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7월 22일 답사(도암정,충재 권벌종가,청암정)
도암정(陶巖亭)
조선의 문신 황파 김종걸(1628~1708년)이 효종 1년(1650) 무렵에 세운 정자로
당대 유림들의 교류, 토론, 풍류를 위해 지었다고 한다.
김종걸(金宗傑,1628~1708)선생은 학문과 효성으로 이름났고
사후에 유림의 추천으로 이조참판에 추증되었고 봉산리사에 배향되었다.
전면 3칸·측면 2칸 크기이며 팔작지붕이다.
간결하게 꾸민 건물로 가운데 칸은 마루를 놓았고 양쪽에 온돌방을 두었다.
누마루 주변에는 난간을 설치하였다. 정자 앞의 연못, 인공섬, 큰 바위들과 노송 등
주변 경관과 정자가 잘 어우러져 당시 양반들의 안목을 엿볼 수 있는 곳이다.
이 마을을 황전(黃田)이라고 하는데, 누른들판 즉 곡식이 많은 풍요로운 마을이란 뜻이지만
이 마을 앞산에는 옛날 황학이 떼를 지어 서식했으며 황학들이 마을로 내려와 앉으면
온 들판이 누렇게 되어 장관을 이루니 황전이라 불렀다고 한다.
본래 영양남씨가 살던 이 마을에 어느 날,,,
지금의 황전마을에 처음 들어온 의성김씨의 조상되는 김흠(金欽)이 구봉산에 올라가서
매를 날리며 꿩 사냥을 하고 있었다. 그가 산에서 바라보니 매에 쫓긴 꿩이
황전 남진사의 집으로 날아들었는데, 남진사의 딸이 날아든 꿩을 감추었다가
매가 사라진 뒤 꿩을 살려 보내는 것이었다. 김도령은 남진사 댁 규수의
착한 마음씨에 감탄하였다. 뒷날 김흠은 그 규수의 후덕함을 생각하고
남진사댁에 청혼을 하였다. 마침내 그는 남씨 가문에 장가들어
안동에서 황전으로 와 처가살이를 하게 되었다.
사실 처가살이를 통하여 마을을 일구는 일이 당시에는 드문 일이 아니었다.
하여튼 황전에 의성김씨가 처가살이를 하고 부터는 남씨가 한 집 두 집
이곳을 떠나기 시작했으며 20년이 못가서 남씨는 한 집도 남김없이 떠나고 말았다.
결국 이 마을은 의성김씨가 번성하여 마을의 주인노릇을 하게 되었다.
이 뒤로부터 황전에는 외손이 들어오면 본손이 망한다는 말이 생겨났고,
황전마을에는 지금도 외손은 물론 타성(他姓)이 들어와 살지 못한다고 한다.
▼ 도암정 안내간판
▼ 대청에 걸려있는 도암정 현판
▼ 오른편 방문위에 「연비어약」이라는 현판이 걸려있다.
솔개가 날고 물고기가 뛴다는 뜻으로, 온갖 동물이 생을 즐김을 이르는 말이다.
정자는 山水가 좋은 곳에 짖기 마련인데 도암정처럼 마을 입구에 지은 것은 그다지 흔치 않다.
그 연유는 황파선생의 조부이신 송산공 김흥선생께서 처음 이 마을에 들어와 살 때
마을에는 해마다 재앙이 많이 일어 났다. 어느날 한 스님이 지나가다 말하기를
「마을의 안산인 학가산이 화산(火山)이고, 누른 밭(土)과 송산공(金)이 있으니
오행중 火土金은 갖추었으나 수(水)와 목(木)이 없어 안타깝다」고 하였다.
이에 송산공은 마을안팍으로 연못을 파고 아랫연못에는 수련을 심고
인공섬을 만들어 소나무와 느티나무를 심었으며, 매년 5월15일에 풋굿을 열어
그 후부터 마을의 재앙은 사라지고 자손들이 번창하며 풍요로운 마을이 되었다고 한다.
▼ 네송이의 연꽃ㅎㅎㅎ
▼ 도암정 바로 옆에는 300년이 넘은 느티나무와 집채만한 큰바위 세개가 어우려져 있다.
