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 이야기들

청송심씨 소헌왕후 이야기

자즐보 2016. 4. 11. 14:48

외척 극도 경계 上王 태종의 권력욕 탓
우려했던 모함받고 친정가족 풍비박산

누구도 원망않고 세종 내조 성심 다해
10남매 키우며 內命婦 분란없이 이끌어

생때같은 두 아들 잃은 슬픔을 못넘고
몸져누운지 1년만에 52세로 삶 마감해...


소헌왕후 심씨(昭憲王后 沈氏, 1395년 10월 12일 ~ 1446년 4월 19일)는

조선 제4대 임금 세종의 왕비이다. 별호공비(恭妃),

시호선인제성소헌왕후(宣仁齊聖昭憲王后)이다.

청천부원군 안효공 심온(靑川府院君 安孝公 沈溫)의 장녀이며,

본관은 청송(靑松)이다.

 

 

 

# 1. 여인 심씨, 왕비가 되다
몸을 움직이자 붉은 비단 적의(翟衣)가 사각거렸다.

심씨(沈氏)의 마음이 다시 내려앉았다.

 

지아비의 즉위가 결정된 날부터 심씨는 사소한 소리에도 자꾸만 놀랐다.

하지만 그녀는 결코 내색하지 않았다. ‘다 괜찮을 것이다. 그럴 것이다.’

찬찬히 숨을 다스리며 심씨는 시어머니의 상심(傷心)을 짐작해 보았다.

시어머니 원경왕후 민씨는 자신의 동생 4형제를 남편 태종의 손에 잃었다.

외척을 극도로 경계하는 태종의 권력욕 때문이었다.

 

태종은 왕권에 누가 된다면 그 누구도, 그 어떤 기미도 용서하지 않았다.

하여 심씨는 그 환란에서 비껴나 있는 자신의 처지를 고마워했다.

 

아무리 개국공신 심덕부의 손녀이고

임금의 며느리이자 왕자의 아내라고는 해도

자신은 그저 정치판에서 열외된 셋째일 뿐이었으므로.

그런데 양녕대군이 물러난 세자의 자리에 지아비 충녕대군(세종)이

책봉되면서 부터 모든 것이 달라졌다.

 

그녀의 불안은 조금씩 성장하기 시작했고, 결국 세종의 즉위가 이루어졌으니

이제 자신은 어쩔 수 없이 왕비였다.

게다가 시아버지 태종은 상왕으로 물러나 있었지만 여전히 서슬이 퍼렇게

살아있었다. 앞으로의 모든 정사에 상왕전의 힘이 미칠 것이었다.

 

경사스러워야 할 대례(大禮)날 심씨는 심란했다.

혹여라도 권력의 모진 칼날이 친정을 겨눌까봐 두려웠다.

심씨는 본관이 청송으로 세종임금의 정비(正妃)다.

1408년(태종 8) 충녕군과 가례를 올려 경숙옹주에 책봉됐다.

그녀의 나이 열네 살 때였다. 지아비 충녕군은 열두 살이었다.

이후 1412년(태종 12) 충녕군은 대군으로 진봉됐다.

이때까지만 해도 심씨는 왕비가 되리라는 것을 꿈에도 생각하지 않았다.

 

기실 바라지도 않았다. 하지만 왕권을 이을 양녕대군의 무질서한 행동이

비난을 사게 되었고,태종 역시 그런 맏아들이 못 미더웠다.

결국 양녕대군은 폐세자되고,

1418년 6월 충녕대군이 세자에 책봉되면서 심씨는 경빈으로 승격됐다.

그해 8월에 마침내 충녕대군이 조선왕조 4대 임금(세종)으로 즉위하면서

심씨는 왕비가 됐다.

 

 

# 2. 아버지 심온의 죽음, 견디기 힘든 왕비의 무게
“심온(沈溫)은 국왕의 장인이라 그 존귀함이 비할 데 없으니,

마땅히 영의정이 되어야 할 것이라.” 상왕 태종의 명이었다.

그렇게 심온은 딸 심씨가 왕비가 되자마자 영의정이 되었다.

그의 나이 불과 마흔넷이었다.

심씨는 부디 아버지가 자중하기를, 몸을 한껏 낮추기를,

하여 끝까지 편안하기를 간절히 바랐다.

 

하지만 불안이 현실이 되는 데는 그리 긴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상왕 태종의 비위를 거스르는 일이 벌어지고 만 것이다.

1418년(세종 즉위년) 심온이 명나라에 사은사(謝恩使)로 떠나던 날이었다.

초가을의 정갈한 햇발 아래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먼 길을 떠나는 심온을 환송하기 위해서였다.

거리는 떠들썩했고, 심온의 위세는 기세등등했다.

그날의 풍경을 역사는 이렇게 기록했다.

‘영광과 세도가 혁혁하여 이날 전송 나온 사람으로 장안이 거의 비게 되었다.’

심온이 위세를 떨치며 떠나자 상왕 태종은 못마땅했다.

기실 외척(外戚)에게 힘이 실리는 경우를 늘 경계해오던 터였다.

하여 한때는 동지였던 처남들도 가차없이 제거하지 않았는가.

결국 상왕 태종은 심온을 치기로 결정했고 일은 가파르게 진행되었다.

하지만 역모로 엮을 명분이 필요했다.

그러던 중 심온의 동생인 동지총제(同知摠制) 심증이 ‘군사에 관한 일을

상왕이 독단적으로 처리한다면서 불평했다’는 말을 듣고 이를 빌미로 삼았다.

