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 이야기들

방중술로 천하를 평정한 미실 궁주

자즐보 2015. 12. 2. 00:12

"방중술로 천하를 평정한 미실 궁주"

 

조선시대 최고의 탕녀를 꼽으라면 대개 "어우동"을 꼽는다.

이는 소설 또는 영화에서 대중에게 널리 알려진 이미지 때문이리라...

어우동은 사대부 가문의 딸로 태어나 종친가의 며느리로 출가했으니

외견상으로 대단한 신분에도 불구하고 남편 하나로는 색욕을 주체하지 못해

울 밖으로 뛰쳐나간 여인이다.

남자를 탐하고 싶은 마음이 너무나 간절하여 친정과 시댁 양가의 영욕을 분연히

떨쳐 버린채 노비에서 부터 귀족 벼슬아치를 가리지 않고 탐하여 보수 기득권층의

분노를 유발하였던 여인이 바로 어우동이다.

어우동이 섭렵한 인물들은 실로 방대하다 못해 요즘으로 치면 기네스북에 오를만 하다.

하지만 방중술로 따지자면 당대의 생불이라 일컬었던 지족선사를 한방에 거꾸러뜨린

"황진이"가 단연 으뜸이 아니겠는가.

靑山裏 碧溪水(청산리 벽계수)야 수이 감을 자랑마라

一到滄海(일도창해)하면 다시 오기 어려우니

明月(명월)이 滿空山(만공산)하니 쉬어 간들 어떠리.

 

황진이의 대표작이라 할 수있는 윗 시조를 통해서 풍류를 사랑하는 그녀의 진면목을

엿볼수있다. 그녀에게 있어서 인생은 단지 풍류를 즐기는 것, 섹스는 음악이나 시조와 같은

풍류를 위한 하나의 도구였다.

하지만 위의 경우와는 달리 달통한 섹스 실력, 즉 방중술을 이용해 천하를 평정했던 여걸이 있었다.

신라 성덕왕 때 김대문이 지은 화랑세기(花郞世記)에 등장하는 '미실(美室)'이라는 여인이 바로

그 주인공이다.

화랑세기는 삼국사기에 자주 등장하는 참고문헌이지만 오늘날 그 원본은 찾을 길이 없고,

조선 후기들어 어떻게 필사본이 발견되었는데 삼국사기에 등장하는 점잖은 문구와는 달리

문란한 성 풍속도를 담고 있다.

때문에 과거 조상님들의 역사가 무척 고상하기만를 바라는 역사가들에 의해서 위작시비가

제기된 바 있는데 사실을 증명할 다른 사료가 없어 명확하게 단언을 내리지 못하고 있다.

하지만 당대 주변 나라의 고대사를 들춰보면 모계사회에서 부계사회가 혼재된 형태로 오늘날의

도덕적 잣대로 재단할 때 성풍속도가 문란하여 화랑세기와 일맥상통하는 부분이 있고, 음란성을

제외한 내용은 대체적으로 인정되는 분위기라 별 문제될 것은 없다고 본다.

이 문제의 화랑세기에 '미실' 이란 여인이 등장하는 것이다. 화랑세기에 적힌대로라면

그녀는 정치인은 아니었지만 정치적으로 막강한 실세로써 당대에 보이지 않는 영향력을

발휘했던 인물이었다.

미실은 법흥왕-진흥왕 시대를 대표하는 훈신(勳臣)인 미진부(未珍夫)의 딸로써 10세 풍월주인

미생(美生)의 한 살 위 누이이며, 11세 풍월주인 하종(夏宗)과 16세 풍월주인 보종(寶宗)의

어머니(이들은 서로 씨가 다르다)이며, 저 유명한 김유신에게는 처 조모가 된다.

이렇게 막강한 권력을 움켜쥐게 된 데에는 물론 비장의 무기가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그녀의 치맛속에서 시작되었다. 그녀는 방중술에 있어서 천부적인 기질을 타고 났는데 아마도

그녀의 외할머니로부터 물려 받은 유산이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녀의 외할머니였던 '옥진'은 당시 신라왕에게 색공(色供)을 바치는 보직을 가업으로 삼았는데

이는 조선시대의 채홍사(採紅使,조선 연산군 때, 미녀와 좋은 말을 궁중에 모으기 위해 지방으로

파견하였던 벼슬아치)와 비슷한 것이었다. 그녀의 집안은 윗대에서 부터 집안 대대로 색공 바치는

것을 가업으로 삼는 이 방면의 명문가 출신이었다.

미실은 그 방면의 명문가 답게 어릴적부터 남성을 사로잡기 위해 각종 교태를 부리는 방법과

음주가무에 대한 노하우를 외할머니로 부터 모조리 전수받을 수 있었다.

그녀는 당대 미인의 전형적인 모습으로 얼굴은 아름답고 몸이 풍만함은 물론 성격마저 명랑하므로

화랑세기에 "세 가지 아름다움의 정기(精氣)를 모았다."고 기록되어 있을 정도였다.

그러한 미모에 최고의 방중술을 연마하였으니 '지소태후'가 미녀들을 궁중에 모아놓고 아들이었던

세종 전군(殿君·왕이나 태후의 아들)에게 부인을 고르라고 했을 때 세종이 미실을 선택한 것은

너무나 당연할 수 밖에 없었다.

진흥왕의 부인이었던 '사도황후'를 폐할 목적으로 미실을 이용하려 했던 지소태후는 작전에 실패하자

자신의 음모가 천하에 공개될 것이 두려워 미실에게 색기로 궐내를 어지럽힌다는 누명을 씌워

궁 밖으로 내치게 된다.

