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국여행 * 문화탐방/서울♡인천

서울 경복궁(慶福宮) 1

자즐보 2011. 3. 27. 22:11

 

 

 

경복궁(慶福宮)

 

조선시대 궁궐 중 가장 중심이 되는 곳으로 태조 3년(1394) 한양으로 수도를 옮긴 후 세웠다.
궁의 이름은 정도전이 『시경』에 나오는 “이미 술에 취하고 이미 덕에 배부르니 군자만년

그대의 큰 복을 도우리라”에서 큰 복을 빈다는 뜻의 ‘경복(景福)’이라는 두 글자를 따서  

 지은 것이다. 1412년 태종은 경복궁의 연못을 크게 넓히고 섬 위에 경회루를 만들었다.

 

이 곳에서 임금과 신하가 모여 잔치를 하거나 외국에서 오는 사신을 대접하도록 하였으며,

연못을 크게 만들면서 파낸 흙으로는 아미산이라는 동산을 만들었다. 



태종의 뒤를 이은 세종은 주로 경복궁에서 지냈는데, 집현전을 두어 학자들을 가까이 하였다.

경회루의 남쪽에는 시각을 알려주는 보루각을 세웠으며, 궁의 서북 모퉁이에는 천문 관측시설인  

간의대를 마련해 두었다. 또한 흠경각을 짓고 그 안에 시각과 4계절을 나타내는  

 옥루기를 설치하였다.



임진왜란(1592)으로 인해 창덕궁·창경궁과 함께 모두 불에 탄 것을 1867년에 흥선대원군이

다시 세웠다. 그러나 1895년에 궁궐 안에서 명성황후가 시해되는 사건이 벌어지고,  

 왕이 러시아 공관으로 거처를 옮기면서 주인을 잃은 빈 궁궐이 되었다.

 

1910년 국권을 잃게 되자 일본인들은 건물을 헐고, 근정전 앞에 총독부 청사를 짓는 등의

행동을 하여 궁의 옛 모습을 거의 잃게 되었다. 



현재 궁궐 안에 남아있는 주요건물은 근정문·근정전·사정전·천추전·수정전·자경전·경회루·

 재수각·숙향당·함화당·향원정·집옥재·선원정 등이 있다.



중국에서 고대부터 지켜져 오던 도성(都城) 건물배치의 기본형식을 지킨 궁궐로서,

궁의 왼쪽에는 역대 왕들과 왕비의 신위를 모신 종묘가 있으며, 오른쪽에는 토지와 곡식의  

신에게 제사를 지내는 사직단이 자리잡고 있다. 건물들의 배치는 국가의 큰 행사를 치르거나  

왕이 신하들의 조례를 받는 근정전과 왕이 일반 집무를 보는 사정전을 비롯한 정전과 편전 등이 

 앞부분에 있으며, 뒷부분에는 왕과 왕비의 거처인 침전과 휴식공간인 후원이 자리잡고 있다.

 

전조후침(前朝後寢)의 격식인데, 이러한 형식은 이 궁이 조선의 중심 궁궐이므로

특히 엄격한 규범을 나타내고자 했던 것으로 풀이된다. 



비록 궁궐 안 일부분의 건물들이 없어지기는 하였지만, 정전·누각 등의 주요 건물들이 남아있고

처음 지어진 자리를 지키고 있어서, 조선의 정궁의 모습을 대체적으로나마  

 확인할 수 있는 중요한 유적이다.

 

 

광화문(光化門)

광화문은 경복궁의 정문이다. 광화문은 중층으로 된 문루를 받치는

기단석축에 세 개의 홍예로 이루어져 있는데, 중앙의 홍예로는 왕이,

좌우의 홍예로는 왕세자와 신하들이 출입하도록 하였다.

문루(門樓)에는 종을 걸어 때를 알리는 데 사용하였다.

현재의 광화문은 1968년에 콘크리트 구조로 복원한 것이다.

원래 광화문은 조선총독부 건물을 지으면서 궁성의 동문인 건춘문 북쪽으로

옮겼으나 한국전쟁 때 폭격을 맞아 문루가 부서지고 석축은 탄흔 투성이가 되었다.

1395년 경복궁의 기본구조를 갖춘 다음 1399년 그 둘레에 궁성을 쌓을 때 세웠다.

처음에는 사정문(四政門)으로 불렀으나 1425년(세종 7) 집현전에서 광화문으로 바꾸었다.