당시 태종은 상왕으로 물러나 있으면서도

병권을 거머쥔 채 권력을 휘두르고 있었다.

서슬 퍼런 국문은 이미 심온을 겨냥하고 있었다.

마침내 상왕 태종은 심온이 수괴(首魁)라는 증좌를 얻어냈다.

억울한 모함이었다.

 

결국 심온은 국경을 넘자마자 영문도 모른 채 체포, 압송되어

압슬형 등의 고문을 받았고 결국 자진하라는 명을 받아 사사(賜死)되었다.

동생 심증은 참수되었으며 심온의 아내는 천인으로 전락했다.

(심온의 아내 안씨는 그로부터 8년 뒤 천안(賤案)에서 벗어났으며,

심온은 그 무고함을 인정받아 외손자인 문종 때 신원이 복관작되었다.)

말 그대로 풍비박산이었다.

하지만 심씨가 친정을 위해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상왕의 결정은 남편 세종도 어찌할 수 없는 불가침의 영역이었다.

그녀는 다만 홀로 견딜 뿐이었다.

그런데 비정한 화살이 이내 심씨를 향해왔다.

심온을 제거하는 데 적극적이었던 신하들이 들고 일어난 것이었다.

그들은 훗날 상왕 태종이 세상을 떠나면 닥쳐올 중전 심씨의 복수를

두려워하고 있었다.

“아버지가 죄가 있으니, 그 딸이 마땅히 왕비로 있을 수 없습니다.”

신하들은 심씨의 폐위를 주장했다.

하지만 상왕 태종은 단호히 거부했다.

심온을 죽게 한 장본인이었지만, 신하들의 건의는 받아들일 수 없었다.

 

무릇 8남 2녀를 생산해 국본을 튼튼히 하고 왕실을 번창케 한 데다

선한 품성으로 한치의 사사로움 없이 아들 세종을 보필해온 며느리였다.

 

“평민의 딸도 시집을 가면 친정가족에 연좌되지 않는 법인데,

하물며 이미 왕비가 되었으니 어찌 감히 폐출하겠는가.

경들의 말이 옳지 못하다.” 그날 오후 상왕의 전언이 심씨에게 내려왔다.

“염려하지 말라.” 다행이었지만 다행이라 할 수 없었고,

천행이었지만 천행이라 할 수 없었다. 심씨는 그저 있었다.


# 3. 깊고 넓은 가슴, 조선 최고의 성모
심씨는 그 누구도 원망하지 않았다. 할 몫에 대해 성심과 최선을 다할 뿐이었다.

무엇보다도 그녀에게는 푸릇한 아이들이 열이나 되었다.

맏아들 세자 향(珦·문종),

둘째아들 수양대군(세조)을 비롯한 아들 8형제와 두 딸이 그들이었다.

그녀에게 자식들은 살아갈 힘이었으며 위안이었고 보람이었다.

무엇보다 심씨는 내명부(內命婦)의 으뜸으로서 의와 덕을 실천했다.

세종에게는 후궁이 다섯에, 그 소생이 10남 2녀나 되었지만 그로 인한 분란은

결코 일어나지 않았다.

심씨가 모든 후궁과 자녀들을 공평하며 자애롭고 현명하게 대했기 때문이다.

심지어 자신의 아들 모두를 후궁으로 하여금 기르게 할 정도로

신뢰를 보여주기도 했다.

세종도 그녀의 반듯한 내조를 알아주었고, 고마워했다.

하여 1436년 10월, 사정전(思政殿)에서 이렇게 칭송했다.

“우리 조종 이래로 가법(家法)이 지극히 바로잡혔고 내 몸에 미쳐서도

중궁의 내조에 힘입었다. 중궁은 매우 성품이 유순하고 언행이 훌륭하여

투기하는 마음이 없었으므로, 태종께서도 매양 나뭇가지가 늘어져

아래에 까지 미치는 덕이 있다고 칭찬하셨다.

이런 까닭으로 가도(家道)가 지금에 까지 이르도록 화목하였다.”

하지만 자식이 많은 만큼 그로 인한 속앓이도 적지 않았다.

크게는 세자의 일이었다.

불미스러운 일로 세자빈을 연이어 두 차례나 폐출한 데다

세 번째 세자빈은 산후병으로 잃어야 했다.

이는 곧 세자의 깊은 아픔을 뜻하는 것이어서, 심씨는 마음이 부쩍 수척해졌다.

게다가 넷째 아들 임영대군과

여덟째 아들 영응대군의 아내도 병을 앓는다 하여 내보내야 했다.

여자가 병에 걸리면 버림받는 시대였으니 하물며 지존의 며느리임에랴.

하지만 더 큰 고통이 그녀를 찾아왔다.

1444년 12월에 다섯째 아들 광평대군을,

이듬해 1445년 1월에 일곱째 아들 평원대군을 잇따라 여읜 것이다.

생때같은 자식의 요절에 그녀는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몸져누웠다.

 

그리고 결국 1년 만인 1446년 3월, 쉰둘의 많지 않은 나이로 생을 마감했다.
남편 세종은 지극한 마음으로 애도하며 그녀의 시호를 소헌(昭憲)으로 정했다.

 

소헌왕후 심씨는 성군(聖君)으로 존경받은 지아비 세종에 걸맞게,

역사상 손꼽히는 성모(聖母)로 이름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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