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주변씨 간재종택 및 간재정
(原州邊氏簡齋宗宅 및 簡齋亭)
조선 중기 유학자인 간재(簡齋) 변중일(邊中一, 1575~1660) 후손의 살림집과
변중일이 강학하던 정자이다. 변중일의 본관은 원주(原州), 자는 가순(可純), 호는 간재이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때 왜적으로부터 조모와 모친을 구하여 효자로 이름이 높았고,
창령 화왕산(火旺山)의 곽재우(郭再祐) 의병진에 참여하여 많은 공을 세우기도 하였다.
후일 변중일의 효행과 의병활동에 대한 포상이 이루어져 건원릉참봉(健元陵參奉)에 임명되었고,
정려도 내려졌다. 금고서원(琴皐書院)에 배향되었으며 저서로는『간재집(簡齋集)』(2권 1책)이 있다.
간재 종택은 변중일의 아호인 간재를 따 이름붙였으며, 간재정은 변중일이 만년에 지은 정자로
임진왜란의 울분을 달래고 학문에 정진하기 위하여 건립하였다.
간재 종택은 1796년(정조 20)에 지은 것이라 하나 1949년에 중수되었다는
기록 이외에는 건축 연대를 확인할 수 없다. 간재정은 변중일이 학문을
연구하기 위하여 건립하였다는 것으로 보아 17세기 초반이나 중반경에
건립되었던 것으로 여겨지나, 현재의 건물은 1874년(고종 11)
변중일의 8세손인 변석찬(邊錫瓚)·변석하(邊錫夏) 등이 중건한 것이다.
종택 진입로에 세워져 있는 홍살문
대문채(위:보수 전, 아래:보수 후)
종택의 사랑채
사랑채는 막돌 허튼층쌓기 기단 위에 세워진 건물로 난간을 두른
누마루와 뒷면에 반 칸의 퇴를 내어 벽장으로 사용하는 2칸통의 사랑방,
정면과 측면이 각각 1칸 반인 사랑마루 등으로 구성된다.
무민당(无憫堂)
사랑채 전면 좌측에 있는 무민당은 별당으로 팔작지붕과 홑처마인 정면 3칸,
측면 2칸 규모이며, 좌측 2칸은 온돌방이고 우측 1칸은 마루방으로 구성되어 있다.
안채로 출입하는 중문
안채, 후손들이 살고 있어 대청만 찍~
안채는 정면 3칸, 측면 2칸의 대청을 중심으로 좌측에는 뒷면에 반 칸 퇴를 내어
2칸 반통을 사용하는 안방, 우측에 2칸통인 안사랑방이 있다. 그리고 안방과 면하고 있는
좌익사는 부엌 1칸, 고방 1칸으로 배치되었으며 고방과 면하고 있는 중문간채는
뒷방 1칸과 곡식을 보관하는 뒤주인 반 칸의 고방으로 이루어져 있다. 또 안사랑방과
면하는 우익사는 부엌 1칸과 사랑채의 사랑마루와 면하는 1칸의 책방으로 되어 있다.
종택 뒤 사당과 간재정으로 나가는 협문
위패를 모신 사당
간재정 앞에서 본 종택전경
간재정(簡齋亭)
정자는 남향으로 종택을 바라보고 있으며 누각식(樓閣式)의 정면 3칸,
측면 1.5칸의 크기이다. 지붕은 맞배지붕이며 홑처마로 되어 있다.
간재정의 전면 반 칸에는 난간을 두른 누마루로 설치하였다.
누마루 전면 처마 밑에는 ‘간재’라는 현판이 게첨되어 있다.
누마루를 가운데 두고 좌우에 1칸의 온돌방이 있다.
정자 기단은 막돌 허튼층으로 쌓았으며 높이는 80㎝ 정도로 다소 높은 편이다.
기단 위에 자연석을 원형으로 다듬은 주초를 놓고 둥근기둥을 세웠다.
정충효각(旌忠孝閣)
조선 숙종12년(1686)에 왕이 그의 충성과 효행을 기려 충효의 정려를 하사하고
정충효각을 세우고 헌종 13년 (1847)에 중수하였다.
정면. 측면 1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모서리에 둥근 기둥을 세우고 사면에 홍살을 둘렀다.
통정대부첨지중구부사충효변중일지려
通政大夫僉知中구府事忠孝邊中一之閭
변중일은 안동부 금계촌(현, 안동시 서후면 금계리)에서 태어났다.