임진왜란 때 소실된 것을 1865년(고종 2)에 재건했다. 1927년 일제 총독부가 경복궁의 동문인

건춘문(建春門) 북쪽으로 축소 이전시켰다. 현재의 문은 6·25전쟁 때 소실된 것을 1968년

석축(石築) 일부를 수리하고 문루를 철근 콘크리트 구조로 중건한 것이다.

 

석축기단 위에 3개의 무지개문[虹霓門]을 만들고, 그 위에 앞면 3칸, 옆면 2칸의

중층 우진각지붕으로 된 문루를 두었다. 숭례문과 비슷한 구조를 하고 있으나

세부장식이 많이 가미되었다. 외이출목(外二出目)· 내삼출목(內三出目)의 다포계 건물로

지붕의 마루에는 취두·용두·잡상을 놓았다. 목재가 아닌 콘크리트로 만들었기 때문에

처마의 선이 자연스러운 곡선을 이루지 못하고 직선에 가까운 모습을 보이고 있어

원래의 모습과 약간의 차이를 보인다.

 

 

 

광화문 앞 해태상

 

 

안쪽에서 본 광화문

 

 

조선시대 궁성문 개폐및 수문장 교대의식

 

 

 

 

 

 

 

 

 

흥례문(興禮門)

흥례문은 경복궁의 정문인 광화문근정전의 정문인 근정문 사이에 있는 중문으로,

정면 3칸, 측면 2칸의 중층 목조 건물이다. 원래는 1426년(세종 8년)에 집현전에서

‘예(禮)를 널리 편다’는 뜻의 홍례문(弘禮門)으로 이름을 지어올렸는데,

1867년(고종 4년) 경복궁을 중건하면서 청나라 고종 건륭제의 휘 홍력(弘曆)을

피하여 지금의 흥례문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흥례(興禮)’란 ‘예를 일으킨다’는 의미이다. 인, 의, 예, 지, 신의 다섯덕목 가운데

예(禮)가 오행상 남쪽과 연관되므로, 이와 같이 이름지은 것이다.

흥례문 중앙에서 경복궁 안쪽을 들여다보면 영제교를 지나 근정문, 근정전이

차례로 일자로 서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리고 근정전에 가려 보이지는 않지만

근정문 뒷편의 사정전과 강령전, 교태전도 모두 일자로 배치되어 있다.

 

다만 경복궁의 정문이라 할 수 있는 광화문은 2006년 12월까지 한쪽으로 틀어져 있었는데,

일제가 조선총독부 건물을 지으면서 철거했던 것을 박정희 대통령이 복원하면서

원래의 위치가 아닌 조선총독부 건물에 맞추어 지었기 때문이다.

 

현재 구 광화문은 철거되었고, 한일 병합 조약 100년인 2010년 8월 15일에,

기울어졌던 3.75도를 바로잡고 고종 중건 당시의 모습으로 복원되었다.

 

 

수문장 교대의식이 재현되고 있는 흥례문

 

 

 

 

근정문 앞 영제교 

영제교는 광화문을 지나 흥례문과 근정문 사이에 있는 다리로 근정전으로 들어가기 위해

건너야되는 다리이다. 상상의 동물인 석수가 조각되어 있으며 다리 위의 길은 3칸으로 나뉘어져 있다.

 

가운데 길은 임금만이 다닐 수 있는 어도로 임금은 어가를 타고 이 길을 지나갔다고 한다.

옛날에는 영제교 아래에 명당수가 흘렀다. 경복궁을 만들면서 명당수가 모자라

이를 보완하기 위해 궁궐 서북쪽의 물을 끌어다 금천을 만들었다.

 

경복궁의 명당수는 북악산록에서 발원하여 서쪽 담장을 따라 흐르다 영추문 근처에서

직각으로 꺾어져 흥례문과 근정문 사이를 지나 동남쪽 담을 통과해 청계천으로

흘러들어 간다. 풍수지리상 길하다고 하는 서류동입(西流東入)의 명당수인 셈이다.

 

일제는 총독부 건물을 짓기 위해 이 다리를 해체한 뒤 명당수를 메웠다.

그 뒤 수정전 뒤뜰로 잠시 옮겼다가 해방 후 다시 해체하여 근정전 동쪽에 옮겨졌다가

현재 복원과정을 거쳐 제자리를 찾아 복원되었다. 

