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동 문화마을
덕동마을은 조선의 대유학자인 회재 이언적의 동생 농재 이언괄의
4대손인 이강이 경주 양동마을에서 50리 떨어진 이곳에 거처를 정하고
360여년간 대를 이어 살아온 여강이씨 집성촌이다.
농재 이언괄은 형인 회재 이언적이 관계에 나가면서 어머니 봉양을 위해
이곳에 눌러 앉아 자손 대대로 덕동마을을 문사의 마을로 만들었다.
덕동(德洞)은 덕있는 인물들이 많다는 의미로 불려진 지명이다.
삽연(淵)이라 부르기도 했는데 이는 용계정(龍溪亭)뒤의 연못에서 연유하며,
일명 덕협(德峽)이라고도 불리운 것은 지형에 의한 것이다.
마을 뒤로 침곡산이 둘러져 있고 앞으로는 자금산(紫金山)이 있으며
서편 벼슬재(官嶺)를 넘으면 죽장(竹長)의 가사리(佳士里) 일원으로 통한다.
이 마을은 천혜의 자연조건과 용계정 등 아름다운 건축물과 수려한 경관을
높이 평가 받아 1992년 문화부 지정 문화마을로, 2001년에는
환경친화마을로 지정받았다.
기북면에서 죽장면을 잇는 921번 도로 곁, 덕동문화마을 입구
송계(松契)숲, 아름드리 소나무가 울타리 처럼 마을을 보호하고 있다.
마을 앞을 흐르는 용계천
덕동마을 표지석, 문화부지정문화마을
포항 전통문화체험관
덕동마을의 폐교를 헐고 한옥으로 건축한 문화체험관이다.
볼거리느낌집(전시체험동)
배움나눔집(교육동)
둘레쉼터(숙소동)
덕동문화마을 안내도
덕동민속전시관
여강이씨 11대손 이동진(83세)관장님이 관리하고 계시며,
집안에서 대대로 내려오던 고서적을 기증하여
행정안전부로 부터 제4호 기록사랑마을로 지정되었다.
덕연구곡시 비
용계정 입구
용계정(龍溪亭)
조선 명종 1년(1546)에 세워진 건물로 임진왜란 당시 북평사를 지낸
농포 정문부 선생의 별장이다. 숙종 12년(1686)에 다시 크게 지었다.
정조(재위 1776∼1800) 이후에는 세덕사의 강당으로 사용되었으며,
고종 5년(1868)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의 화를 면하기 위해 밤새도록 담을 쌓아
세덕사만 철폐되었다고 한다. 앞면 5칸·옆면 2칸으로 팔작지붕으로 되어있다.
건물 앞쪽에는 기이하게 생긴 절벽이 있으며, 수백 년 된 은행나무,
향나무, 백일홍 등이 용계정을 둘러싸고 있어 볼거리를 제공한다.
용계정의 뒷면의 협문
용계정의 좌측면
용계정의 우측면
포사, 용계정의 관리실
세덕사지(世德祠址)
애은당 고택(愛隱堂 古宅)
북평사, 전주부윤을 지낸 바 있고 임진왜란 당시 많은 공을 세운
농포(農圃) 정문부(鄭文孚) 선생이 식솔들의 피난처로 사용하다가
임진왜란 후 고향인 진주로 이사하면서 그의 손서인 사의당(四宜堂) 이강(李壃)에게
재산 일체를 양여하였는데 1695년 3월 이강의 7남매 자녀 분가시에
4남 이덕소(李德邵)의 분가로 관리해 오다가 현재의 소유주인 이문희의
6대조 이재급(李在伋)이 매입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정문부는 임진왜란 때 의병장이 되어 회령의 반란을 진압하고
크게 등용되었으나, 초회왕(楚懷王)에 대해 지은 시로 이괄의 난에 연루되어
죽임을 당하였다. 그 후 신원되어 경성의 창렬사(彰烈祠) 등에 배향되었다.
애은당 고택이 위치한 지형은 거북형으로 건물배치를 거북형으로 축조하여
거북 앞발 위치에 각각 별당과 방앗간을 두었고 머리부분에 속하는
앞면에 잠실(蠶室)이 있었으며 꼬리 부분에 화장실이 있다.
정면 사랑채와 붙은 대문을 들어서면 5칸 곡자형(曲字型)의
안채가 자리하며 좌측에는 창고와 방이 딸린 부속사(고채)가
자리하며 전체적으로 ㅁ 자형을 이루고 있다.
여연당 고택(與然堂 古宅)
이 가옥은 조선 선조 때 북평사를 지내고 임진왜란 때 공을 세운
농포(農圃) 정문부(鄭文孚)가 식솔들의 피난처로 사용하던 집이다.
정문부 선생이 임진왜란 후 손서인 이강(李壃)에게 별옥(別屋) 일체를
양여할 때의 부속건물 중의 일부로서 이강의 둘째아들 이덕령(李德齡)에게
물려주고 현재에 이르고 있고 현 소유자인 이원돌(李源乭)은 이강의 9대손이다.
정면 4칸, 측면 6칸의 목조와가인 이 가옥은 ㅁ자형으로 배치되어 있으며,
조선 중기에 창건한 건물로 당시의 시대상을 잘 나타내주는 주택평면구성이다.
사우정 고택(四友亭 古宅)
사우정은 조선 선조 때 북평사를 지내고 임진왜란 때 공을 세운
농포(農圃) 정문부(鄭文孚)가 식솔들의 피난처로 사용하였던 집이다.
정문부 선생의 조부이신 정언각(鄭彦慤)이 청송부사로 재직 당시
지리에 밝은 청지기가 일러준 길지(吉地)로 “활란가거 천하지낙양
(活亂可居 天下之洛陽)”이라 불렀다고 전하며, 이로부터 땅을 점유하여
집을 건축한 것으로 추정한다. 당시 지명이 송을곡(松乙谷)이라 불렀는데
임진왜란 당시 왜병이 송(松)자가 든 지명에서는 패전한다는 설이 있어
이곳을 피난지로 삼았다고 전한다.
농포 정문부 선생의 손서인 이강(李壃)에게 양여하였고
이강은 3남 이덕삼(李德三)에게 다시 물려주었으며, 그 후 이헌순(李憲淳)이
그의 호(號)를 따서 사우정(四友亭)을 당호(堂號)로 정했다고 한다.
안채는 정면 5칸, 측면 4칸의 목조와가이고, 사랑채는 정면 7칸,
측면 1칸반이 목조와가로 맞배지붕이며 조선중기(1600년대) 상류계층의
생활상을 짐작케 해주는 고택이다. 그 후 100년 뒤에 사랑채를 건립했다.
오덕리 근대한옥
1947년 2월에 상량된 전통한옥과 근대한옥의 특징을 갖고 있어
20세기 중엽 사회변화에 따른 민가의 변화과정을 잘 보여주고 있는 가옥이다.
부재의 결구와 구조수법 등 일반적인 형태는 전통한옥의 특징을 따랐으나
안마당을 중심으로 집약된 배치형식, 제재소에서 규격 생산된 목재 사용,
전후퇴와 측퇴가 발달한 평면구성, 수장공간의 발달 등에서
근대한옥의 특징을 읽을 수 있다.
덕계서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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