웅부안동(雄府安東)/임하면

안동 독립운동기념관 & 가산서당

자즐보 2012. 8. 15. 18:42

 

 

안동 독립운동기념관

 

 

 

 

 

 

 

 

  

 

 

 

 

 

 

 

 

 

 

 

 

 

 

 

 

 

 

 

 

가산서당과 협동학교

 

 

 

 

안동이라면 누구나 퇴계와 유학, 전통과 보수성을 떠올린다. 그런 안동에서 요즘 독립운동에 대한 관심이 높다. 2007년 8월 안동독립운동기념관이 문을 연 뒤, 안동 사람만이 아니라 탐방객들도 안동을

 ‘독립운동의 성지’라고 부른다. 왜 그럴까?

독립운동사에서 안동이 가지는 특징은 단연 두드러진다. 첫째, 안동은 독립운동의 발상지다.

독립운동의 첫 걸음인 1894년 갑오의병이 일어난 유일한 곳이기 때문이다. 둘째, 안동은 독립유공자로

포상된 인물이 가장 많다. 전국 시군 가운데 포상자 수가 300명을 넘는 유일한 곳이다. 셋째, 자결하여

순국한 인물이 가장 많은 곳도 안동이다. 무려 10명이다. 넷째, 한 지역의 독립운동으로 독립운동사

51년을 채울 수 있는 곳도 안동뿐이다.

 

이러한 안동의 힘은 어디에서 나왔을까. 독립운동은 짧은 기간에 목표를 이룰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무너지는 나라를 버텨내고, 또 무너진 나라를 되찾아 세우려면 에너지가 있어야 한다.

에너지는 바른 정신력과 추진력으로 구성된다. 현실에 안주하지 않고 타협하지 않는 바른 지도자가

있어야 하고, 꺾이지 않고 밀고 가는 추진력도 있어야 한다. 안동에는 바로 그런 에너지가 있었다.

안동 사람들의 에너지는 두 가지 줄기로 이루어졌다. 하나는 퇴계 학맥이라는 씨줄이다.

노론 세력에 가로막혀 200년 넘게 중앙 진출이 막힌 동안, 퇴계 학맥 계승자들은 학문에 몰두하면서

명분과 의리 정신을 강하게 다졌다. 지도자가 방향을 가리키자, 무너지는 나라를 지탱하는 데

거의 모두가 나섰고, 또 이어갔다.

다른 하나는 혼반(婚班)이라는 날줄이다. 안동문화권 사람들은 한두 가지 촌수로 서로를 헤아리지 않는다. 친가ㆍ외가ㆍ진외가ㆍ외외가ㆍ증외가 등 다중적이고 중첩적인 촌수를 확인한다.

그 연결성과 결속력은 의병이나 계몽운동에서, 만주 망명과 독립군 기지 건설에서, 또 사회운동이나

6ㆍ10만세운동에서도 역동적으로 작용했다.

씨줄과 날줄로 촘촘히 엮어진 그물, 이것이 안동문화권 에너지의 모양새다.

그물은 한 끝만 잡아당기면 전체가 달려 나온다. 문제는 지도자의 뜻과 지도력이다.

빼어난 칼솜씨도 뜻에 따라 뛰어난 요리사도 되고 조폭도 되듯이 말이다. 안동의 지도자는

강한 의리정신을 몸으로 실천했고, 이를 따른 안동사람들의 항일투쟁은 방향성과 지속성에서 빼어났다.

의병이나 계몽운동, 혹은 3ㆍ1운동 가운데 어느 한 가지 기념사업에만 매달리는 지역과는 다르게,

안동은 독립운동 전반에 걸쳐 자랑할 만한 역사를 가지고 있다. 그래서 골골마다 독립운동 이야기가

넘쳐나는 것이다.

 

1>.석주 이상룡의 생가 임청각

 "임청각 소유권 70년간 해결 안 돼 이래서야 누가 나라 위해 싸우겠나"

 "임시정부 초대 국무령이 집이 이런 모욕을…"

친일파 후손은 대대로 잘 살고 독립운동 가문은 3대가 망한다더니, 임청각 주인 석주 이상룡의 후손들은

가시밭길을 걸었다. 석주가 만주에서 순국하자 귀국한 아들과 손자가 일제의 호적을 거부함에 따라

임청각의 집과 대지는 다른 친족 4명의 이름으로 등기된 채 70년간 방치됐다. 석주의 아들은 자결 순국했다. 옥중 해방을 맞았던 손자는 이승만 정권에 반대하다 빨갱이로 몰렸고, 한국전쟁 중 울분과 고문 후유증으로 어린 자식들을 남긴 채 숨졌다. 사정이 이러하니 가족이 임청각을 챙길 여력이 없었던 것이다.