 

 

영제교 밑을 흐르는 금천(禁川)

궁궐 안으로 흐르는 시냇물은 배산임수라는 명당수의 의미와 궁궐의 안과 밖을 구별해주는

경계의 의미를 함께 가지고 있기 때문에 금천이라 불렀다. 

 

 

 

석수는 천록 또는 산예라고 부르는 상상의 동물인데 본래는 16마리로

겨드랑이와 뒷다리 부근에 갈기가 선명하고 정수리에는 뿔이 달려 있다.

천록은 후한서 영제기에 나오는 상상의 동물로

사악한 것을 물리치는 벽사의 능력을 지니고 있다고 한다.

물길을 타고 잠입하는 사악한 것들로 부터 궁궐을 수호하려는 뜻으로 조각한 듯...

 

 

 

 

근정문(勤政門 보물 제812호)

경복궁의 정전인 근정전의 정문으로서 근정전과 함께 고종 4년(1867)에 건립되었다.

근정문은 정면 3칸, 측변 2칸의 중층(重層) 누문(樓門)으로서 다포계(多包系) 양식의

우진각 지붕건물로 세부 수법은 근정전과 큰 차이가 없다.

 

 

 

 

근정전(勤政殿 국보 제223호)

근정전은 조선시대 정궁인 경복궁의 중심 건물로, 신하들이 임금에게

새해 인사를 드리거나 국가의식을 거행하고 외국 사신을 맞이하던 곳이다.

태조 3년(1394)에 지었으며, 정종을 비롯한 조선 전기의 여러 왕들이 이곳에서

즉위식을 하기도 하였다. ‘근정’이란 이름은 천하의 일은 부지런하면 잘 다스려진다는

의미를 담고 있는 것으로, 정도전이 지었다. 지금 있는 건물은 임진왜란 때 불탄 것을

고종 4년(1867) 다시 지었는데, 처음 있던 건물에 비해 많이 변형하였다.

앞면 5칸·옆면 5칸 크기의 2층 건물로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이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짜여진 구조가 기둥 위뿐만 아니라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식 건물이며 그 형태가 화려한 모습을 띠고 있다. 건물의 기단인 월대의 귀퉁이나

계단 주위 난간기둥에 훌륭한 솜씨로 12지신상을 비롯한 동물들을 조각해 놓았다.

건물 안쪽은 아래·위가 트인 통층으로 뒷편 가운데에 임금의 자리인 어좌가 있다.

어좌 뒤에는 ‘일월오악도’병풍을 놓았고, 위는 화려한 장식으로 꾸몄다.

근정전에서 근정문에 이르는 길 좌우에는 정승들의 지위를 표시하는 품계석이

차례로 놓여 있으며, 햇빛을 가릴 때 사용하였던 고리가 앞마당에 남아 있다.

근정문 좌우로는 복도 건물인 행각(行閣)이 연결되어 근정전을 둘러싸고 있다.

근정전은 조선 중기 이후 세련미를 잃어가던 수법을 가다듬어 완성시킨

왕궁의 위엄을 갖춘 웅장한 궁궐건축이다.

 

 

 

 조정과 삼도

근정전 앞 화강암 박석을 깔은 넓은 뜰을 조정이라 하며

문무백관이 조회하는 곳으로 양쪽으로 품계석(品階石)이 늘어서 있다.

동쪽의 품계석은 동반(東班) 즉 문관이 서는 곳이고,

서쪽의 품계석은 서반(西班) 즉 무관이 서는 곳이다.

 

또 삼도(三道)의 길이 나 있는데,

약간 높고 넓은 가운데 길은 임금이 다니는 길이며,

동쪽 길은 문신, 서쪽 길은 무신들이 다니는 길이다. 

 

 

근정전에 오르는 답도

임금이 오르는 길로 가운데는 봉황이 새겨진 소맷돌이 있고

좌우에는 해태상이 있다. 이 답도는 근정전에 오르는 계단에만 설치되어 있어

임금이 가마를 타지 않고 이 계단을 걸어 다닌것으로 알수있다.

 

 

 

근정전 월대의 동물상

윗단 월대의 끝쪽에 있으며 12지신의 하나인 말로서

방위는 정남쪽을 가르키며 시각은 정오를 가르킨다.

