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대구여행*문화탐방/문경시

근암서원(近嵒書院)

자즐보 2015. 6. 18. 10:30

 

 

근암서원(近嵒書院)

문경시 산북면 금천로 351-5(서중리148-1)

 

근암서원은 1544년에 상주 목사이던 영천자 신잠(申潛)이 건립한

근암서당이 시초가 되어, 1665년(현종6)에 우암 홍언충 선생을 봉안하여 원이 되었으며,

1669년(현종10) 한음 이덕형 선생을 추배하여 서원이라 선액되었다. 그 후 1702년(숙종28)에

사담 김홍민, 목재 홍여하, 1786년(정조10)에 활재 이구, 식산 이만부, 청대 권상일 선생을

추배하여 칠현서원이 되었다. 1868년(고종5)에 조정의 서원 철폐령에 의하여

훼철되었으나 1982년 지역 유림에 의해 복원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지원루(知遠樓)

 

 

지원루 오른쪽에 있는 협문

 

 

근암서원 강당

 

 

 

서재, 유생들이 기거하는 기숙공간으로 "유의재(兪義齋)"라 한다.

 

 

 

동재, 유생들이 기거하는 기숙공간으로 "욕인재(浴仁齋)"라 한다.

 

 

 

내삼문(內三門), 사당영역으로 출입하는 문

 

 

 

경현사(景賢祠)

우암 홍언충 선생을 비롯하여 7분의 위패를 모신 사당

 

 

홍언충(洪彦忠)
자는 직경, 호는 우암, 관은 부림이다. 대제학과 좌참찬을 지낸 연산조 직신 문광공 허백당 홍귀달의 아들이다. 성종 계사년(1473년)에 태어났고, 연산 을묘년(1495년)에 사마시 동년 별시 을과에 급제하여 승문원 부정자, 홍문관 정자를 거쳐 교서 교리를 하다 예조정랑이 되었다.

갑자사화(1504년)에 거제도에 유배되었는데 하루는 섬 안에 사사가 있다는 소문이 나서 모두 피하려 창황하였으나 우암선생 형제는 태연자약하며 말하기를, “군명은 하늘이다. 하늘을 가히 도망칠 수 있느냐. 죽음이 있을 뿐이다”고 하였다 한다. 중종반정 후에 풀려났으나 그 뒤로는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고 후진을 양성하다 불행히도 36세에 졸하였다. 선생은 도학이 높고 엄정 충직하여 후학의 사표로 추앙받았다.

이덕형(李德馨)
호는 한음, 본관은 광주이다. 중종 신축년(1541년)에 태어났으며, 선조 경진년(1580년) 문과에 급제하여

홍문관 정자로 벼슬을 하여 경인년(1590년)에 직제학이 되었고, 임진년(1592년)에 대사헌이 되었다.

이해 4월에 왜란이 일어났으며 평양 대동강에서 일본인 현소 등과 담판을 지었으며, 침략의 불의함을

통매하고 왕명으로 요동에 가서 제병에 노력하고 명나라 병사가 내려왔을 때는 접반사가 되어 나라를

위하여 노력하였다. 무술년(1598년)에 우의정, 신축년(1601년)에 도체찰사, 임인년(1602년)에 영의정이

되었다. 광해조에 영창대군 옥사가 간신들의 농간으로 야기됨에 직언으로 극간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식음을 전폐한 지 수일에 병을 얻어 졸하니 나이 53세였다. 시는 문익공이다.

김홍민(金弘敏)
자는 임부, 호는 사담이며 본관은 상산이다. 집현전 부제학 상직의 6대손이며, 옥과 현감 범의 아들이다.

중종 경자년(1540년)에 출생하여 어릴 때부터 효성이 지극하고 총명하였다.

