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관령 주막집 아낙의 유혹
6월 초부터 피는 밤꽃 향기는 특이한 냄새를 풍긴다.
옛날에는 남자들의 정액 냄새와 비슷한 이 냄새를 ‘양향(陽香)’이라 불렀다.
이 냄새에 취하여 부녀자들의 자세가 흔들릴까봐 밤꽃이 필 무렵이면
부녀자들은 외출을 삼갔고 과부는 몸가짐을 더욱 조신하게 처신했다.
“혼인으로 부부의 연을 맺었지만 나라에서 필요로 하는 큰 인물이 될 때까지
부부관계를 잠시 접고 한양에 올라가서 공부를 하세요.
저는 친정에서 그림 공부나 하며 서방님의 입신양명을 기다리겠습니다.”
지금으로부터 380년 전, 아내의 청을 받아들여 한양으로
공부하러 간 선비가 있었다.
혈기왕성한 나이에 아내와 떨어져 공부에 전념하던 선비는
꽃같이 예쁜 아내가 보고 싶어 아내와의 10년 약속을 어기고
처가를 찾아가는 길에 강원도 평창 대화의 한 주막에서 하룻밤 묵게 되었다.
지금이야 고속도로가 뻥뻥 뚫려 서울에서 두어 시간이면 닿는 거리지만
그 시절에는 강릉에서 서울을 오가는 선비들은
진부에서 하룻밤을 묵고 아흔아홉 구비 대관령을 걸어서 넘어야 했다.
한양에서 대화까지 걸어왔으니 노독이 쌓여 곤한 잠에 떨어질 즈음
주막집 울타리에 늘어선 대숲이 스산한 가을바람에 사각거리고
짝을 찾는 귀뚜라미 애달프게 울어 에는데...
달빛 교교한 심야에 주안상을 받쳐 들고 장지문을 여는 여인이 있었다.
“게 누구냐?” “아낙이옵니다.”
달빛에 비치는 여인을 바라보니 주막집 여인이 틀림없다.
땅거미가 내리는 저녁 무렵 주막을 찾아들었을 때,
수려한 인물에 단아한 자태가 이런 시골구석 주막에 있기는
아까운 인물이구나 하고 눈여겨봤던 바로 그 여인이었다.
“이 깊은 밤에 어인 일인고?”
“선비님의 인품이 고고하여 약주 한 잔 올리려고 하옵니다.”
나직한 목소리로 다소곳 머리를 조아리며 절을 올리는 자세가 범상치 않다.
여인의 자태에서 양반집 규수의 흔적이 묻어나고 있었지만
오른쪽으로 여민 말기의 품새로 보아 처녀는 아닌 것 같았다.
비록 치마로 하체를 감쌌지만 들이쉰 숨을 아래로 내려
음기(陰氣)를 모은 뒤 깊이 빨아들이는 훈련을 한
걸음걸이로 보아 여염집 아낙은 아닌 듯 싶다.
“허허허, 자네 뜻이 정 그러하다면 술을 따르게.”
수염을 쓰다듬으며 너털웃음을 웃고 있지만
선비의 얼굴은 호기심과 긴장이 교차되고 있었다.
다소곳이 절을 올린 아낙이 살포시 일어나
교방 탁자 넘어 구석에 자리를 지키고 있던 거문고를 가져왔다.
섬섬옥수 여인의 오른손이 술대를 쥐고
허공을 가르더니만 거문고가 팅∼ 통∼ 탱∼ 울어댄다.
고치에서 비단을 뽑아내듯 섬세하고 부드러운 음향이 가야금이라면,
밤나무로 뒷받침대를 하고 오동나무로 울림통을 한 거문고는
음(陰)과 양(陽)이 교합할 때 들려오는 교성처럼
잦아들다 솟구치고 솟구치다 잦아드는 음색이 황홀하고 열락적이다.
여인이 쟁반에 옥구슬 굴러가는 목소리로 권주가와 함께 잔을 채운다.
부드러운 여인의 손에 들려 있던 호리병에서 흘러나온 송화주가
선비의 입을 통하여 몸속에 흐르자 짜르르∼ 술기운이 전해온다.
아닌 밤중에 홍두깨라더니 이게 무슨 횡잰가?
이 호젓한 곳에서 달빛 은은한 심야에 술과 여자라.
회가 동하지만 근본을 알지 못하는 여인은
함부로 범접하지 않는 것이 선비의 도리이니 경계할 수밖에.
“그래, 무슨 사연이라도 있느냐?”
“선비님과 하룻밤 가연 맺기를 간절히 청하옵니다.”
가연(佳緣).
요샛말로 하면 원나잇스텐드(one-night stand) 하자는 것이다.