석주의 직계 증손자 이항증(71)씨는 2003년부터 임청각의 소유권을 정리하려고 나섰다. 그러나 여전히

해결되지 않았다. 명의신탁한 4명의 후손이 68명으로 늘어나 소유권 자체가 불투명해졌기 때문이다.

발이 닳도록 뛰어 61명에 대해서는 2003년 확정판결을 받았지만, 나머지 7명은 생사 불명, 이민 등 여러

가지 이유로 서류를 송달할 수 없어 미결 상태다. 임청각을 국가에 헌납하려 했지만, 소유권이 불분명해

그마저 할 수 없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초대 국무령의 집이 광복 65년이 되도록 소유권 정리조차 안 된다는 게 말이 됩니까? 등기를 바로잡으려고 애쓰는 동안 온갖 모욕을 당했어요. 국민고충처리위원회, 법률구조공단도 가봤지만 찬밥 신세였어요. 변호사들도 소송을 안 맡으려 하고. 일만 많고 실익은 없기 때문이죠.

2003년 재판 시작하면서 관련자 68명에게 복사해서 보낸 서류만 5만5,000장이었습니다. 안동시와 경북도가 임청각에 석주 선생 생가라는 표지판을 세운 지 10년이 넘었는데, 국가보훈처는 지난해 5월에야 임청각을 현충시설로 지정해 줬어요. 소유권자가 신청해야 한다는 이유로요.

이래서야 누가 나라를 위해 싸우겠어요?"

크고 아름다운 집 임청각을 두고도 남의 집 처마 밑을 전전하고, 학교를 다니기 위해 여동생과 함께

고아원에서 자라야 했던 고초는, 그는 말하기 싫다고 했다. "역효과만 나지 않겠어요?

독립운동하면 저리 망한다고 할 것 아닙니까?"

이씨는 임청각 연고권자 중 미해결 7명에 대해 지난해 10월 법원에 소유권 이전 청구를 해놨다.

한일병합 100년인 올해 안에는 완결되기를 바란다. 주인 없는 집, 임청각의 오늘이 한국 현대사의

그늘을 고스란히 드러낸다.

 


피로 쓴 독립투쟁사 앞에 우린 얼마나 떳떳한지…
독립운동가 9명 태어난 古宅… 일제, 맥 끊으려 앞마당에 철로 설치해

퇴계 이황으로 대표되는 유학의 본고장, 경북 안동. 안동역에서 낙동강변 도로를 따라 안동댐 방향으로

1㎞쯤 가다 보면 왼편의 철길 방음벽 너머로 오래된 기와집이 보인다. 아흔아홉 칸 고택으로 알려진

임청각(臨淸閣)이다. 높은 방음벽에 가려 지붕만 겨우 보이는 이 집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초대 국무령을 지낸 석주(石洲) 이상룡(李相龍ㆍ1858~1932)의 생가다.

안동시 법흥동 20번지, 임청각은 고성 이씨의 법흥종택이다. 안채 사랑채 행랑채 등 살림채, 별채 사랑인

군자정(보물 182호)과 사당으로 이뤄진, 500년 된 아름다운 고택이다. 안동 사람들은 아흔아홉 칸 집하면 다 안다. 관광 안내 지도에도 나온다. 하지만 일제강점기에 임청각 주인 석주 일가와 후손들이 피와 눈물로 써내려 간 독립투쟁의 역사는 잘 모른다.

 

이 집에서만 무려 9명의 독립운동가가 태어났다. 석주와 아들 준형, 손자 병화의 직계 3대와 동생 상동

봉희, 조카 형국 운형 광민, 종숙 승화까지 모두 독립운동을 했다. 그로 인해 가문이 기울고 후손이

고초를 겪은 것은 이루 말할 수 없다.

임청각 앞에 섰다. 대문 앞에 높이 솟은 철길 방음벽이 답답하다. 낙동강을 굽어보는 산 기슭에 자리잡아

조망이 시원하던 집인데, 1940년대 일제가 임청각 앞마당을 관통하는 중앙선 철로를 놓으면서 앞이

막혔다. 그 때 아흔아홉 칸에서 3분의 1 이상 잘려나가 50여 칸만 남았다. 안동 사람들은 일제가 독립운동의 맥을 끊으려고 일부러 그랬다고 믿는다. 아닌 게 아니라 안동역에서 임청각을 지나 영주 방향 옹천역까지 가는 철도 노선은 기형적이다. 직선이 원칙이건만, 두 번 꺾어 3개의 터널을 뚫었다.
종일 땅을 울리며 달리는 열차 소리에 임청각은 평온하지 못하다. 현재 고택 체험장으로 쓰이고 있는

이 집에서 묵는 손님들은 한밤중 열차의 굉음에 놀라 "배 위로 기차가 지나는 것 같다"고 말한다.

