웅부안동(雄府安東)/임하면

백운정,사빈서원 답사

자즐보 2011. 3. 11. 22:08

 

답사일 2011년 3월 11일 

 

백운정(白雲亭)

 

백운정은 연화봉(蓮花峯)아래 부암(傅岩) 위에 자리 잡고있으며

앞으로는 반변천이 흘러 옛부터 임하구곡(臨河九曲)의 한 곳으로 

경관이 매우 아름다운 곳에 있다.  

 

백운정 정자는 청계 김 진선생이 둘째 아들 귀봉 김수일(1528-1583)에게

터전을 정해주고, 귀봉공이 조선 선조 원년(1568년)에 창건하여

아들 운천 김 용(1557~1620)에게 전수한 것이다.

 

정자명 백운(白雲)은 여기서 서북쪽  비리곡중턱에

귀봉공의 조부 승지공(김예범) 묘소가 보임으로

登高山 望白雲(등고산 망백운) 높은 산에 올라 흰구름 바라보며 

思親在其下(사친재기하) 어버이 그 아래 계신가 그리워 하노라 라는

당나라 적량고사(狄梁古事)를 인용하여 지은 것이다.

 

이 정자에는 약봉.귀봉.운암.학봉.남악 5형제가 시를 지어

걸어 놓은 시판과 그의 스승 퇴계의 친필 朝陽門 과 二樂門 글씨가 있다.

백운정 현판의 글씨는 미수 허목(1595-1682)선생의 친필이다.

 이 건물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합각 기와지붕의 겹처마 구조로 되어 있다.

 

백운정은 1986년 12월 11일 경상북도문화재자료 제175호로 지정 되었고,

 2008.2월 문화재청이 국가지정문화재인 "명승"으로 지정했다.

 

 

 

자연속에 묻혀 440여 년을 숨셔 온 "백운정"

 

 

 

 

 

 

조선시대의 문신 문정공 미수 허목(1595~1682/양천허씨)선생이 80세 쯤 

친필로 쓴 전서 편액 글씨 "백운정" 九十老人書(구십노인서)라고 부기되어 있으며

1743년 백운정을 크게 중수하면서 달았다.

 

 

 

 

낙동강의 제1지류인 반변천을 바라보는 백운정자 

 

 

귀봉이 백운정을 완성했을 때 청계 김 진선생께서 기뻐하며 원운한 詩

 鑿壁開亭翠獻頭(착벽개정취헌두) 절벽을 깍아 지은 정자 푸른 산머리

江山明媚拂人眸(강산명미불인모) 강산이 아름다워 눈에 산뜻해

日臨鏡面魚紋動(일임경면어문동) 햇살쬐는 물거울에 노니는 물고기

雲掃天心雁字稠(운소천심안자조) 구름 걷힌 하늘을 가는 기러기

百里遊歌會物色(백리유가회물색) 고을원 인재 찾아 와 주기도 하였으니

一區花草亦光休(일구화초역광유) 이 구역의 화초들도 영광스럽네

樽前知有無窮樂(준전지유무궁락) 잔 들고 즐기고는 있지만

渚恐兒孫醉似劉(저공아손취사유) 자손들이 대취할까 두렵구나

 

 

 

백운정의 뒤쪽에서 찍은 모습

 

 

오른쪽 산능선에 올라 찍은 백운정

 

 

백운정에 걸려 있는 시판 중에

귀봉선생이 어느 날 정자에 올라 감흥을 노래한 詩... 