남녀유별이 엄격했던 그 시절에 정숙해 보이는 여인네가
처음 보는 남정네에게 통정(通情)을 청하니 놀라 자빠질 일이었으나
촉촉이 젖은 여인의 검은 눈망울이 그 무엇을 간절히 갈구하고 있었다.
여인은 겨드랑이가 깊이 파인 연분홍 항라 저고리를 벗고
모란무늬가 은은한 치마끈을 풀어내리고 선비의 품속을 파고들었다.
아무리 선비의 체통이 군자의 뜻을 좇는다 해도 혈기 왕성한 사내인 이상
불끈 일어서는 욕망을 잠재우기는 어려웠다.
지게문 사이로 들어오는 달빛에 비친 여인의 속살이 눈부시다.
귀밑머리에서 흘러내린 어깨선이 상아를 깎아내린 듯 아름답다.
다 벗어 내리지 않은 치마 말기 속에 반쯤 드러난 젖무덤이 터질 듯 솟아 있다.
호리병을 두 손에 받쳐 들고 술을 따를 때에는 봉긋한 꼭지가
선비의 팔굽을 스쳤다.
바람이 분다.
향탁에선 연향(戀香)이 타오르고 문틈 사이로
흘러들어온 바람에 지촉등불이 살랑거린다.
흔들리는 불빛에 드러난 여인의 얼굴은 발그레 물들어 있고
숨소리는 거칠어졌다. 거친 숨소리가 점점 더 가빠진다.
촉촉이 젖은 여인의 두 눈이 스르르 감기더니 별빛처럼 반짝거렸다.
분꽃씨 같은 여인의 검은 눈동자가 눈물에 떠 있는 조각배처럼
흰자위에 두둥실 떠 있다.
멍! 멍! 멍! 개 짖는 소리가 적막을 깼다.
밤하늘에 흐르는 달그림자를 보고 놀랐는가?
동구 밖 물방앗간에 몰래 숨어 들어가는
아랫마을 돌쇠와 과부댁을 보고 컹컹대는가?
아궁이에서는 남은 솔가지가 마저 타느라 타닥거렸다.
여인이 나비 등잔불을 껐다. 밤하늘엔 별이 쏟아지고
다시 적막이 흘렀다.
여자를 품에 안아본 것이 언제였던가?
7년 전 한양으로 공부하러 떠나올 때
사랑채 문간을 부여잡고 흐르는 눈물을 옷고름으로 닦던
아내의 얼굴이 스쳐 지나간다.
순간 선비는 안간힘을 다하여 여인을 밀쳐내고 스스로를 꾸짖었다.
“아서라, 선비의 도리가 아니느니라.”
당황한 여인은 고개를 숙인 채 흐느꼈다.
“선비님, 너무 하시옵니다. 흑∼흑∼흑∼.”
봉긋한 젖무덤까지 풀어헤쳤던 여인이 떨리는 손으로
옷고름을 여미며 흐느껴 울기 시작했다.
동창이 밝을 무렵 주막집을 나선 선비는 장평, 진부를 지나 아흔아홉 굽이 대관령을 넘어 해질 무렵에 처가에 도착하였다. 지금은 그 서기가 사라졌을 뿐 아니오라 말이 튀어나온다. 사람을 현혹하는 무기(誣欺)인가?
'지게문 사이로 흘러들어 오는 달빛이 여인의 어깨 위에 부서지며 흘러내린다.
'댓잎에 스치던 밤바람이 일렁이며 툭 하고 밤송이 구르는 소리가 들리건만
여인의 어깨 위에 일렁이던 파도는 멈추지 않았다.
여인의 처연한 모습을 바라보는 선비는 난감했다.
“주안상을 물리고 지필묵을 들여라.”
주안상을 치우고 붓과 벼루와 청잣빛 영롱한 연적을 받쳐 들고 들어온 여인은
종이를 가져오지 않았다.
선비가 눈빛으로 화선지를 찾자 여인은 말없이 갑사 치마끈을 풀어
선비 앞에 펼쳐놓았다.
벼루에 먹을 갈던 여인의 눈가에 이슬이 맺히더니 벼루에 떨어졌다.
흐느낌을 감추려는 듯 여인의 손놀림이 빨라졌다.
거울에 비친 꽃이요 물위에 떠 있는 달이로다(鏡花水月)
이튿날. 일필휘지(一筆揮之)로 써 내린 휘호를 치마에 남겨두고
얼마 만에 찾은 처가인가?
7년 전 떠나올 때 마당에 심은 배롱나무가 몰라보게 자랐지만
아내의 모습은 새색시 그대로 고왔다.