임청각 골목 끝에 있는 국보 16호 법흥사 7층 전탑이 열차 진동에 기울었다는 얘기도 있다.

임청각에 석주의 후손이 산 것은 손자며느리인 종부가 끝이다. 여름이면 서울에서 내려와 지내던 그가 1996년 세상을 떠난 뒤 빈 집이 되었다가 5년 전부터 후손이 일을 맡긴 관리인 부부가 살고 있다.

임청각에는 관리인 이상동씨의 부인과 시에서 나온 화재경비원밖에 없다. 이씨의 부인은 "처음 이 집에

들어왔을 때는 폐가나 다름없었다"고 했다. "마당에 무릎까지 자란 풀이 우거져 벌레가 많아서 밤에

전등도 켤 수 없었다니까요. 지붕은 열차에서 날아온 쇳가루가 앉아서 빨갰고요. 지붕이 새서 골조만

남기고 해체 공사를 했고 기와도 싹 갈은 거예요. 수리는 매년 하고 있지요."

1910년 8월 한일 강제병합으로 나라가 망하자 이듬해 1월, 53세의 석주는 친인척 50여 가구를 끌고

만주 땅 서간도로 망명한다. 독립운동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가산을 처분하고 집안의 노비문서를 불태우고 사당의 신위까지 땅에 묻고 떠났다. 서간도에서 석주는 군사기지 건설을 위해 한인 자치조직인 경학사,

신흥무관학교를 비롯한 교육기관과 병영, 군정기관인 서로군정서를 세워 이끌었다. 남만주 지역 독립운동의 최고 지도자로서 그는 67세 때인 1925년 7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초대 국무령(내각 수반)에 선출됐다. 하지만 독립투쟁 노선을 둘러싼 갈등을 조정하려고 애쓰다 별 성과를 거두지 못해 이듬해 2월 만주로 돌아왔고, 1932년 길림성 서란현에서 74세로 순국했다.
석주 집안이 만주로 감에 따라 임청각은 오래 동안 자주 비어 있었다. 돌아온 후손도 편히 머물지 못했다. 석주의 아들 이준형은 일제의 감시와 회유를 피해 안동의 산골로 옮겼다가 일제가 거기까지 따라오자

1942년 "일제 치하에서 사는 것은 수치"라는 유서를 쓰고 자결했다.

임청각의 수난은 해방 후에도 계속됐다. 1950년 한국전쟁 전후로는 안동철도국 노무자 집단주택으로

사용되면서 심하게 훼손됐는데, 철도국이 영주로 옮긴 후 1975년 해체 복원됐고 몇 번의 수리를 거쳐

오늘에 이른다. 임청각 주인 석주의 유해는 만주에서 눈을 감은 지 68년 만인 1990년에야 환국했다.

해방되기 전에는 돌아가지 않겠다는 그의 유언에 따른 것이지만, 너무 오래 걸렸다. 일제의 호적을

거부해서 무국적자로 남아 있다가 국적법 개정으로 국적을 회복한 것은 다시 19년이나 흐른 

2009년의 일이다.

임청각 앞을 지나는 열차 소리를 들으며 생각한다. 경술국치가 있은 지 100년, 해방된 지 65년, 지금 우리는 조국 광복에 목숨을 바친 선열들 앞에서 얼마나 떳떳한가. 마음이 무거워진다.

2>백하 김대락과 내앞마을

내앞마을 백하 김대락의 고택 '백하구려' . 마당의 표지판 뒤 바위는 협동학교 교사들이 의병에 피살된 곳이다. 개화와 신교육에 반대하는 보수 유림의 반발이 그만큼 컸다.

 

 1910년 12월 24일, 안동 내앞마을(임하면 천전리)의 노 선비 백하 김대락(1845~1914)은 의성 김씨 일가를 이끌고 만주로 망명 길에 오른다. 한일 강제병합으로 나라가 망한 지 넉 달, 그 때 나이 65세. 빼앗긴 나라를 되찾을 독립투쟁 기지를 건설하기 위해 압록강 건너 서간도까지 가는 넉 달 간의 험한 여정의 시작이었다.

국내를 통틀어서 첫 번째의 문중 단위 집단 망명이었다. 일행에는 백하의 손자며느리와 시집 간 손녀까지 있었는데, 둘 다 만삭이었다. 안동에서 추풍령까지 1주일을 걸었다. 거기서 기차를 타고 서울 거쳐 신의주까지 간 다음 다시 걸어서 압록강 너머 최종 목적지인 유하현 삼원포에 닿은 것이 1911년 4월 10일.