18세 때인 임진왜란 당시 마을 사람들이 모두 숨었으나 할머니 이씨가 더위를 먹어
설사가 매우 심한 까닭에 피할 수 없었는데 변중일은 할머니를 모시고 곁에서 떠나지 않았다.
하루는 포 소리가 요란한 끝에 왜적이 몰려오니 집안사람들이 모두 놀라고 당황해 했다.
변중일은 먼저 어머니를 업어다 빽빽한 삼밭 가운데 모시고 난 뒤 돌아와 할머니를 업고
달아나려고 했는데 천식으로 움직일 수가 없었다. 이에 곁에 앉아 눈물을 흘리며 하늘에 빌 뿐이었다.
잠시 후 한 왜적이 돌입하여 때리며 끌고 가려 하다가 할머니가 땅에 엎어지자 칼로 베려 하였다.
이에 변중일은 “차라리 나를 죽이고 팔십 되신 조모를 살려 달라.” 하고 간청하자
여러 왜적들이 급히 달려와서 부축하여 일으킨 뒤 얼굴의 흙을 털어 주며 들어가 시병하게 하였다.
왜적들이 감탄해 마지않으면서 “이만한 효성은 참으로 처음 보는 일이로다.” 하였다.
이어 서로 돌아보며 의논하기를 “우리 군대의 발이 닿으면 자칫 해를 당할 염려가 있다.” 말하고는
깃발 하나와 칼 하나를 변중일에게 주면서 신표로 삼으라고 하였다. 마침내 왜적이 집기 하나
손대지 않고 조용히 물러갔으며, 어머니도 온전할 수 있었고 할머니의 병도 나았다.
당시 한양을 지키지 못하여 온 나라가 무너져 내릴 지경이었는데 학봉 김성일이
영남을 안찰하면서 어느 지역을 초유(招諭)할 때 변중일은 분연히 말하기를 “국가의 위급함이
이와 같은데 비록 초야에 묻힌 미거한 몸이지만 어찌 힘을 다하여 국가에 충성하지 않겠는가?”
말하고는 쌀 백섬을 상주로 보내어 군수품으로 쓰게 하였다.
그런 뒤에 형 변희일(邊喜一)과 더불어 진양으로 달려갔으나 이미 김성일이 병사했음을 알고는
몸을 맡길 곳이 사라졌음을 통분해 하다가 망우당 곽재우 장군의 진중으로 급히 가서
군중의 기무에 투신하였다. 1597년(선조 30)에 왜적이 다시 창궐함을 보고 다시 화왕산성으로 가서
다른 창의한 이들과 힘을 합하여 적을 물리치기로 맹약하였는데 이때의 사정을 기록한
「화왕동맹록」이 전한다. 난이 안정된 뒤에 여러 친척들이 변중일의 효행을 열거하여
관청에 알리고자 하였는데 내세울 일이 아니라 하여 극력 만류하였다.
선대에 사패(賜牌)로 받은 노비 30구가 가락 땅(김해)에서 살고 있었는데,
임금이 주신것을 버릴 수 없다 하여 변중일이 가서 그들을 추쇄하려다가 도리어 뜻밖의 무고를 입어
경옥(京獄)에 감금되었다. 1623년 인조반정이 일어난 후, 특명으로 사면되었으며
노비 100구를 하사받았다. 서울에 머물 때에 형방 색리 최옥의 집에 머물고 있었는데,
일찍 과부가 된 최옥의 딸이 어느 날 밤 변중일의 침소로 찾아든 일이 있었다.
변중일은 남녀의 분별을 들어 타이르고 거절한 뒤에 곧 다른 집으로 처소를 옮겼다.
만년에는 금계의 동쪽 언덕에 집을 짓고 ‘간재(簡齋)’라고 편액한 뒤 그것을 호로 삼았다.
매일 아침 일찍 일어나 몸을 정결히 하고 사당에 절한 뒤에 물러나서는 방안에 앉아
종일토록 절제하며 서책을 가까이하였으며, 때로는 거문고를 옆에 끼고 경치 좋은 곳을 찾아
조용히 시를 짓고 수창하기도 하였다.
뒤에 행의(行義)로 천거되어 건원릉참봉에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인조가 죽자 소식(素食)을 하고 복상하였으며, 인산(因山: 왕족의 상) 2년째에 북향한 채로
땅에 엎드려 슬피 울었다. 나이 팔십이 넘어 통정의 품계에 오른 뒤
1660년(현종 1) 10월 20일 정침에서 향년 86세로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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