한 달을 처가에 머물며 쌓였던 회포도 풀고 아내와 운우의 정을 나눈 선비는
과거시험 때문에 다시 처가를 떠나 한양으로 길을 떠났다.
대관령 굽이굽이 고갯길을 터벅터벅 걸어 내려오던 선비는
날이 저물자 주막집 그 여인이 자꾸만 생각났다.
다른 주막에서 묵을 수도 있지만 다시 대화 그 주막을 찾아들었다.
“지나는 길손에게 그런 당돌한 청을 한 연유가 무었이더냐?”
주안상을 마주 놓고 여인에게 물었다.
“비록 배운 것은 없어 주막을 열어 먹고사는 무지렁이이오나
사람의 기색을 살필 줄 아옵니다.”
“기색이라…? 그래, 내 기색이 어떻더냐?”
“그날 선비님의 안색에 서기가 서린 것을 보고 귀한 자식 하나 얻어 볼까 하는
마음에 아녀자로서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그리하였습니다.”
“오호, 그랬었구나. 그렇다면 오늘밤에 이루지 못한 운우의 정을 풀어보자꾸나.”
이래서 남자는 도둑놈이라 하는가?
진정으로 원할 때는 거절하더니 처가에서 아내와 실컷 배꼽을 맞추고선
식사 후에 숭늉 챙겨먹는 식으로 들이대니 이런 고얀 일이 있는고.
“지금은 아니 되옵니다.
그때는 선비님의 안색에 서기가 넘쳐났으나
이미 부인의 몸에 귀한 아드님이 자리를 잡고 있는데
미천한 계집이 몸만 더럽힐까 두렵습니다.”
여인의 표정은 싸늘했다. 선비는 정신이 바짝 들며
싸하게 퍼지던 술기운까지 확 달아났다.
“선비님은 아들을 얻을 것이온데,
아이는 인시에 태어날 것이며 일곱 살에 호환이 두렵사옵니다.”
다소곳이 치마폭에 무릎을 접은 여인의 입에서 예사롭지 않은
하늘의 뜻을 흘리는 천기누설(天氣漏泄)인가?
정신이 바짝 든 선비는 지금까지의 무례를 사과하고 호환을 막을 방도를 물었다.
호환(虎患)이 무엇인가?
애 어른 할 것 없이 호랑이에게 물려가는 것은 그 당시에 가장 무서운 일로,
특히 사대부가에서는 치욕으로 여겼다.
조상을 소홀히 모시는 집안에 호환이 든다는 속설이 있었기 때문이다.
오죽했으면 ‘호랑이 물어갈 놈’이라는 욕까지 나왔겠는가.
“1000그루의 밤나무를 심으면 화를 면할 것입니다.
또 아이가 일곱 살 되던 해 낯모르는 스님이 찾아와 아이를 보자 하거든
절대 보여주지 말고 밤나무를 보여주소서.”
한양에 도착한 선비는 밤나무를 심으라는
그 여인의 말이 머리를 맴돌아 공부가 되지 않았다.
밤나무가 무엇인가?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밤나무는 죽어서 신주(神主)가 된다.
많은 사람으로 하여금 그 앞에 머리를 조아리게 하는 신성한 나무이기에
밤나무를 심는 것은 덕을 쌓는 것이다.
율곡 이이가 태어난 오죽헌 몽룡실
과거 공부하던 선비는 고향 마을에 1000그루의 밤나무를 정성들여 심었다.
강릉에 있던 아내도 파주에 와 있고 사내아이가 일곱 살 되던 어느 날.
대화 주막집 여인의 말대로 금강산 유점사에서 왔다는
노스님이 갈포 장삼에 굴갓을 쓰고 찾아왔다.
“이 고을에 나라의 재목이 될 아이가 있다는 소문을 듣고 찾아왔소이다.”
아이를 보자고 했다.
“내 아이에게 손대지 마시오.”
선비가 소리를 지르며 밤나무를 가리켰다.
그러자 노스님이 밤나무를 세고 있지 않은가.
하나, 둘, 셋…. 이렇게 헤아리던 밤나무 숫자가 999에서 멈췄다.
소를 매놨던 밤나무 한 그루가 그만 말라 죽어가고 있었다.
“천명을 거역하려는 것이오?”
진노한 노스님이 하얗게 흘러내린 수염을 쓰다듬으며 호통을 쳤다,
“나도 밤나무….”
소리치며 나서는 산밤나무가 있었다.
이 소리를 들은 노스님이 하얀 수염을 휘날리며 바람처럼 사라져버렸다.
이렇게 호환을 면한 아이가 조선시대 대학자 율곡이며
선비는 율곡의 아버지 이원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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