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5월 6일
경희궁(慶熙宮)
서울시 종로구 신문로 2가 2-1 소재 / 사적 제271호
현재 서울에 남아 있는 조선 5대궁 중 서쪽에 자리하여 서궐로도 불렀다.
정원군(定遠君)의 집 근처인 색문동에 왕기가 서려 있다는 부사 신경희의 말에 따라
이곳의 왕기를 제압하기 위해 1617년(광해군 9)에 수백 호의 여염집을 강제로 이주시키고
경덕궁을 짓기 시작하여 3년 뒤인 1620년 완공했다.
인조반정(1623년)으로 등극한 인조는 이곳에서 정사를 보았으며,
그뒤 효종부터 철종에 이르는 10여 명의 임금이 거쳐했다. 현종과 숙종은 이곳에서
평생을 보냈기 때문에 이 기간 동안에 화재와 수리가 특히 많았다.
숙종은 이 궁의 정전인 회상전에서 태어나 융복전(隆福殿)에서 죽었다.
경종은 숭정문(崇政門)에서 즉위함으로써 경덕궁에서 최초로 즉위식을 올렸다.
영조는 1760년(영조 36) 인조의 아버지 원종(元宗)의 시호인 '경덕'과 음이 같다는 이유로
'경덕궁'을 '경희궁'으로 개칭했다. 영조는 이곳에서 즉위를 했으나 몇 달만 이곳에서 지냈으므로
거의 빈 궁궐로 있었다. 1810년(순조 10) 순조가 이곳으로 옮겨 지냈는데, 1829년(순조 29)에
많은 건물이 불타 2년 뒤에 중건했고, 1834년 회상전에서 죽었다. 헌종도 이곳에서 즉위했으나
여섯 달만 머물렀으며 그뒤 다시 빈 궁궐이 되었다. 1860년(철종 11) 수리를 하고
철종이 일곱 달만 머물고 창덕궁으로 옮김으로써 조선왕조가 끝날 때까지 빈 궁궐이었다.
이 후 일제가 대한제국을 강점하면서 경희궁은 철저히 훼손되었다.
1910년 일본인 학교인 경성중학교가 들어서면서 대부분의 궁궐 건물이 헐려버리고
그 면적도 절반 정도로 축소되어 궁궐의 면모를 잃어버리게 되었다.
흥화문(興化門, 서울 유형문화재 제19호)
1620년(광해군 12)에 세워진 것으로 경희궁의 정문이다.
1915년 일본인 다닐 학교를 지으면서 궁궐 남쪽으로 이건하였으며,
1932년 이토 히로부미의 사당인 박문사로 옮겨 정문으로 사용했다.
해방 후 박문사 터에 들어선 영빈관의 정문으로, 이 후 신라호텔의
정문으로 사용되기도 했다. 서울시에서 경희궁복원사업을 시작하면서
1988년 이곳으로 옮겼다.는 내용...
경희궁지(慶熙宮地)
경희궁은 광해군 때 창건되어 조선후기 중요한 궁궐로 자리매김하였다.
그러나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에 소유권이 넘어가면서 전각들이 철거 이전되었고
궁궐로서의 웅장한 면모를 잃었다. 현재는 몇몇 전각들을 복원한 상태다.라고...
숭정문(崇政門),
숭정전으로 출입하는 문으로 경종, 정조, 헌종이 이 문을 통하여 즉위하였다.
숭정전과 품계석
숭정전 앞 마당과 숭정문의 안쪽
숭정전(崇政殿)
경희궁의 정전(正殿)으로 1618년(광해군 10)에 건립되었다.
일제가 경희궁을 훼손하면서 1926년 숭정전을 인본 사찰인 조계사에 매각했으며
현재는 동국대학교 정각원으로 남아 있고, 이 건물은 복원된 것이다.
숭정전의 뒤편
자정문(資政門)
자정전으로 출입하는 정문
자정전(資政殿)
경희궁의 편전으로 1617~1620년 사이에 건립,
일제가 헐어버린것을 서궐도안에 따라 1980년대에 복원한 것이다.
자정전 왼쪽 행각
태령전(泰寧殿)
영조의 어진(초상화)을 보관하던 곳.
일제에 의해 파괴된 것을 2000년 서궐도안에 따라 복원하였다.
영조 어진(초상화)
서암(瑞巖)
태령전 뒤에 기이한 모양의 바위,
바위속에 암천이라 불리는 샘이 있어 옛부터 경희궁의 명물로
1708년(숙종 34)에 서암이라 칭했다.
서암쪽에서 본 자정전의 후면
서암에서 본 태령전의 추녀마루 자상
봄비에 젖은 경희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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