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국여행 * 문화탐방/서울♡인천

서울 경복궁(慶福宮) 2

자즐보 2011. 3. 28. 18:32

 

 

 

자경전(慈慶殿 보물 제809호)

 

경복궁 안에 남아 있는 유일한 침전건물. 1867년 자미당(紫薇堂) 터에 조대비(趙大妃)를 위해

건립되었는데, 불타버려 1888년(고종 25) 중건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앞면 10칸, 옆면 4칸의 장방형 평면의 동쪽 정면에 앞면 1칸, 옆면 2칸의 청연루와

앞면 6칸, 옆면 2칸의 협경당, 그리고 서쪽 뒤쪽에 앞면 2칸, 옆면 6칸의 방과 대청이

부속되어 있어 전체적으로 'ㄴ'자형이다. 장대석으로 바른층쌓기를 한 높은 기단 위에

초석을 놓고 방주(方柱)를 세워 기둥 윗몸은 창방으로 결구했다. 이익공(二翼工)인데,

주간(柱間)에 운공(雲工)을 3가닥씩 부가해 화려하면서도 번잡한 느낌을 준다.

앞면의 중앙 3칸은 툇마루로 개방하고 나머지는 띠살창호를 달았으며, 겹처마에 팔작지붕이다.

전각을 둘러싼 행각과 담장에 길상·장수·벽사·초복의 무늬들이 장식되어 있는데

매우 다양하며 아름답다.

 

자경전으로 들어가는 만세문

 

자경전의 아름다운 모습

 

 

자경전을 지키는 해태상 

 

자경전 지붕위의 잡상들... 

 

자경전 청연루 

 

자경전의 옆문

 

자경전의 담장 외벽

 

자경전의 담장 내벽 

 

자경전의 서쪽으로 이어진 담장, 동궁으로 이어진다.

 

 

자경전 의 십장생굴뚝(보물 제 810호)

굴뚝은 네모 형태로, 가운데는 동식물 무늬인 십장생을 새겨 넣었다.

십장생 무늬는 가장 한국적인 무늬로 알려졌는데, 이것은 조대비의 만수무강을 기원하여

제작한 것으로 보고 있다. 굴뚝은 벽돌을 쌓아 만들었고 그 위에 기와지붕을 얹었으며

지붕 위에는 연기를 빠지게 하는 시설을 해 놓았다.

굴뚝이면서 장식적인 기능을 충실히 하고 그 조형미 역시 세련되어 조선시대 궁궐에 있는

굴뚝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작품으로 평가 받고 있다.

 

밖에서 본 자경전 

 

 

동궁(東宮)영역

동궁은 왕세자와 왕세자빈의 생활공간이며, 왕세자의 교육이 이루어지던 곳이다.

동궁은 세자궁이라 불리기도 하였으며 자선당(資善堂)과 비현각(丕顯閣)이 주 전각이고,

세자의 교육을 담당하는 세자시강원(춘방)과 경호 임무를 수행하던 세자익위사(계방)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경복궁 창건 시에는 궁내에 동궁이 마련되지 않았으며,

세종대(1427년)에 와서 창건되었다. 자선당에서는 문종이 세자시절 단종을 낳기도 하였으며,

고종 때 경복궁 중건 후에는 순종이 거처를 하였다.
현재의 동궁은 1999년 자선당과 비현각 영역만 복원이 되었다.

동궁의 북쪽에는 수라간인 내·외 소주방이 있었다.

 

중광문(重光門)

동궁인 자선당으로 들어 가는 첫번째 문이다.

 

 

진화문(震化門)

중광문을 지나 자선당으로 들어 가는 두번째 문이다.

 

 

자선당(資善堂)

자선당은 동궁(東宮) 건물의 일부로서 세자가 거처하면서 왕위에 오르기 전에 공부하던 곳이다.