縣城西北洛江湄(현성서북락강미)  고을 성 서북 낙동강 물 가

 

靑 開成小閣危(청 개성소각위)  푸른 산 언덕에 우뚝한 작은 정자 지었네

 

才子乘閒來讀易(재자승한래독이)  재자들은 한가한 틈에 와서 주역을 읽고

 

大兄携酒坐吟詩(대형휴주좌음시)  대형은 술을 가져와 앉아 시를 읊조리네

 

雲收遠壑山如畵(운수원학산여화)  구름 거둔 먼 산골짝은 그림 같고

 

風定深潭水似砥(풍정심담수사지)  바람 멈춘 깊은 연못 물은 숫돌같이 고요하네

 

向夕微瀾搖朗月(향석미란유랑월)  지난 밤 약한 물결 일어 밝은 달 흔들리는 모습이여

 

絶勝神女弄珠時(절승신여롱주시)  절승지에서 신녀가 구슬을 으르고 노는 때였네  

 

 

315세 향나무(시지정 보호수)

 

310세 회화나무(시지정 보호수) 

 

 

백운정에서 본 "백운정유원지"

 

 

백운정에서 본 "내앞마을"

“내앞마을”은 의성김씨 씨족 촌락 마을로 의성김씨 종택을 비롯하여

보물 2점과 고택이 잘 보전되어 있으며, <택리지>에 전통 씨족 촌락으로

소개되어 있고, 약300년 전에 제작된 이종악의 <허주산부군수화첩

(虛舟山府君水畵帖/半邊川十二景)>에 ‘운정풍범(雲亭風帆)’이라는

제목으로 마을 풍광 그림이 남아 있는 등 500여년 역사를 간직하고 있는 마을이다.

 

 

백운정에서 본 "개호송 숲" 

“개호송(開湖松) 숲”은 통례공 만근(通禮公 萬謹)이 조선 성종 무렵에

내앞마을 앞 수구(水口)가 허술함을 메우기 위해 조성한 것으로

임진왜란 직후인 선조 38년(1605년) 대홍수 때 유실된 것을

운천 김용 선생의 발의로 다시 조성한 숲이다.

 

의성김씨 문중에서는 개호금송완의(開湖禁松完議)라는

문중 규약을 만들어 이 숲을 보호해 왔다고 전한다.

이 숲은 내앞마을의 농경지를 보호하고 바람과 물의 장애요인을

제거하기 위한 수구막이 숲이며, 완만한 모래사장에

달빛이 비추는 ‘완사명월형(浣沙明月形)’ 혹은 소가 누워 풀을 되새김하는

‘와우형(蝸牛形)’으로 알려져 있는 내앞마을 풍수형국의

모자람을 채우기 위한 비보림(裨補林) 역할을 위하여 인위적으로

조성되어 보호하여 온 오랜 역사의 마을 숲이다.

 

 

안동컬쳐텔러나눔회원님들 백운정 답사(2011.3.11),,, 

 

 

 

사빈서원〔泗濱書院

 

이 서원은 청계 김진(靑溪 金璡)과 그의 아들 5형제의 유덕을 추모하고

후학을 양성하기 위하여 1685년(숙종 11)에 사림과 자손들의 공의로 세워진 서원이다.


1709년(숙종 35) 동구밖 사수가로 이건하여 ′사빈서원′이라 하였다가

서원철폐령에 의하여 훼철되고 1882년(고종 19) 사림과 후손들에 의하여

복설되었으나 현재는 강당과 주사만 남아있는 것을

 

임하댐 건설로 인해 임하면 사의리에서 1987년 임하리로 이건하였으며

청계공파 후손들에 의해 2005년 중창사업에 따라 현위치로 이건하고 

사당,동.서재,전사청,누각 등 새 건물을 지어 규모를 확장했다,

 

현재는 내앞 가문의 둘째 자제이신 김명균 선생께서 기거하시며

학문증진과 후학 양성에 노력하고 계신다.

 

 

사빈서원 강당

정면6칸, 측면2칸의 큰 규모의 강당이며, 많은 변경과 중수 흔적이 있다.

중앙에 정면 4칸의 커다란 대청을 두었다,

그 좌우에는 각기 중앙에 내통하는 문을 낸 2칸씩의 온돌방을 놓았다.