 

 

근정전 월대의 동물상 해태

아랫단 월대의 서쪽에 있으며 12지신의 하나인 해태이며

방위는 정남쪽을 가르키며 시각은 오후3시~5시를 가르킨다.

 

 

근정전 월대의 동물상

아랫단 월대의 서쪽에 있으며 12지신의 하나인 닭으로

방위는 정서쪽을 가르키며 시각은 오후5시~7시를 가르킨다.

 

 

 

근정전을 두른 난간의 받침기둥, 조각이 아름답다

 

 

근정전 내부

일월오봉병(日月五烽屛)으로 둘러쳐진 왕이 앉는 의자인 어좌(御座)가

높은 대 위에 있고 통간으로 높은 천장을 형성하였다.

천장 중앙에는 7개의 발톱을 갖고 있는 용 2마리를 나무로 조각해 매달았다.

 

 

근정전의 야경 

 

 

근정전 좌우로 길게 늘어서 있는 행각

행각은 사람들이 다니는 통로이지만 칸으로 막아서 공간으로도 활용하였다.

동.서 양쪽에 각 44칸씩의 행각이 있고, 서쪽에는 융무루,

동쪽에는 융문루라는 누각이 세워져 있다. 

 

근정전 뒤로 보이는 북악산

 

 

근정전에서 본 조정근정문

  

 

 

근정전 앞뜰의 품계석 

문무관료들이 조회를 하는 곳이며 서열에 따라  품계석이 세워져 있다.

 

 

 

 

사정문(思政門)

사정전으로 출입하는 남쪽에 있는 문이다.

1867(고종 4)년, 경복궁을 중건할 때에 만들었다.

사정문은 3칸으로 가운데 문은 왕이 드나들 때 사용하였으며,

신하들은 좌우의 문을 이용하였다.

 

 

사정전(思政殿)

사정전은 왕이 평상시 거처하며 정사(政事)를 보살피던 곳이다.

근정전 뒤 사정문 안에 자리잡고 있으며, 동쪽에 만춘전, 서쪽에 천추전이 있다.

경복궁 창건 당시인 1395(태조 4)년에 지었으며, 1553(명종 8)년에 불탄 뒤 재건했다.

임진왜란 때 불탔으며, 1867(고종 4)년에 중건하였다.

‘사정(思政)’은 ‘선정(善政)을 생각하다’라는 뜻이며, 정도전이 작명하였다.

천하의 이치는 생각하면 이를 얻을 수 있고 생각하지 않으면 이를 잃게되는 것이므로

왕으로 하여금 깊이 생각하여 정치할 것을 촉구하는 내용이다.

 

 

 

사정전 앞 천문의기인 "앙부일구"

 

 

천추전(千秋殿)

천추전은 왕의 편전으로 왕과 신하가 학문을 토론하던 장소이며,

사정전 서쪽편에 위치하고 있다. 

앞면 6칸, 옆면 4칸의 24칸 건물이다. 앞면 중앙 2칸은 퇴량을 얹었고

뒷면은 마루로 되었으며 마루칸을 중심으로 동과 서에는 온돌방을 두었다.

사정전의 서편에 위치하며 동편에는 만춘전(萬春殿)이 위치한다.

 

 

 

 

만춘전 (萬春殿)

만춘전은 사정전의 부속건물로 사정전 서쪽의 천추전과 똑같은 규모로 동쪽에 나란히

위치하고 있는데, 사정전에 비하면 그 양식이나 수법이 검소하게 꾸며졌다.

  왕은 평상시에는 만춘전에 거처하였다고 하는데 조선조의 왕들은 이곳에서

신하들과 나라 일을 의논하고 성현들이 쓴 책의 글을 새기었으며
  때로는 대신들과 연회도 베풀었다.

  

이 건물은 사정전, 천추전과 함께 임진왜란 때 불탄 것을

고종 4년(1867) 대원군이 경복궁을 재건할 때 지었으나
  한국전쟁 때 피해를 입어 댓돌 위에 기둥을 세웠던 주초석들만이 남아 있었는데
  1988년에 다시 옛 모습으로 복원한 것이다.

 

 

유화문(維和門)
경복궁 궐내각과 빈청을 출입하던 문이다.

 

 

 

 

 

향오문(嚮五門)

사정전에서 강녕전으로 통하는 문이다.

