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성역 국립 4.19묘지
국립4·19민주묘지(國立四一九民主墓地)는 서울 강북구 수유동에 있는
4·19 혁명 희생자를 위한 국립묘지이다.
1961년 제2공화국 정부가 국무회의에서 1960년 발생한 4·19혁명 기념
공원묘지 조성에 대해 의결하였다. 그해 5·16 군사정변이 발생하면서
재건국민운동본부가 주도하여 1962년 기공식을 가졌다.
준공일은 1963년 9월 20일이며 이날 기념탑 제막식을 가졌다.
묘지의 부지는 처음 조성 당시에는 약 3천평이었으나 1990년대에 김영삼 정부가
성역화 작업을 추진하여 조형물을 추가하고 약 4만평으로 확장했다.
1995년에는 국가보훈처로 관리가 이전되었다.
목조 건물인 유영봉안소와 묘지, 4·19혁명기념관, 사월학생혁명기념탑,
상징문과 그밖의 상징조형물로 이루어져 있다.
4.19혁명
1960년4월19일 민주주의 혁명인 4·19혁명이 일어났다.
4·19혁명의 직접적인 원인은 자유당 정권의 3·15부정선거였으나,
근본적인 원인은 이승만 정권의 독재와 탄압이었다.
4월19일 약 3만명의 대학생과 고등학생들이 거리로 쏟아져나왔고,
수천명이 경무대로 몰려들었다. 경찰이 시위대를 향해 발포했고,
학생들의 시위는 폭동으로 변했다. 부산·대구·광주·인천·목포·청주 등과 같은
주요 도시에서 수천명의 학생들이 가세했다. 경무대(지금의 청와대) 앞에서의
경찰의 발포등으로 당일 183명의 사망자가 발생하였고,
1,000여 명 이상의 부상자가 발생했다.
전국의 주요도시에 계엄령이 선포되었고, 육군참모총장이었던 송요찬 중장이
서울지구 계엄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그러나 4월19일 이후 일반시민·교수 등이
가담하면서 시위가 걷잡을 수 없게 되자, 4월23일 장면 부통령이 사임하고
민주화를 위해 노력할 것을 선언하였다. 4월25일에 묵묵히 지켜보던
대학 교수들까지 시위를 함으로써, 이승만의 제1공화국 정부는 무너질 위기를 맞았다.
양주로 피신했던 이기붕은 4월25일에 몰래 경무대로 들어왔다.
당시 그의 장남 이강석 소위는 이승만의 양자로 들어가 있었는데,
4월 26일 새벽 0시경에 아버지 이기붕, 어머니 박마리아, 남동생 이강욱을
총으로 쏴 죽이고 자신도 자살했다.
4월 26일 오후 1시에 이승만은 라디오 연설을 통해,
대통령 자리에서 하야하겠다고 발표했으며,
이에 자유당도 해체하겠다고 발표했다.
정권은 과도정부의 수반인 허정에게 위임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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