미실은 옛 연인이었던 화랑 '사다함'과 재회하여 둘 만의 혼인식을 치룬 뒤 사다함을 전쟁터로

내 보냈는데 이 무렵에 전 남편이었던 세종이 또한 미실을 향한 그리움으로 상사병이 나서

위급한 지경에 처했다는 소식을 듣는다.

미실은 다시 궁으로 불려 들어갔고, 전쟁터에서 돌아온 사다함은 미실이 궁으로 돌아가 다시

세종의 처가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큰 충격을 받은 후 상사병으로 시름 시름 앓다가

그만 15세에 요절하고 말았다 .

아마도 미실이 섹스를 권력의 무기로 사용하겠다는 결심을 하게 된 데에는 진정으로 사랑했던

화랑 사다함의 죽음이 결정적이었다는 얘기도 있다.

세종의 아내였던 미실은 자신의 성적 매력을 최대한 이용해서 권력장악에 나섰다. 그녀는 먼저

진흥왕의 부인 사도왕후와 삼생 (三生· 전생·현생·후생) 의 일체가 될 것을 약속한다.

이는 다시 말해서 의자매를 맺었다는 뜻이다. 사도 왕후는 대원 신통에다가 미실의 숙모였기 때문에

그녀와 쉽게 권력동맹을 맺을 수 있었다. 이때부터 사도왕후는 그녀의 책사노릇을 훌륭히 해냈다.

사도 왕후는 미실에게 자신의 아들이었던 동륜태자와 사귀어 차기 왕후 자리를 노리라고 권유했다.

이를 혼쾌히 수락한 미실은 곧 태자의 아이를 임신하게 된다.

어느날 임신한 아이의 할아버지 뻘 되는 진흥왕은 미실의 자색을 소문으로 전해 듣고 색정이 동하여

은밀히 불러 들이게 되었다. 이런 얘기는 중세 유럽에서도 자주 등장하지만 이런 얘기를 들을 때 마다

왕실 족보는 개 족보라는 생각을 한다.

미실은 애인의 아버지인 진흥왕에게도 전문적인 방사솜씨를 발휘했으며, 그 덕택에 왕의 총애를 입어

곁에서 직접 정사에 참여할 수 있는 신분으로 격상 되었다.

말하자면 그녀는 도교의학사에서 황제를 성교육하는 현녀(玄女)나 소녀(少女)가 그랬던 것처럼 미실은

제왕이 성적 능력을 배양케 하는 개인교사였다. 방중술가로서 우뚝한 미실의 행적은 그와 밤을 보낸

세종이 다음날 휘청거리곤 했다는 대목에서도 읽을 수 있다.

진흥왕의 총애를 입은 미실은 밤 마다 찾아오는 동륜태자가 차츰 부담스러워지게 되었다.

그녀는 동생인 미생을 시켜 부담스러워진 동륜태자를 환락의 세계로 유혹하는데 성공한다.

동륜태자는 어느날 아버지인 진흥왕의 후궁인 보명궁주를 후려내기 위하여 담을 넘다가 큰 개에 물려

죽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 과정에서 태자의 행적을 수사하던 중 태자의 수행원들이 미실과 태자 사이의 스캔들을 폭로하게 됐으며 불륜이 들통 난 미실은 원화(풍월주 이전에 여인이 화랑을 대표하던 자리)의 자리를 내놓아야 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미실은 또 다시 궁에서 쫓겨나는 처량한 신세가 되었다. 하지만 그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우리들이 영웅으로 생각하는 진흥왕이었지만 미실과의 환상적인 섹스는 끊을 수 없는 마약과도 같았다.

결국 진흥왕은 자신의 신념을 져버리고 궁 밖으로 미실을 찾아와 궁으로 다시 돌아갈 것을 눈물로

호소했다고 한다.

이때 미실은 죽은 옛 애인이었던 사다함의 씨 다른 동생이었던 제7대 풍월주 '설화랑'과 한창 돈독한

정을 쌓아가고 있는 중이었다.

사다함과 외모가 비슷했던 설화랑에게 사랑하는 감정을 느낀 미실은 남편인 세종을 변방으로

내 보내고 설화랑을 풍월주 자리에 앉히는데 성공한다. 

이와 같이 그녀는 자신의 섹스 테크닉과 특유의 정치적 수완을 발휘해서 실질적인 국정운영에

깊숙히 관여하였고, 화랑의 대모로까지 불리우며 왕을 좌지우지할 정도의 무소불위의

권한을 행사하였다.

설화랑의 최후는 그녀의 진면목을 잘 보여주는 대목으로 손색이 없다. 진흥·진지·진평 등

세 왕을 모신 그녀가 진평왕 28년(서기 606년) 마침내 병에 걸리자 설화랑은 자신이 그녀의 병을

대신하게 해 달라고 간절하게 하늘에 기원한다.

하늘이 그의 간절한 소망을 들어주신 걸까?  설화랑은 마침내 병에 걸려 죽게 되었다.

미실은 자기 속옷을 넣어 함께 장사 지내며 "나 또한 오래지 않아 너를 따라 하늘로 갈 것이다"

라고 애도하였다.  그때 설화랑의 나이는 58세였다.

 

우리 역사에서 여러 명의 여성들에게 일부종사(一夫從事)를 시킨 남성은 많지만

여러 남성들에게 일부종사(一婦從事)를 시킨 여성은 미실이 유일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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