은 순흥부 와단면이었고 왼쪽은 안동부 중춘양면이었다. 그래서 개울의 오른쪽 마을을 순흥법전이나

음지마을(음지마)이라고 부르고, 왼쪽은 양지마을(양지마)이라 부르기도 한다.
이는 다음과 같은 유래가 있다. 1600년대 도사(都事) 강윤조(姜胤祖)의 아들 가운데 형 강흡(姜恰)이

음달에 거주하고, 동생 강각(姜恪)이 양달에 거주하였다. 동생 강각이 양지마에 거주하면서 새로이

마을을 형성하였다 하여 새마로 불리기도 하였으나 지형적으로 양달에 위치하여 양지마라 불렸다.
건너 마을 형이 살던 곳은 상대적으로 음달에 위치하여 음지마로 불린 것이라고 한다. 음지마에는 현재 진주강씨의 종택이 있다. 음지마 지역에는 잠은(潛隱) 강흡(姜恰)의 후손들이 세거하면서 대과급제자

13명을 배출하였다. 조선시대에 당색으로 양지마는 소론, 음지마는 노론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서로 소원하여 교류가 뜸했다고 한다. 심지어는 개울에 놓인 2개의 다리도 노론다리, 소론다리를 구분해 놓고 음지마 사람들은 노론다리로 건너다니고, 양지마 사람들은 소론다리로만 건넜다는 이야기가 전해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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