북궐도(北闕圖)에 의하면 동궁은 세자가 백관으로부터 조회를 받던 정당(正堂)인 계조당(繼照堂), 세자와 세자빈의 거처로 쓰인 내당(內堂)인 자선당 비현각, 세자가 스승을 모시고 공부를 하던

춘방, 세자를 호위하는 군사가 머물던 계방(桂坊) 등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동궁의 건물들은 일제 강점기에 모두 파괴되었고, 1999년에 자선당과 비현각만 복원되었다.

자선당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긴 집채인 행각은 세자의 시중을 드는 상궁과 나인들이 거처하던

곳으로, 방과 큰 마루, 부엌, 문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자선당을 둘러 싸고 있는 전각들... 

 

 근정전에서 동궁으로 출입하는 문

 

왼쪽문은 동궁으로 바로 들어가고, 오른쪽 문은 동궁 바깥쪽으로 가는 문이다. 

 

밖에서 본 동궁 모습

 

 

이모문(貽謨門)

세자가 신하들과 나랏일을 논하는 비현각으로 들어 가는 문이다.

 

 

비현각(丕顯閣)

비현각은 동궁(東宮) 건물의 일부로서 세자가 신하들과 나랏일을 의논하던 곳이다.
원래 궁궐 내전 건물은 집채의 중심부 둘레에 기둥을 세워 지은 툇간(-間)을 설치하여

건물의 바깥쪽 둘레인 외진(外陣)과 중심부인 내진(內陣)의 이중 구조로 구성하는 것이 통례이나

이 건물은 내 외진의 구분이 없어 당시 궁궐 건물로서는 드문 예에 속한다.
임진왜란 때 소실된 것을 고종 4년(1867)에 중건하였고

이곳에서 순종이 마지막으로 왕자 시절을 보냈다.
현재의 건물은 일제 강점기에 파괴된 것을 1999년에 복원한 것이다. 

 

 

 

 경복궁 풍기대(風旗臺)

 

 

 

 

 

 

함화당 & 집경당

함화당과 집경당은 현재는 없어진 후궁의 침전인 흥복전의 부속건물이다.  

 

 

집경당(緝敬堂)

집경당은 그동안 고종이 각국 공사를 친견했다는 ‘일성록(日省錄)’의 기록에 따라 

내외 신료(臣僚)를 접견하던 장소로 알려졌다. 하지만 집경당은 2121질,2만 5203본에 이르는

서책과 서화를 수장하고 있었고, 고종이 신료들과 ‘동사강목(東史綱目)’을 토론하는 등

강학의 장소로 쓰여진 종합 궁중도서관이었다는 연구도 있다.

 

집경당과 함화당을 연결해 주는 내부 복도각이다.

 

함화당(咸和堂) 

함화당은 집경당의 서쪽에 있으며 서로 내부에서 왕래할 수 있도록 복도각으로 연결되어 있다.

규모는 17칸이고 2칸의 내루가 있는 오량가의 홑처마 팔작기와지붕이다.

 

오른쪽 담장에 보이는 문이 영지문(迎祉門)이며

경복궁의 장독대인 장고와 태원전으로 이어진다.

 

함화당 좌측으로 복도각이 설치되어 집경당으로 연결되어 있다.

담장에 보이는 문은 계명문이다.

 

함화당의 후원

왼쪽 담장에 난 문이 향원정으로 나가는 창무문이며,

가운데 문은 집경당 후원으로 가는 영춘문니다.

 

 

 

향원정 & 건청궁 

 

향원정(香遠亭)

경복궁 안에 있는 2층의 정자. 고종이 건청궁(乾淸宮 )에 기거하던 1867년

경회루 서북쪽에 연못을 파고 그 중앙에 지은 것이다. 건청궁과 향원정 사이에 다리를 놓아

취향교(醉香橋)라 했는데, 이 다리는 6·25전쟁 때 파괴되고 현재의 다리는 1953년

남쪽에 새로 놓은 것이다. 정자는 정육각형으로 장대석으로 된 낮은 기단 위에 육각형의

초석을 놓고 그 위에 1·2층을 관통하는 육각기둥을 세웠다. 1층에는 평난간을,

2층에는 계자난간을 두른 툇마루가 있다. 겹처마이며, 추녀마루들이 모이는

지붕의 중앙에 절병통(節甁桶)을 얹어 치장했다

 

 

 

우리나라 최초의 전기발상지...

