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대구여행*문화탐방/의성군

안동김씨 종택 & 만취당(晩翠堂)

자즐보 2013. 5. 23. 15:46

 

 

 

안동김씨(상락) 종택

의성군 점곡면 사촌리 소재

 

사촌 안동김씨 종택은 송은공의 증손 사원이 1576년(선조 9) 60여칸을 창건하였다.

현손 이중(1664~1752)이 중수하면서 그 규모를 반으로 줄였으며, 1789년(정조 13)

만취당을 중수하면서 이중의 손자 종탁(1718~197)이 종택 내실을 함께 수리하였고,

1816년(순조 16)에는 규모를 다시 10여 칸으로 줄였다.
  
병신의병(1896)때 소실되어 5칸 반 겹집으로 중건하였는데, 6·25전쟁(1950)을 겪으면서

일부가 허물어져 보수가 어렵게 되자 1959년에 철거하고 정침 5칸 겹집과

서편에 곡자 2칸으로 고쳐 짓고, 사랑채 3칸 반겹의 곡자와 대문채 3칸을 신축하였다.

 

그후 문중에서는 종택의 옛 모습을 갖추고자 1980년대에 만취당과 종택 앞에 있던

개인 주택 2동을 매입 철거하고 주변 정비 작업을 진행해 왔다.
 

2002년 국책 사업으로 전통 문화를 이어가는 선비촌을 조성하고자

대대적으로 중수하고 고령기와를 이었으며 담장을 설치하였다.

만취당 남쪽 우물을 정비하고 담장 앞에는 잔디밭을 조성하였다.

   
 2007년 봄 문중 예산으로 종택 대문채에 3칸 반겹, 동편에 곡자 2칸,

정침 동편에 1칸을 달아 ㅁ자형으로 30여 칸을 완성하여

‘도평의공고려(都評議公古廬) 편액을 걸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평범한 3칸 대문채

 

 

대문과 안채로 들어가는 중문이 일직선으로 놓여 있다.

 

 

동편 사랑채와 서편 사랑채 사이에 안채로 출입하는 중문을 두었다.

동편사랑채 기둥에는 "안동김씨대동보도평의공파강소"라는 간판이 걸려 있다.

 

 

 

최근에 새로 복원한 동편 사랑채

 

 

도평의공고려(都評議公古廬) 편액

 

 

안동김씨 도평의공파

선안동김씨(先安東金氏)는 시조 김숙승(金叔承)의 6세손 충렬공(忠烈公) 김방경(金方慶, 1212~1300)

중시조로 하는 가문으로 득성조 이래 계속하여 안동에 살면서 안동을 본관으로 하는 두 김씨 중의 하나로

고려 개국공신 김선평(金宣平)을 시조로 하는 안동김씨(安東金氏)와 구별되며 상락김씨(上洛金氏)로도 불리며

안동 풍산에 세거해 왔다.

김숙승신라 경순왕의 손자로서 대안군 김은열(金殷說)의 둘째 아들이며 고려 때 평장사(平章事)를 지냈다.

김방경은 병부상서를 지낸 김효인(金孝印)의 아들로서 현재의 안동시 풍산읍 회곡리에 살았으며 문과에 급제하여 고려 원종 때 삼별초의 난과 왜구를 토평한 명장으로 상락군(上洛郡: 상락은 현 경북 상주의 옛지명)에 봉해졌다. 김방경의 후손들이 김숙승을 시조로 김방경을 중시조로 하고 안동을 본관으로 하여 세거하였다.

김방경의 장자 김선(金愃)은 전법판서를 지냈고, 차자 김흔(金忻, 1251~1309)은 도첨의사사를 거쳐 삼중대광에 올라서 아버지를 이어 상락군에 습봉되었다. 셋째 아들 김순(金恂, 1258~1321)은 1279년(충열왕 5)에 문과에

급제하여 봉익대부 밀직사부사 문한학사를 끝으로 은퇴한 후 중대광 상락군에 봉해져서 아버지의 작위와 식읍을 이어받았고 문영(文英)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김순의 아들 김영돈(金永旽)은 좌정승에 올랐고, 영돈의 동생 김영후(金永煦)는 우정승을 지내고

상락후(上洛侯)에 봉해졌다. 김영후의 손자 낙포(洛圃) 김사형(金士衡, 1333~1407)은 좌정승과 우정승을

역임하고 상락부원군(上洛府院君)이 되었으며 시호는 익원(翼元)이다. 김사형의 아들 김돈(金墩)은 문과에

올라 이조판서를 지냈고, 김돈의 아우 김승(金陞)은 밀직사사를 지냈다.

단종복위 거사를 도모하던 동료를 고변하여 사육신의 한을 남기고 뒤에 정승에 까지 오른 쌍곡(雙谷) 

김질(金礩, 1422~1478)김승의 손자이다. 또 김방경의 장자 김선의 손자 김묘(金昴)의 아들 김구용(金九容, 1338~1384), 김제안(金齊顔), 김구덕(金九德)은 모두 과거를 거쳐 각각 평장사, 추밀원사, 돈녕부사에

오르는 등 상락김씨는 여말선초에도 이름 있는 이들이 많았다.