선조 경오년(1570년) 식년문과에 급제하여 성균관 학론을 시작으로 수찬, 응교, 집의, 청주 목사 등을

역임하고 임진왜란 때에는 보은에서 창의하여 600여 명의 의병을 규합하고, 충보군이라 이름 하여

상주의 적이 호서로 오는 길을 막았다. 벼슬길에 있을 때는 도리로 행하고 집 안에서는 효도와 우애와

화목으로 일생을 지냈으며『주서절요』,『근사록』,『소학』등을 깊이 연구하였고, 갑오년(1594년)에

졸하였다.

홍여하(洪汝何)
자는 백원, 호는 목재, 관은 부림이니 문광공 홍귀달의 5세손이요, 대사간 호의 아들로 1620년에 났다.

어릴 때부터 총명하여 우복 정경세가 말하기를 “이 아이는 반드시 큰 선비가 될 것이다”고 하였는데

효종 갑오년(1954년)에 등과하여 검열, 전적, 정언, 좌랑, 사간을 지냈다. 정언으로서 왕의 언동을 간하니 효종이 가납하였다. 그 뒤로 당로자들의 꺼림을 받아 고유 찰방에서 파직되었다 무술년(1658년)에

경성판관으로 부임하여 어진 정사를 폈으며, 을해년에 성학 치도의 요를 상소하고 병마사 권우의 무고로 황간에 유배되었다. 그 다음 해에 방면되어 고향으로 돌아와 15년을 후진을 양성하는 데에 전념하였다.

사서에 통하고 주서에 전심하여 식견을 따를 이가 없었다. 숙종이 병조정랑에 특제하였으나 병이 중하여 나아가지 않고 졸하니 나이 55세였다. 저서로『사서발범구역』『주역구역』『휘찬려사』『동사제강』등 많이 있다.

이구(李榘)
자는 대방, 호는 활재, 본관은 전주이다. 효령대군의 8세손이며 정랑 광흡의 아들이다.

광해 계축년(1613년)에 출생하여 어릴 때부터 『제자백가서』를 탐독하다 외조부 칠봉 황시간의 권유를

받고 성현의 학문을 탐구하게 되었다. 정주학과 퇴도학에 전념하여 과거를 버리고 산간에서 후진에게

이기의 진수를 논강하고 많은 저서를 남겼다. 갑오년(1654년)에 졸하니 42세였다.

이만부(李萬敷)
자는 중서, 호는 식산, 본관은 연안이다. 가은 심의 증손이요 박천옥의 아들이다.

현종 갑진년(1664년)에 출생하였다. 정주학을 탐구하고 혁혁한 집안이면서도 분화를 멀리하고 오직

성학에만 몰두하여 저술에 힘쓰면서 후진을 양성하였다. 남긴 저서는 지금까지 자손이 보관 전수하고

있다. 계축년(1733년)에 졸하였다.

권상일(權相一)
자는 태중, 호는 청대, 관은 안동이니 구학재 구의 증손이요, 증이판(贈吏判) 심(深)의 아들이다.

숙종 기미년(1679년)에 출생하여, 숙종 경인년(1710년)에 등제하고, 승문원 정자(正字)로부터

이의(吏議) 부제학, 대사헌을 역임하고 지중추에 이르고, 기사(耆社)에 입(入)하여 찬수 당상이 되어

국사를 수찬하였다. 영조가 어필 16자를 하사 격려하였다. 영조 정미년(1727년)에 만경현령이었을 때

다음 해에 무신(1728년)의 난이 일어났는데 미리 민정을 살펴 적변이 일어날 것을 알고 상부에 보고하고

성지를 수축하며 유비무환의 대비를 하였으므로 경내가 무사하였다.

고향에서는 퇴계 선생을 사법(師法)으로 하여 이기호발(理氣互發)을 논하고 경연에도 첨하였다.

저술로서 『근사록집해』 등 여러 권을 남겼으며, 영조 기묘년(1759년)에 졸하니 수가 80세였고,

시호는 희정(僖靖公)이다.

 

 

전사청(典祀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