 

열상진원 샘

 

 

 

건청궁(乾淸宮)

고종 10년(1873)에 고종이 정치가로서 스스로 서려는 의지를 보여주기 위하여 건립한 건물이다.

1887년 미국 에디슨 전기회사에서 발전기를 설치하여 우리나라 최초의 전등이 가설된

건물이며, 1895년 을미사변 때 일본 낭인이 명성왕후를 시해한 역사의 현장이다.

1909년 일본인들이 철거하고 조선총독부 미술관을 지었으며 ,1998년 철거하고

2007년 10월 복원된 건청궁의 현 모습을 일반에 공개하고 있다.

 

건청궁은 궁궐의 건축양식이 아닌 일반 사대부의 살림집을 응용하여

사랑채(장안당), 안채(곤녕합), 부속건물, 행각등으로 구성되었으며,

양반 가옥의 상한선인 99칸의 2.5배나 되는 250칸으로 건축되었다.

 

 

건청궁의 솟을대문채, 일반 사대부집과 달라보이지 않는다.

 

 

초양문(初陽門)

건청궁의 솟을대문을 들어서면 마당이 있고 서편으로 초양문이 있다.

초양문을 들어 서면 사랑채인 장안당이다.

 

 

장안당(長安堂)

고종이 집무를 보던 편전과 침전이다.

 

고종이 쓴 장안당 현판

오른쪽 상단에 임금의 글씨를 뜻하는‘御筆(어필)’이 전서로 새겨져 있고

  ‘주연지보’라는 고종의 낙관이 왼쪽 아래에 찍혀있다.

 

 

장안당의 가운데 3칸의 대청마루는 고종의 집무실로

용상과 국왕을 상징하는 일월오악도가 걸려있다.

 

 

장안당의 서쪽부분은 누각으로 꾸며져 있고

추수부용루(秋水芙蓉樓) 라는 현판이 붙어 있다...

 

 

고종의 처소인 장안당과 명성왕후의 처소인 곤녕합을 연결하는 복도각

 

 

 곤녕합(坤寧閤)

명성왕후의 거처로 이 곳 어디에선가 일본 낭인들에게 시해를 당하셨을게다.

 

곤녕합과 이어진 서편행각

 

곤녕합의 동편 끝 "옥호루(玉壺樓)"

 

옥호루 측면에는 "사시향루"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사시향루에서 북쪽으로 이어진 "정시합(正始閤), 명성왕후의 침방이다. 

 

 

 

 

 

 

 

집옥재(集玉齋) 일원

 

 

 

팔우정,집옥재,협길당 

1873년(고종 10) 건청궁을 지을 당시 함께 지어진 중국의 건축양식을 닮은 건물이다.

고종의 서재이면서 때론 외국사신을 접견하는 장소로 쓰여 졌다고 전해온다.

집옥재는 지붕의 모양이 궁궐의 다른 건물과 색다르게 맞배지붕과 옆면의 벽돌형식이 특이하다.

단층 같이 보이지만 내부는 다락형식의 구조가 있어서 옆의 팔우정과 2층 복도모양으로

통로가 연결된다. 팔우정은 2층의 누각건물이고, 휴식을 위한 공간으로

활용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며, 협길당 또한 집옥재를 중심으로 한

부속적인 기능의 건물로 사용되었다.

 

 

신무문(神武門)
궁성의 북쪽 문으로 북쪽 궁성이 마련되고 나서 세워진 것이다.

신무문이라는 이름을 얻은 것은 성종 6년(1475)이다. 신무문 쪽은 인적이 드물었으나

신하들의 공훈을 기록해 놓은 회맹단이 있어 왕이 공신들의 충성을 다짐하는 모임이 있는

회맹제에 참석할 때에는 이 문을 이용하였다. 또 영조 때에는 숙빈 최씨를 모신 육상궁에

참배하기 위하여 경복궁터를 길로 삼았는데, 이때 신무문을 자주 이용하였다.