손부와 손녀는 유하현으로 가는 도중 2월에 해산을 했다. 엄동설한에 일제의 눈을 피하느라 제대로

먹지도 자지도 못하고 갔으니, 고생이 오죽했을까.

내앞마을은 백하를 비롯한 독립운동 유공자를 25명이나 배출한 마을이다. 전국 시ㆍ군 단위 독립운동

유공자 수가 평균 35명임을 감안하면, 대단한 숫자다. 내앞마을의 의성 김씨 망명객은 150여명에 이른다.

백하의 내앞 문중을 시작으로, 1911년 무렵 안동과 주변 지역에서 만주로 독립투쟁하러 간 사람은 100여

가구 약 1,000명에 이른다. '만주벌 호랑이'로 불린 김동삼(1878~1937), 백하의 아들로 해방 직후 김구와

김일성이 만난 남북연석회의 임시의장을 맡았던 김형식(1877~1950)도 이 마을 출신의 독립운동가다.

내앞마을은 안동 시내에서 영덕 방향으로 15㎞ 지점, 임하댐 입구 보조댐 앞에 있다. 마을 앞으로 낙동강의 지류인 반변천이 흘러 내앞(川前)마을로 불린다. 의성 김씨 집성촌인 이 마을은 안동에서 하회마을과

쌍벽을 이루던 곳이다. 하지만 하회 모르는 이는 없어도 내앞을 아는 이는 별로 없다. 마을이 거의 통째로 만주로 가서 대부분 돌아오지 못했고, 남아 있던 사람들도 만주로 간 일가의 독립운동을 지원하느라

가세가 기울고 후손은 흩어진 탓이다.

마을에는 백하의 고택 '백하구려(白下舊廬)'와 김동삼의 생가가 있다. 백하구려에 살고 있는 후손 김시중(73)씨는 방안 벽에 선조들의 독립투쟁 훈장증과 이 집을 임시교사 겸 기숙사로 썼던 협동학교 관련 기사가 실린 일제강점기의 황성신문 복사본을 붙여놨다. 백하 집안의 독립 유공자는 백하를 비롯해 막내 여동생 김락, 조카 만식 정식 규식, 규식의 아들 성로 등 6명이다.

1907년 내앞마을에서 문을 연 협동학교는 경북 지역 최초의 근대식 중등교육기관이다. 류인식 등 혁신

유림이 설립했다. 의성 김씨 문중 서당인 가산서당에서 출발한 이 학교는 1919년 3ㆍ1운동 이후 강제 폐교될 때까지 독립 투사의 산실이었다. 초기에는 지역 유림의 반대가 극심했다. 위정척사를 외치며 개화에

반대하던 보수 유림으로서는 신학문도, 학생들의 단발도 용납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1910년 7월에는

의병이 협동학교를 기습해 교직원 3명을 살해하는 사건까지 벌어졌다. 백하구려 마당의 큰 바위가

그들이 피를 뿌린 곳이다. 김시중씨는 "귀신 나오는 바위라고 해서 어릴 때 밤에는 무서워 마당에

나가지도 못했다"고 한다.

백하도 처음엔 그랬다. 하지만 의병 투쟁이 곳곳에서 일제에 패하고 망국이 돌이킬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던 1909년 초 그는 혁신 유림으로 다시 태어난다. 육십 평생 보수 유림으로 살아온 선비가 세계관의 대전환을 일으킨 것이다. 그는 백하구려의 사랑채를 협동학교 교사로 내주고 지원하기 시작한다.

당시 그의 변화는 안동 지역 뿐 아니자 전국에 영향을 끼칠 만한 큰 사건이어서, 황성신문은 '교남 교육계에 새로운 붉은 기치'라는 제목의 논설로 대서특필하기도 했다. 백하의 변모는 그 무렵 독립운동 단체

'대한협회보'를 읽고 쓴 다음과 같은 글에 잘 드러난다. "늙은이 눈 어두워 죽은 듯이 누웠다가 창문에 기대어 대한서를 읽는다. 폐부를 찌르는 말 마디마디 간절하니 두 눈에 흐르는 눈물 옷깃을 적시네."

뼈저린 대오각성이었다.

만주에서 백하는 매부인 이상룡(임시정부 초대 국무령) 등과 함께 한인 자치조직 경학사를 만들고,

신흥무관학교의 전신인 신흥강습소를 세워 독립운동 기지 건설에 매진하다 1914년 삼원포에서

세상을 떠난다.