바위는 독(항아리)바위라 불리며 쌀독,술독,전(錢)독이라고 한다.
▼ 가운데 바위에 도암동(陶巖洞)이라고 글씨가 음각되어 있다.
▼「효는 백행의 근본」이라 쓴 표지석이 경상북도 孝시범마을이라 말해준다.
봉화닭실마을
달실은 동북에 있는 문수산이 병풍처럼 둘러있고, 그 줄기에서 서남으로 뻗어 내려온
백설령(白雪嶺)이 암탉이 알을 품은 듯한 형세로 자리하고 5시방향 즉 간좌곤향(艮座坤向)으로
마을을 내려다보는 자세를 취하고 있으며, 안산으로 있는 옥저봉은 수탉이 활개치는 형상을 하고 있다.
즉 달실의 지세는 수탉과 암탉이 서로 마주보고 있어 사랑을 나누며 알을 품는 명당이다.
닭이 알을 품은 형태는 자손들이 많이 번창하며, 동시에 재산도 크게 늘어나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두 산으로 둘러싸인 마을은 전형적인 배산임수(背山臨水)형의 전통마을의 모습이다.
뒷산을 배경으로 마을의 촌락들이 구성되어 있고, 그 앞에는 논이, 다시 그 앞에는
작은 개천이 흐르고 있는 포근한 모습을 띠고 있다.
사적 및 명승 제3호로 지정되어 있는 이곳은, 그 명칭에 걸맞게 훼손되지 않은
자연과 다양한 문화유적들이 산재해 있다.
조선시대의 풍수가 이중환은 오래 전에 달실을 경주의 양동, 안동의 내앞, 풍산의 하회마을과 함께
삼남의 4대 길지로 뽑았다. 유곡일대의 봉화지역은 전란의 피해가 없는
십승지지(十勝之地)의 하나이기도 하다.
풍수지리에서 명당은 산, 강 그리고 바람 등 자연의 기운에 의하여 형성된다.
이곳 달실의 지세를 풍수이론으로 분석하면 역시 명당이라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이 마을은 약 500여 년 전, 조선중기의 문신이자 학자였던 충재(沖齋) 권벌(1478~1548)선생께서
마을에 입향하신 이후 지금까지도 후손들이 지켜오고 있는 안동권씨 집성촌이다.
특히 청암정과 석천정이 있는 석천계곡은
명승 제60호로 지정되어 있는 경관이 빼어난 곳이다.
충재 권벌 종가
충재 권벌의 본관은 안동, 자는 중허(仲虛), 호는 충재 또는 훤정(萱亭)이다.
그는 성종9년 11월 6일 진외가陳外家(아버지의 外家)안동 북후면 도촌리(속명, 도계촌)에서 태어나
19세 때인1496년(연산군2)에 진사, 1507년(중종2)에는 문과에 급제했고, 42세 때인 1519년 (중종14) 2월에 예조참판이 되었으나 사화가 일어날 조짐을 보고 외직을 자청해 삼척부사가 되었다.
하지만 그해 11월 그가 그토록 우려했던 기묘사화의 피바람에 끝내 휘말려 파직되어
외가인 파평윤씨 선산이 있었던 닭실로 낙향했다.
중종 초년(1516년)에 조광조와 김정국 등 기호사림파가 중심이 되어 추진한 개혁정치에
영남 사림파의 한 사람으로 적극 가담했는데 그것이 빌미가 되어 파직을 당했던 것이다.
이후 1545년 을사사화(乙巳士禍) 때는 그 화를 온몸으로 맞아 결국 평안도 삭주 지방으로 유배되어
이듬해에 세상을 떠났다. 그는 살아있을 때 병조판서, 한성판윤, 예조판서 등 요직을 거쳐 의정부 우찬성에 이르렀고, 사후에 관작이 회복됨은 물론 영의정에 추증되어 1588년 삼계서원(三溪書院)에 배향되었다.
청암정(靑巖亭)
마을의 중앙부위에 위치한 청암정은 500년이라는 마을의 역사와 함께하고 있다.
거북이 모양의 바위위에 정자를 건축하고, 바위주변에는 거북이가 좋아하는
물을 담기위해 인공연못을 조성하였다.
