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옥대(鳴玉臺),창암정사(蒼巖精舍)
퇴계 이황(1501~1570)은 이수령, 권민의, 강한과 함께
봉정사에서 3개월 정도 독서를 했다.
이때 봉정사 입구 계곡인 이곳에 와서 함께 놀았다.
그 후 50년 뒤인 1566년 퇴계는 병을 핑계로
관직을 사양하고 다시 이곳에 머물렀다.
이때 절구 두 수의 시(詩)를 남기고,
낙수대(落水臺)라 하던 이름을 명옥대라 고쳐 불렀다.
1664년 퇴계의 자취가 남아 있는 이곳을 김시침이 앞장서서
정사(精舍)를 지을 것을 발의하였고, 실제의 주관은 봉정사의 승려
보명(普明)이 맡았다. 이 일을 널리 알리고 협조를 호소한
「봉정사명옥대창건시통문(鳳停寺鳴玉臺刱建時通文)」통문이 남아있다.
건물은 3년 뒤인 1667년에 완공되었고 상량문은 김광원이 썼으며,
김규는 계곡 위를 건너 동쪽으로 가는 수각(水閣)을 세우기를 도모하였다.
당시에 세워진 건물의 이름은 퇴계의 시에 나오는 ‘창암’이라는
두 글자를 따 창암정사(蒼巖精舍)라 하였다. 그 기문(記文)은 중론을 모아
당시 신망이 높은 미수 허목(許穆)에게 부탁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여허미수목서구명옥대기(與許眉叟穆書求鳴玉臺記)」가 그것이다.
1667년 처음 창암정사로 세워 질 때의 형태는 방 1칸, 누각 2칸의
건물이었다고 한다. 또 이 건물 뒤에 3칸의 승사(僧舍)를 지어
승려들이 상주하며 창암정사를 관리했다는 기록이 있으나
지금은 흔적조차 찾을 수 없다.
현재의 건물은 자연석의 초석 위에 원형 기둥을 세운 정면 2칸, 측면 2칸에
사면으로 계자난간을 둘렀고 사면을 모두 개방하여 주변의 경관을
두루 볼 수 있게 한 것은 당시의 건물과는 다른 것을 알 수 있다.
현재의 건물은 1920년 고쳐지었다고 한다.
내진주(內陳柱)와 기둥 위에 남아 있는 흔적을 보면, 방이었던 뒤쪽 2칸을
지금의 형태로 바꾼 것으로 보인다. 현재의 안내판에는 1665년으로 되어 있으나
기록상으로는 1664년에 발의해서 시작했고, 완공은 1667년으로 되어 있다.
현재의 건물은 1920년 경 개축한 것이나 본래의 건물은 3칸으로
되었다고 하므로 개축 당시의 건물은 완전히 없어진 것으로 보인다.
명옥대가 퇴계의 유적지로서 의미를 가지는 것은
그가 남긴 절구 두 수다. 퇴계의 시는 다음과 같다.
이곳에서 노닌 지 오십 년, / 此地經遊五十年,
젊었을 적 봄날에는 온갖 꽃 앞에서 취했었지. / 韶顔春醉百花前.
함께 한 사람들 지금은 어디 있는가? / 只今攜手人何處,
푸른 바위, 맑은 폭포는 예전 그대로인데. / 依舊蒼巖白水懸.
맑은 물, 푸른 바위 경치는 더욱 기이한데, / 白水蒼巖境益奇,
완상하러 오는 사람 없어 계곡과 숲은 슬퍼하네. / 無人來賞澗林悲.
훗날 호사가가 묻는다면 / 他年好事如相問,
퇴계 늙은이 앉아 시 읊던 때라 대답해주오. / 爲報溪翁坐詠時.
앞의 절구는 16세 때 이곳에서 함께 놀던 동료가 50년 뒤에는
고인이 된 그들을 그리워하는 내용이고, 뒤의 시는 아름다움이란
결국 사람이 함께 했을 때 빛을 발하는 것이라는 사실과
퇴계 자신이 이곳에 자취를 남기는 취지는 ‘시를 썼다’는 사실을 알리는 것이다.
요컨대 자연이 아름답다는 것은 사람과 함께 하는 것,
즉 사람이 자연에 의미를 투여하고 자연을 노래하는데 있음을
알리는 것이다. 우리가 명옥대에서 배울 수 있는 것은
거창하게 아름다운 경관이 아니더라도 퇴계처럼 가까이 있는
생활 속의 자연에서 거기에 침잠하여 자연을 배우고
자연을 노래할 줄 알아야 한다는 점일 것이다.
또 퇴계의 족후손인 이정백은 퇴계의 이 원운을 차운하여
다음과 같은 절구 두 수를 지었다.
신선놀음 당일에 일 기이함 전하니, / 仙遊當日事傳奇
끼친 자취 도리어 후세를 슬프게 하네. / 遺跡還今來世悲
산꽃 다 떨어지고 봄비 내린 후에, / 落盡山花春雨後
우는 새는 하필 달 밝은 때인가? / 啼禽何事月明時
절 거듭 찾아오기 이십 년, / 簫寺重尋二十年
흩어지는 꽃 어지러이 말발굽 앞에 떨어지네. / 飛花撩落馬蹄前
구름 창은 적적하고 향기 연기 끊어지니, / 雲窓寂寂香烟絶
소나무 사이에 앉아 높이 뜬 해 사랑하노라. / 坐愛松關白日懸
명옥대(鳴玉臺), 창암정사(蒼巖精舍) 현판
명옥대:옛 이름은 ‘낙수대’였으나 육사형의 시
(흩어지는 샘물이 우는 옥돌을 씻어주네/飛泉漱鳴玉)에 따라
퇴계선생이 ‘명옥대’로 바꿔 불렀다고 한다.
청암정사(초서):1667년 완공 당시 퇴계의 시에 나오는 ‘창암’이라는
두 글자를 따서 창암정사(蒼巖精舍)라 하였다.
명옥대사적비
바위에 암각한 "鳴玉臺", 퇴계선생의 친필이다.
작은 글씨는 ‘辛乃沃, 李宰, 文緯世, 尹剛中, 欽中, 端中, 隆慶元年夏, 同遊, 開林築臺, 題詩,
以追退溪先生之志(신내옥, 이재, 문위세, 윤강중, 윤흠중, 윤단중 등이 융경원년(1567) 여름에
함께 유람하면서 숲을 열고 대를 쌓고 시를 지어 퇴계 선생의 뜻을 추모한다)’는 뜻이다.
늦가을의 명옥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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