 

 

 

강녕전(康寧殿)

경복궁 안에 있던 왕의 침전. 1395년(태조 4) 사정전 북쪽에 세워졌는데

 <서경 書經〉의 홍범편(洪範篇)에서 오복(五福) 중 강녕(康寧)을 당호로 삼았다.

1433년(세종 15) 중수했으며 1553년(명종 8) 불탄 것을 이듬해 중건했다.  

 

임진왜란 때 전화(戰禍)로 다시 불타 없어진 것을 1865년 경복궁 중건 때 다시 지었다.

내전(內殿)의 으뜸 전각으로 앞면 11칸, 옆면 5칸의 단층팔작집이며,  

장대석 바른쌓기한 높은 기단 위에 다듬은 돌초석을 놓고, 민흘림 두리기둥을 세우고,  

쇠서 2개를 둔 이익공집이다. 특히 뒤에 있던 왕비 침전인 교태전과 함께  

지붕에 용마루를 양성하지 않음으로써 침전임을 상징했다.  

 

1920년까지는 제자리에 있었으나 1917년 화재로 불타버린 창덕궁의 내전을

 재건한다는 구실로 일본인들에 의해 헐리어 건축부재로 사용되었다.

 

 

 

연생전(延生殿)과 경성전(慶成殿)
강녕전의 동쪽과 서쪽에 각각 위치한 강녕전의 부속건물격인 소침(小寢)이다.
강녕전과 마찬가지로 태조 4년(1395)에 건립되었으나, 임진왜란때 소실되어

고종 2년(1865)에 다시 재건되었다.

 
그러나 1917년 창덕궁 내전이 화재로 크게 소실되자, 일제는 이를 "복구한다"는 핑계로

연생전과 경성전을 모두 헐어 창덕궁으로 옮겨 폐허가 되고 만다.

현재의 모습은 1995년 다시 재건된 것이다.


강녕전 동쪽에 위치한 연생전은 '만물이 생성되는' 봄(春)을 상징하고,

강녕전의 서쪽에 위치한 경성전은 '결실을 맺는' 가을(秋)을 상징한다.
연생전과 경성전의 이름은 태조의 명을 받들어 정도전이 지어 올렸는데,

이는 왕조사회의 통치관을 성리학적 원리에 입각해 설명하고 있다.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된 정도전의 글에 의하면 "...하늘과 땅은 만물(萬物)을

봄에 낳게 하여 가을에 결실하게 합니다. 성인이 만백성에게 인(仁)으로써 살리고

의(義)로써 만드시니, 성인은 하늘을 대신해서 만물을 다스리므로 그 정령(政令)을

시행하는 것이 한결같이 천지의 운행(運行)을 근본하므로, 동쪽의 소침(小寢)을

연생전(延生殿)이라 하고 서쪽 소침을 경성전(慶成殿)이라 하여, 전하께서 천지의

생성(生成)하는 것을 본받아서 그 정령을 밝히게 한 것입니다"라고 밝히고 있다.
연생전과 경성전은 강녕전 마당을 중심으로 서로 마주보고 있으며

정면 7간 측면 4간 겹처마에 팔작지붕으로 되어 있다.

 

 

강녕전 서쪽 경성전(慶成殿)

 

 

 

강녕전에서 교태전으로 통하는 문

 

 

교태전(交泰殿)

경복궁 안에 있던 왕비의 침전. 경복궁 창건 당시인 1395년(태조 4)에는 없었으나

1443년(세종 25) 증축되었다는 기록이 보인다. 1553년(명종 8) 불탄 것을  

이듬해 중건했으나 임진왜란 때 다시 불타버렸다. 1865년(고종 2)에 중건되었는데,  

1876년 다시 불탄 것을 1888년 재건했다. 1920년 창덕궁 대조전을 짓는다는 구실로  

왕의 침전인 강녕전과 함께 일본인들에 의해서 헐려 건축부재로 사용되었다.  

 

현재 이 자리에는 일제시대에 일본인들이 강제로 옮겨온 석탑·부도 등의 석조물들이 있다.

 교태전은 뒤뜰의 아미산에 남아 있는 굴뚝에 새겨진 십장생·매란국죽과 길상(吉祥)의

 무늬로 보아 150여 채의 궁궐건물 가운데 가장 화려하게 치장되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교태전을 둘러 싸고 있는 전각들,,,

 

교태전 굴뚝,여자의 아름다움만큼 이쁘다

 

교태전의 담장,왕비의 침소를 둘러 싼 담장이라 이쁘게 단장했다.