'돈 천 석, 사람 천 석, 글 천 석'의 '삼천 석 댁'으로 불리던 백하 집안도 독립운동으로 쇠락했다.

김시중씨는 "사람과 돈이 모두 없어져 얼마 전까지만 해도 집안이 엉망진창이었다"고 말한다.

"선조들의 독립투쟁 이야기를 귀가 따갑게, 몸서리 나도록 들으며 자랐죠. 독립운동 이야기, 양반 이야기가 제일 듣기 싫었어요. 만날 굶고 경찰에 불려 다니는데 좋겠어요? 그런데 나이가 드니 집안 할매, 아지매들이 해준 그 이야기들이 새록새록 생각 나요. 백하 할배만 해도 그래요. 망명 당시 65세였는데, 요즘으로

치면 구십 노인 아녜요? 죽으러 간 거지."

백하의 묘는 찾을 길이 없다. 일제가 훼손할까 봐 비석을 세우지 않았다가 위치를 알 수 없게 됐다.

2002년 안동의 의성 김씨 선산에 가묘를 쓰면서 역사학자 조동걸이 비문을 지었다. "백하는 유학자, 선비, 계몽주의 민족운동가, 독립군 기지를 개척한 독립운동 선구자다… 세상에 외치노니 지사연 하는 학자가

의리를 찾는다면 여기 와서 물어보라. 애국자연 하는 위정자가 구국의 길을 묻는다면 여기 와서 배우라,

저승으로 가는 늙은이가 인생을 아름답게 마감하는 지혜를 구한다면 여기 와서 묻고 배우라고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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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아버지·남편·두 아들·사위까지 항일 투신
3·1운동 참여했다가 고문당해 두 눈 잃어


■ 독립운동 3代, 그 명가를 지켜낸 김락
여성 독립운동가는 무척 드물다. 그것도 신여성이 아니라 전통 양반 가문의 안주인이 항일투쟁에 나선

경우는 찾기 힘들다. 그런데 10년 전인 2000년 여름, 일제가 쓴 '고등경찰요사'를 읽다가 뒤통수를 얻어맞은 듯 충격을 받았다. 안동 양반 이중업의 아들 이동흠이 "내 어머니가 3ㆍ1운동 때 일제 수비대에 끌려가

두 눈을 잃고 11년 동안 고생하다 돌아가셨으니 일제에 대한 적개심을 결코 버릴 수 없다"고 말했다는

기록이 딱 넉 줄 적혀 있었다. 그 어머니는 누구인가. 추적에 나섰다.

족보에는 의성 김씨 김진린의 딸이라 적혀 있다. 그렇다면 안동 임하면 천전리(내앞마을) 김대락의 막내

여동생이다. 친정 제적등본에 적힌 형제자매의 이름은 모두 김대락처럼 김O락인데, 주인공인 막내만은

그냥 김락(1862~1929)이다. 하는 수 없이 그 이름으로 독립유공자로 신청하고 포상받게 되었다.

김락이 3·1운동에만 나선 것은 아니다. 그는 독립운동가 3대를 지켜낸 중심인물이다. 열다섯 살에 안동

도산면 하계마을로 시집가서, 양산현령을 지낸 이만도의 맏며느리이자 이중업의 아내가 되었다.

새댁 시절 시어머니를 여읜 그는 시누이와 시동생을 돌보며 안방 주인으로서 집안을 도맡았다.

그런데 1895년 시아버지는 예안의병을 일으켜 의병장이 되었고, 남편도 마땅히 함께 나섰다.

일제의 공격으로 이웃 퇴계 종가가 불타는 황망한 가운데서도 그는 흔들리지 않고 집안을 지켰다.

48세 되던 1910년, 나라가 망하자 시어른은 24일 단식 끝에 순국했다. 장례를 치르고 상복에 눈물도 마르지 않았는데, 아버지처럼 여기던 큰오빠 김대락과 김동삼 등 친정 집안이 대거 만주로 망명 길에 나섰다.

큰 형부 이상룡 집안도 함께 갔다. 서간도에 독립군 기지를 건설하기 위해 떠난 고난의 길이었다.

남편과 두 아들도 독립운동에 나섰다. 1914년 남편 이중업은 안동과 봉화 장터에 격문을 돌렸다.

맏아들 이동흠은 대한광복회에 가담했다가 구속됐다. 1919년 3․1운동 당시 서울에서 활동하던 남편은

'파리장서'라 불리는 독립청원서를 발의하고, 강원도와 경북 지방 유림 대표의 서명을 받는 일을 맡았다.

바로 이때 김락은 57세의 나이에 예안면 만세운동에 나섰다가 일본군 수비대에 붙잡혔고, 취조를 받다가 두 눈을 잃는 참극을 당했다.