상락김씨김방경의 현손 때에 여러 계파로 갈라지는데 안동 일원에는 도평의공파(都評議公派)와

익원공파(翼元公派)가 많이 살고 있다. 김묘의 동생 김면(金冕)의 손자 김자첨(金子膽)

의성 사촌으로 이거한 도평의공파는 송은(松隱) 김광수(金光粹), 만취당(晩翠堂) 김사원(金士元),

천사(川沙) 김종덕(金宗德) 등 명현을 배출하였다. (자료출처:디지털 안동문화대전)

 

 

 

서편 사랑채

 

 

 

중문을 통해서 안채 엿보기...

 

 

 

 

 

 

 

 

종택과 만취당 사이 텃밭 ㅎㅎ

 

 

 

만취당(晩翠堂)

만취당은 2014년 6월 5일 보물 제1825호로 승격 지정되었다.

 

이 건물은 조선시대 퇴계 이황의 제자이며 부호군을 지낸 김사원(金士元) 선생이

1582년(선조 15)부터 3년간에 걸쳐 완성하였으며, 자신의 호를 따서 만취당이라 하였다.
그 후 1711년(숙종 32)부분 보수가 있었고, 1727년(영조 3) 동쪽에 2칸 방 복재(復齋)를

1764년(영조 40)에는 서쪽에 1칸 온돌방 서소익실(西小翼室)을 증축하여

현재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전체적인 형태는 'T' 자형이고 우물마루와 온돌방이 꾸며져 있으며,

임진왜란 이전에 건립 된 그리 흔치않는 목조건물이다. 편액의 글씨는

김사원과 동문인 명필가 석봉(石峯) 한호(韓濩)가 썼다.

 

 

 

 

 

날아갈 듯한 겹처마 팔작지붕이 모진 풍파에 내려 앉을까 우려되어

긴 장대로 받쳐놓았고, 전체적으로 보수가 필요해 보인다.

 

 

목조건물은 사람이 들락거리며 인고의 때가 베어야 반들거리며 윤이나고

더 오래 견디어 간다. 사용하지 않고 전시용처럼 서 있기만 하면

오히려 빨리 낡고 수명도 줄어든다.  

 

 

동편 방 "복재(復齋)"

 

 

 

晩翠堂(만취당) 현판

당대의 명필 한석봉 선생의 글씨를 보는것 만으로도

찾아 온 보람을 느끼며, 눈으로 한획 한획 따라 써 본다...

 

 

 

천정 한 곳이 단청이 되어 있는데, 그 연유가 궁금 ???

 

 

만취당 천정아래에는 가마틀이 보관되어 있는데, 서애 유성룡의 모친이자

송은 김광수 선생의 다섯째 따님인 안동김씨 부인이 타던 것이었다고 한다.

당시 부인은 겸암에 이어 둘째 아기인 서애를 임신하여 친정에 나들이를 와 있을 때 

아버지 송은 선생이 천기를 짚어보니 항차 이 마을에서 정승이 태어날 조짐이라

마을 전체에 임산부를 조사해 본 결과 친정 온 당신의 딸인지라,

그 당시 조선 중엽인 중종 임금시대만 해도 문중 간에 친손과 외손의 경계가 뚜렷하여

시댁인 안동 하회마을로 되돌려 보내는데 가마가 마을 입구에 조성해 놓은

방풍림인 서림(세칭 가로숲)에서 잠시 교꾼이 숨을 돌리는 차 산기가 있어

할 수없이 친정으로 되돌아 와서 해산을 하였으니 그 아기가 자라

 임진왜란 때 이순신 장군과 권율 장군을 중용하고

징비록을 기록으로 남기는 등 7년 전쟁을 승리로 이끈

명재상 서애 유성룡 대감이었다고 한다.

 

 

 

만취당의 북쪽에서 본 모습이다. 가운데 2칸 대청을 두고,

동편에는 복재(復齋),  서편에 서소익실(西小翼室)을 증축하여 'T'형 건물이 되었다.

 

 

서편 방 서소익실(西小翼室)

 

 

밖으로 출입하는 협문

 

 

 

 

병신병란백주년 비(丙申兵亂百周年)

1895년 을미사변으로 명성황후가 일본의 낭인들에게 시해당하자

그 이듬해인 1896년 병신년, 이 곳에서도 의병이 일어났는데 왜병들이 이를 문제 삼아

마을을 불살랐다. 이 후 100년이 흐른 뒤 이 절절한 사연을 비에 세겨 후대에 전하는 것이다.

 

 

오랜 세월 만취당과 함께 이 곳을 지켜 온 우물

 

 

 

만취당 주변의 골목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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