흔히 아름다운 자연물 위에 인공물을 건축할 경우, 불가피하게 자연물이 인공물에 가려져
그 아름다움을 잃게 된다. 그러나 청암정의 경우에는 그 반대의 경우에 해당된다.
지금까지도 우리나라의 아름다운 정자를 꼽으라고 하면 그 순위권 안에는 청암정이 있다.
이는 바로 거북이 바위 위에 지어진 청암정이 기존의 바위와 아주 잘 이룬 조화 때문이라고 한다.
이 청암정은 넓은 마루를 가지고 있어 전통식 교육체험에 적합한 곳이기도 하다.
실제로 과거 이곳은 마을의 입향조인 충재선생께서 공부를 하기위한 장소로 건립하였고,
그의 사후에는 후손들이 서당으로 활용했던 곳이기도 하다. 전통식 교육체험의 경우
과거의 향수를 느껴 볼 수 있는 장소이기도 하다.
▼ 연못 주변에는 향나무,왕버들나무가 정자와 어우러져 운치를 더해 준다.
이 바위위에 정자를 지을 당시에는 연못이 없었다. 온돌방을 두어 굼불을 땔수 있게
청암정을 짖고 난 뒤부터 이 마을이 가물기 시작하였다.
어느날 고명한 스님을 모셔서 물어본 즉
이 바위는 거북바위인데 물에 사는 거북이 등에 정자를 짖고
굼불을 때니 거북이 노하였다는 것이다.
마을사람들은 거북바위 주변에 연못을 파고 물길을 만들었으며,
청암정 온돌방에 아궁이를 없애고 난 뒤부터 비가 내리고
가뭄이 없어졌다는 이야기가 전해오고 있다.
▼ 사극 "동이"에서 숙종의 사가로 동이가 의주에서 돌아와 신변보호를 위해 머물던 곳,
선덕여왕에서 천명공주가 숨어 지내던 곳이며, 음란서생,바람의 화원 촬영지로도 유명해진 곳이다.
<사극 "동이" 촬영지>
<영화 바람의 화원 포스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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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이가 되어...
▼ 청암정 현판
▼ 전서체의 「靑巖水石」이라 쓴 글은 미수 허목선생의 필체이다.
특히 이 현판은 미수선생이 청암정에 한번 가보지 못한것을 안타까워하며
88세되는 해(1582년) 4월에 靑巖水石 네글자를 써 놓고 글을 보내지도 못하고
병석에 눕게 되어 그 달 하순에 운명하시니 이 글씨가
미수선생이 마지막으로 쓴 절필(絶筆)로 알려진 것이다.
이 글을 써 놓고 보내지 못한 안타까운 마음과 글씨의 내력을
현판 옆에 작은 글씨로 적어 놓았는데,
"청암정은 권충정공의 산수에 있는 옛집이다.
골짜기 수석이 가장 아름다워 절경으로 칭송되고 있다.
내 나이 늙고 길이 멀어 한번 그 수석간에 노닐지는 못하지만,
항상 그곳의 높은 벼랑 맑은 시내를 그리워하고 있다.
특별히 청암수석 네 자를 큰글자로 써 보내노니
이 또한 선현을 사모하는 마음 때문이다. 이 사실을 기록해 둔다.
8년 초여름 상완에 태령노인은 쓴다."라는 내용이다.
▼ 권벌선생께서 서재로 사용하시던 별채
3칸 맞배지붕으로 간결하고 단아하게 지어졌다.
충재박물관
▼ 沖齋博物館은 宗家에서 소장해오던 遺物을 보관하고 전시한 곳이다.
보물 482점과 기타 유물 등 총 10,000여 점에 이르는 조선시대 유물을 소장하고 있다.
▼ 박물관에 소장된 미수 허목선생이 쓴 「청암수석」 원본(보물 제902호)
♣ 함께 답사를 한 고운님들,,,
♣ 마을 앞 인삼밭을 지나며
금계포란형의 지형인 이 마을의 원래 이름은 '달실', 또는 '다실'이다.
닭의 이 곳 방언이 달이기 때문에, 달실은 '닭모양의 마을(골짜기)'이라는 의미이고,
표준어를 적용하여 닭실로 부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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