앞을 못 보고 귀로만 듣고 살던 터에 다시 놀라운 일과 마주쳤다. 독립청원서를 가지고 중국으로 떠나던

남편이 갑자기 사망한 것이다. 한숨 짓는 사이에 맏사위 김용환이 일제에 붙잡혔다.

학봉 김성일의 종손인 맏사위는 만주 독립군 기지를 지원하던 의용단에 가담했던 것이다.

김용환은 '조선 최대의 파락호' 소리를 들으며 노름꾼으로 위장해 독립자금을 댔다. 그 바람에 요즘으로

치면 100억원이 훌쩍 넘을 종가 재산이 거덜났다. 둘째 사위 류동저는 안동 사회운동에 뛰어들었다.

둘째 아들 이종흠은 1925년 제2차 유림단 의거에 참여했고, 그 바람에 두 아들이 모두 잡혀갔다.

이런 사이 두 번이나 자살하려다 가족들 손으로 살아난 그는 1929년 2월 67세로 눈을 감았다.

35년 동안 시가와 친가 모두 독립운동으로 해가 뜨고 졌다. 그 한가운데 김락이 있었다.

그를 중심으로 3대에 걸쳐 독립운동이 펼쳐졌다. 현재 그의 사진 한 장 없다. 그가 시집 가서 살던

하계마을은 1970년대 안동댐 건설로 수몰됐다. 쓸쓸하고 횡한 마을에 독립운동 내력을 전하는 기적비만

남아 있다. 하지만 그가 남긴 자취는 잊혀질 수 없다. 안동에서 그를 되살려 인형극을 공연하고,

뮤지컬을 준비하는 것은 '겨레의 딸, 아내 그리고 어머니'의 삶을 제대로 기리기 위해서이다.

<글쓴이:김희곤 안동대 교수ㆍ안동독립운동기념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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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동의 독립운동사

     

    * 개설

    안동의 독립운동은 1894년 갑오의병을 시작으로 1945년 안동농림학교 학생 항일운동에 이르기까지

    51년 동안 줄기차게 전개되었다. 안동지역에서 전개된 독립운동은 의병 항쟁, 애국계몽운동, 항일 투쟁,

    3·1운동, 대중운동, 사회주의운동, 학생운동 등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척사유림의 의병항쟁과 자정순국

    약육강식의 원리가 세상을 지배하던 19세기 중엽, 조선의 지식인들은 이에 대응하여 다양한 사상과

    운동을 전개하였다. 그중 대표적인 사상이 위정척사사상(衛正斥邪思想)으로 주자학적인 질서를

    정(正: 바른 것)으로 인식하고, 서양과 서학을 사(邪: 그릇된 것)로 인식하였다. 이러한 인식은

    곧 바른 것인 주자학적 질서를 지키고, 그릇된 것인 서학을 배척해야 한다는 운동으로 이어졌다.

    개항기 안동유림의 위정척사운동은 주로 영남만인소와 같은 상소운동을 통해 전개되었다.

    그러나 일본경복궁을 직접 압박해 왔던 1894년을 기점으로 위정척사운동은 의병 항쟁으로 전환되었다. 당시 안동의 유림들은 의리론(義理論)에 입각한 척왜(斥倭)의 논리로 현실을 바라보았고,

    그에 따라 의병을 일으켜 항쟁하였다. 1894년 조선 말기 최초의 의병인 갑오의병에서 시작한

    안동의 전기 의병은 1896년 9월까지 이어졌다.

    화이관(華夷觀)과 의리론에 입각하여 의병 항쟁을 주도하던 안동의 유림들은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이만도·이중언·김도화가 중심이 되어 상소운동을 전개하였다. 상소의 내용은 을사5적을 참하고, 만국공법(萬國公法)에 호소해 일본의 침략성을 단죄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또 한편에서는 이상룡·박인화·배선한·류시연 등에 의해 1909년까지 의병 항쟁이 전개되었다.

    척사유림들은 1910년 나라가 멸망하자 몇 갈래의 길을 선택했다. 그 가운데 척사 의식이 강했던 안동

    유림들은 임금의 신하 된 자로 ‘적의 백성’으로는 하루도 살 수 없다는 철저한 의리론에 입각하여

    자결의 길을 택하였다. 대표적인 인물로 이만도·이중언·류도발 등이 있다.


    * 혁신유림의 등장과 애국계몽운동

    위정척사에서 출발한 척사유림의 항거에 이어 1904년 이후 의병 항쟁을 주도했던 안동의 유림들 가운데

    새로운 길을 모색한 혁신유림(革新儒林)이 등장하였다. 류인식·이상룡·김대락·김동삼 등은 안동

    근대식 중등학교인 협동학교(協東學校)를 설립하고 대한협회 안동지회(지회장 이상룡)를 만들었으며,

    다른 혁신유림은 새로운 현실 인식의 토대 위에 민력(民力) 양성을 통한 구국계몽운동을 전개하였다.