신무문은 건춘문과 규모가 동일하며 현재의 문은 경복궁 중건시 건립된 것이다.

 

안쪽에서 본 신무문

 

신무문을 나서면 바로 청화대가 나온다.

 

 

 영추문

경복궁의 서쪽문인 영추문은 ‘가을을 맞이한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건춘문과 대비되는 개념의 이름으로 서쪽 방위의 개념에 맞게 지어졌다.

이 문은 주로 문무백관이 출입하던 곳으로 특히 서쪽 궐내각사에 근무하던 신하들이

많이 이용하였다. 현재의 문은 1975년에 철근콘크리트 구조로 복원된 것이다.

 

 

경회루(慶會樓)

경복궁의 근정전 서북쪽 연못 안에 세운 경회루는,

나라에 경사가 있거나 사신이 왔을 때 연회를 베풀던 곳이다.

경복궁을 처음 지을 때의 경회루는 작은 규모였으나, 조선 태종 12년(1412)에

연못을 넓히면서 크게 다시 지었다. 그 후 임진왜란으로 불에 타 돌기둥만 남은 상태로

유지되어 오다가 270여 년이 지난 고종 4년(1867) 경복궁을 고쳐 지으면서 경회루도 다시 지었다. 연못 속에 잘 다듬은 긴 돌로 둑을 쌓아 네모 반듯한 섬을 만들고 그 안에 누각을 세웠으며,

돌다리 3개를 놓아 땅과 연결되도록 하였다. 이때 연못에서 파낸 흙으로는

왕비의 침전 뒤편에 아미산이라는 동산을 만들었다.

앞면 7칸·옆면 5칸의 2층 건물로,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을 한 팔작지붕이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만든 공포는 누각건물에서 많이 보이는 간결한 형태로 꾸몄다. 태종 때에는 48개의 기둥에 꿈틀거리는 용을 조각하였으나, 다시 지으면서 지금과 같이 간결하게 바깥쪽에는 네모난 기둥을, 안쪽에는 둥근기둥을 세웠다. 1층 바닥에는 네모난 벽돌을 깔고

2층 바닥은 마루를 깔았는데, 마루 높이를 달리하여 지위에 따라 맞는 자리에 앉도록 하였다.

경회루는 우리 나라에서 단일 평면으로는 규모가 가장 큰 누각으로,

간결하면서도 호화롭게 장식한 조선 후기의 특징을 잘 나타내고 있는

소중한 건축 문화재이다.

 

 

 

 

 

수정전(修政殿)

수정전은 앞면 10칸, 옆면 4칸의 규모가 큰 건물로 앞면에는 월대가 조성되어 있다.

원래 이 자리에는 세종 때 한글창제의 무대가 되었던 집현전이 있었다. 

 

세조가 집권한 이듬해(1456)에 집현전은 페지되었고 임진왜란 때 불탄것을

경복궁 중건(1867) 때 건립하여 고종 초기에는 왕이 기거하는 곳으로,

이후에는 신료들과 정무를 의논하는 편전으로 사용되다가 갑오개혁 시절에는

군국기무처 및 내각으로 사용되기도 했다.

 

 

수정전 주변에는 대전장방, 내반원, 수라간, 정원, 빈청,

선전관직방, 검서청, 옥당, 약방, 의관방 등의 건물이 즐비하였다고 한다.

지금은 수정전만이 홀로 남아 옛날을 말해주고 있다.

 

 

수정전과 경회루  

 

 

 수정전의 후면

 

 

수정전 앞 하마석(노둣돌)

이 노둣돌은 원래있었던 위치를 찾지 못하고 방치된 것을 이곳에 가져다 놓은 것이다.

궁궐내에서는 말을 탈 수 없었기 때문에 궁궐의 어떤 곳에도 노둣돌은 찾아볼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