 

성정문, 교태전 뒤에 있는 아미산으로 가는 문이다. 

 

 

아미산 굴뚝(보물 제811호)

조선 태종은 경복궁 서쪽에 큰 연못을 파고 경회루를 세우고 연못에서 파낸 흙으로

교태전 뒤뜰에 인공동산을 세웠는데 이를 아미산이라 하였다.

 

아미산의 굴뚝은 왕비의 생활공간인 교태전 온돌방 밑을 통과하여 연기가 나가는 굴뚝으로,

지금 남아 있는 것은 고종 2년(1865) 경복궁을 고쳐 세울 때 만든 것이다.

 

현재 4개의 굴뚝이 서 있는데 6각형으로 된 굴뚝 벽에는 덩굴무늬, 학, 박쥐, 봉황, 소나무, 매화,

국화, 불로초, 바위, 새, 사슴 따위의 무늬를 조화롭게 배치하였다.

각 무늬는 벽돌을 구워 배열하고 그 사이에는 회를 발라 면을 구성하였다.

 

십장생, 사군자와 장수, 부귀를 상징하는 무늬, 화마와 악귀를 막는 상서로운 짐승들이

표현되어 있다. 굴뚝의 위쪽 부분은 목조건물의 형태를 모방하였고

그 위로 연기가 빠지는 작은 창을 설치하였다. 굴뚝의 기능을 충실히 하면서

각종 문양 형태와 그 구성이 매우 아름다워 궁궐 후원 장식 조형물로서

훌륭한 작품으로 평가 받고 있다.

 

선장문(善長門)

함원전 뒤뜰에서 아미산으로 들어가는 문이다.

1867(고종4)년 경복궁 중건시 만들었으며, 선장(善長)은 ‘선의 으뜸’이란 뜻이다.

 

 

 

 

 

 

 

교태전 옆에는 흠경각과 함원전이 있다.

이 문은 흠경각으로 통하는 문이다.

 

 

 

 흠경각(欽敬閣)

이 건물은 1438년(세종 20) 장영실(蔣英實)이 완성한 것으로

궁중의 자동 천문시계인 옥루를 보관하던 집이었다.

 

 

 

함원전(含元殿)

‘함원(含元)’은 ‘원기를 간직한다’는 의미이다.

세종 때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며 임진왜란 때 불탔다가,

고종 때 경복궁을 중건하면서 재건하였다. 함원전은 불교 행사가

자주 열렸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어 이채롭다. 지금의 건물은 1995년에 복원된 것이다.

 

 

 

협생문(協生門)

협생문은 동쪽 내부 담장에 난 문이다. 이극문, 즉 세자가 동궁으로 드는

오른편 측문에서 출발해 광화문 밖으로 나갈때 세자가 이용했다.

 

 

건춘문(建春門)
건춘문은 궁성의 동쪽 문으로 만물의 기운이 움트는 ‘봄이 시작 된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건춘문은 주로 세자와 동궁 영역에 위치한 각사에서 일하는

신하들이 출입하던 문이다. 현재의 문은 고종 2년(1865) 경복궁 중건 당시 건립된 것이다.

 

 

동십자각(東十子閣)
동십자각은 궁성의 동남쪽 모서리에 서있는 각루(角樓)이다.

궁성 담장이 헐리면서 현재와 같이 길 한가운데 서있게 되었다.

동십자각은 서십자각과 함께 궁성 전면 양 모서리에 궁궐 안팎을 감시할 수 있도록

세운 것인데, 서십자각은 일제강점기에 헐려버렸다.

 

 

 

 

 옛 광화문 모습. 

 

 

일제시대의 모습.

흥례문과 영제교자리에 조선총독부가 들어서있다.

그리고 광화문은 건춘문 옆 지금 민속박물관 앞으로 옮겨져있다.

근정문,근정전,사정전,광회루,수정전만이 경복궁에 남아있다.

 

도로때문에 담장이 헐려 동십자각이 외롭게 서있다.

 

 

총독부옥상에서 바라본 근정문과 건춘문. 동궁자리에는 박물관이 있다.

 

 

 

60년대 철근콘크리트로 복원된 광화문.

원래위치보다 틀어져있었다.

 

 

동십자각의 옛모습. 건춘문에 연결되어있다.

 

 

 

동십자각 안쪽모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