    특히 류인식·김후병·하중환 등에 의해 설립된 협동학교안동 지역 계몽운동의 요람이요, 안동 유림의

    사상적 대변환의 갈림길이었다. 사상적으로 보수성을 가장 강하게 고집하였던 안동 지역에 혁신의 바람을 불러일으키고, 그 바람을 경상북도 북부 지역으로 확산시켜 나간 출발점이 되었으며, 많은 독립운동가를 배출한 산실이었다.

     

    *혁신유림의 만주 망명과 국외 항일투쟁
    안동에서 계몽운동을 전개하였던 혁신유림들은 1910년 국권을 빼앗기자 만주로 망명하여 항일 투쟁을

    이어 가고자 하였다. 이들은 문중의 청장년들을 이끌고 집단적인 망명을 하였는데 대표적인 문중이

    김대락이 이끄는 천전리(내앞마을)의 의성김씨 문중, 이상룡이 이끄는 법흥동고성이씨 문중이다.

    그들이 최적지로 선택한 서간도 유하현 지역은 신민회가 독립운동 기지로 지목한 곳이기도 했다.

    안동의 독립운동가들은 유하현·통화현·화전현·관전현·반석현 등에 한인 사회를 형성하고, 이를 기반으로 독립운동 기지를 개척해 나갔다. 경학사(耕學社)부민단(扶民團) 등의 자치 기관을 설립해 한인 사회를 이끌었고, 신흥무관학교·백서농장과 같은 교육 기관과 병영을 설치하여 독립군을 양성하면서 독립전쟁을 준비하였다. 안동 사람들이 핵심을 이룬 서로군정서압록강을 넘어 일제의 침략자들을 상대로 수많은

    유격전을 펼쳤다. 이상룡은 이때 최고 직책인 독판(督辦)을 맡았다.

    만주에 정착한 이후 안동 사람들은 1920년 10월 청산리 전투와 간도참변을 겪은 뒤, 1922년 이후 독립군

    통합운동을 벌여 대한통군부대한통의부를 성립시켰다. 1923년 상해에서 열린 국민대표회의에 참가한 김동삼은 의장으로 활약하기도 했다. 1924년 11월에는 서간도를 포함한 남만주 지역의 한인 사회와 독립군 세력을 총체적으로 관할하는 정의부를 성립시켜 독립운동을 펼쳐 나갔다. 이때 김동삼정의부

    최고 책임자이었다.

    1930~1940년대에 만주의 한인들은 길림하얼빈으로 북상하면서 한국독립당군으로 활동하기도 하고,

    동북항일연군에 가담하여 항일 투쟁을 펼쳤다. 특히 안동 사람들은 서간도·남만주·길림·하얼빈 일대에서 펼쳐진 항일 투쟁에서 핵심을 이루었고, 역할도 두드러졌다.


    *1910년대 군자금 지원 활동과 3 · 1 운동

    나라가 멸망하고 안동의 인사들이 만주로 망명하자 안동에서는 만주 지역 독립군 기지 건설에 들어갈

    자금을 마련하고자 1915년 의병 계열과 계몽운동이 통합하여 조직한 비밀결사인 대한광복회를 중심으로 활동을 전개하였다. 대한광복회 활동과 더불어 1910년대 독립운동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부분이

    3·1운동이다.

    안동 지역 3·1운동은 3월 13일부터 3월 27일까지 15일 동안 11개 지역에서 14회에 걸쳐 일어났으며,

    10,000여 명의 주민이 참여하였다. 안동면·예안면·도산면·임동면·임북면·임서면·길안면·풍산면의 장터가 주된 3·1운동 장소였다. 안동 지역 3·1운동의 계기는 동경 유학생의 소식 전달과 고종의 장례에 참가했던 유림과 학생들에 의해 마련되었다. 특히 장례에 참여했던 사람들이 서울 시위 현장에서 가지고 온

    「독립선언서」나 태극기가 안동 시위 현장에 그대로 사용되었다.

    안동의 3·1운동은 전통적 세력인 유림과 새로운 세력인 기독교인들이 주도하였고, 농민 대중이

    주력 부대로 참여하였다. 근대식 교육 기관의 학생들도 주요 지도자로 활약하였다. 즉 안동의 3·1운동은

    척사와 혁신, 신분을 넘어 하나 되는 거군적(巨郡的) 운동이었다. 3·1운동 직후에는 유림들이 주도한

    파리장서운동(유림단 의거)이 전개되기도 했다.


    *1920년대 사회주의 수용과 대중운동의 전개

    1910년 안동 지역 각지에 설립된 사립교육기관은 1920년대 대중운동·사회운동을 주도하는 지도자를

    배출하였다. 1920년대 전반기 안동의 대표적인 운동 단체로는 조선노동공제회 안동지회풍산소작인회를 들 수 있다. 안동의 본격적인 사회운동은 조선노동공제회 안동지회를 통한 노동운동에서 시작되었다.

    1920년 4월 11일 서울에서 노동공제회가 결성되자 9월 23일 안동에서도 조선노동공제회 안동지회를 설립하여 안동의 노동운동을 이끌었다. 조선노동공제회 안동지회안동의 노동운동을 주도했다면,

    1923년 11월에 결성된 풍산소작인회안동의 농민운동을 주도한 단체였다. 풍산소작인회를 주도한

    사람들은 서울에서 활동하던 이준태를 비롯한 김재봉·안상길 등으로, 지역의 농민 의식을 고양시키는데

    매우 큰 역할을 하였다.

    1925년에 들어와 안동의 운동은 사회주의를 본격적으로 수용하면서 새로운 전환점을 맞았다.

    서울에서 결성된 조선공산당고려공산청년회에 관계한 김재봉·이준태·권오설·김남수 등에 의해

    안동의 민족운동은 한층 역동적인 모습을 띠었다. 특히 1925년 1월 8일 이준태·김남수 등에 의해 조직된

    화성회(火星會)안동 지역 사회주의운동의 혁신과 사상적 전환에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으며,

    이후 안동 지역 사회주의운동의 밑거름이 되었다.

    1927년에는 신간회를 통한 민족협동전선이 이루어졌다. 이 시기의 조선공산당은 사회주의 세력의 통일,

    단일적인 민족혁명전선의 결성에 주력하였다. 이에 따라 안동에서도 신간회 안동지회가 결성되어 좌우

    합작을 통한 민족운동이 전개되었다. 김남수서울에서 제3차 조선공산당을 이끌면서 각 지역에

    야체이카 조직을 만드는 데 힘을 쏟았다.

    한편 1920년대 전반기의 사회운동의 역량 축적으로 1927년 8월에 조선공산당 ‘도기관’이 조직되었는데,

    이 조직에 관여한 안동의 인물로는 안상길이 있다. 경북도기관은 제4차 조선공산당 결성으로 제3차

    조선공산당 시기에 비해 조직이 다소 확대 변경되었다. 1927년부터 1928년까지 조선공산당

    고려공산청년회의 야체이카가 조직되었고, 안동에도 조직되었다.

    그러나 1928년 이후 안동의 사회운동은 조선공산당 사건과 관련하여 거듭되는 검거 사태로 위기를 맞게

    되었다. 1928년 2월경부터 시작된 제3차 조선공산당사건과 관련하여 김남수가 체포되었으며, 8월경에는

    제4차 조선공산당사건으로 안상길·이회원·권태동·이지호 등의 지도자들이 검거되었다.

    게다가 안상길에 의해 조직된 경북 야체이카 안동 조직이 1930년 경북공산당사건으로 무너지면서

    안동의 사회운동은 위기를 맞게 되었다.

    *1930년대 이후 사회주의 운동과 학생운동

    1930년에 들어서면서 안동의 독립운동은 커다란 장벽에 부딪쳤지만 이를 딛고

    1931년 안동콤그룹(안동코뮤니스트그룹)이 결성되었다. 1933년 안동콤그룹이 계획했던 대규모 봉기가

    사전에 발각되어 실패로 돌아갔지만, 조직의 구성원과 활동 목표는 이전과는 전혀 다른 모습을

    보여 주었다.

    조직의 구성원은 기존의 지식인 위주에서 벗어나 노동자·농민을 중심으로 진보적 성향의 민족주의자들을 포괄하였다. 또한 활동 목표도 사유재산을 부정하고 노동자·농민의 정부수립을 목표로 했지만,

    노동자·농민의 생존권 투쟁까지도 담아내고 있었다.

    안동콤그룹이 와해된 이후 안동의 독립운동은 1943년 안동농림학교 학생 항일단체가 만들어지기까지

    침체를 겪기도 하였다. 안동농림학교 학생 항일운동은 1943년 결성된 명성회와 1944년 결성된

    조선회복연구단을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1945년 8월 광복이 이루어지면서 안동농림학교 학생항일운동1894년 갑오의병을 시작으로 51년 동안 줄기차게 전개된 안동 독립운동사의 대미를 장식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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