대청과 방 사이의 개구부는 좌우 동형으로 건물의 정면 쪽 주간에는

출입을 할 수 없는 머름을 들인 쌍여닫이 띠살창이,

배면 쪽 주간에는 출입문인 굽널띠살문이 나 있다.

이런 청방간의 개구부 형식은 19세기 이후부터 거의 나타나지 않고 있다.

 

 

강당 앞으로 새로 지은 동재와 서재

 

새로 지은 누각

 

 

 

주사는 원형보존이 양호한 편이며 정면 5칸, 측면 5칸의 완전 ‘口’자형 집이다.

정면 왼쪽에서 두 번째 칸에 나 있는 대문을 들어서면 안마당 건너편에 3칸 대청이 놓여 있다.

대청 좌우에는 각기 2칸통씩의 안방과 윗방이 자리 잡고 있다.

안방 머리 쪽에는 도장방을 두었고, 출입은 대청에서만 가능하게 하였다.

 

안방과 윗방은 익사 쪽으로 각 1칸씩 늘여 마당으로부터 바로 드나들 수 있게 하였고,

그 앞으로는 부엌을 설치하여 좌·우익사가 되게 하였다. 건물의 구조 양식은 자연석 기단 위에

막돌 초석을 놓았고, 네모기둥을 세운 민도리 형식이며,

안채 대청 상부 가구 형식은 5량가로 종보 위에 판대공이 세워져 종도리를 받고 있다.

 

 

 

 

청계 김 진 선생과  아들 오형제

 사빈서원은 원래 안동부 임하현 경출산에 있던 청계(靑溪) 김진 선생의 분암을 숙종 원년(1675)에 확장하여 선생의 유상을 봉안하고 사빈영당이라 하였다. 이를 숙종 11년(1685) 사림과 내.외손들이 합의하여 선생을 주향으로 그리고 다섯 자제인 약봉(藥峯) 김극일, 귀봉(龜峯) 김수일, 운암(雲巖)  김명일, 학봉(鶴峯) 김성일, 남악(南嶽) 김복일을 배향하고 묘호를 경현사라 하였다.  숙종 35년(1709)에 동구 밖 사수가로 이건하여 사빈서원이라 하였다가 고종 5년(1868)에 서원 철폐령으로 훼철 되었고, 고종 19년(1882) 사림과 本孫들에 의해 복설되었으나 1989년 임하댐 건설로 인하여 임하면 사의리에서 현 위치로 이건 했다.

 

* 청계 김 진(金  璡/1500-1580), 사빈서원에 제향
字는 영중(瑩仲)이고 호는 청계(靑溪)로 의성인이다. 안동부 임하현 천전 내앞에 정착한 증(贈) 승지 김예범 공의 아들로 중종 20년(1525)에 사마시에 합격하였다. 성행이 엄정하고 후진 교도에 전력하여 부암서당과 임천서당을 창건하였다.  시속(時俗)에 구애받지 않고 직정으로 행의하여 아들 오형제를 퇴계 이황 선생 문하에서 수학케하여 아들 삼형제는 문과, 두형제는 소과에 급제하여 천전파의 문호를 크게 열고 유림대가의 터전을 닦았다. 뒤에 자헌대부, 이조판서 겸 지의금부사로 증직되었다.

김진과 아들 5형제가 모두 과거에 급제하여 "六父子登科之處", 五龍之家"라 한다.

그의 영정은 1572년(선조5)당시 73세 때 그려 졌으며, 보물 제1221호로 지정되었다.

 


① 약봉(藥峯) 김극일(1522-1585) 

字는 백순(伯純)이고 호는 약봉(藥峯)이다. 청계 선생 의 맏아들로 태어나 글을 배운 뒤로 경인구를 지어 신동이란 칭이 있었다. 성장해서는 퇴계선생에게 네 아우와 함께 수학하여 사문의 장허를 받았고 사림의 중진이 되어 세상에서는 김씨오룡이라는 칭이 있었다. 명종 원년(1548) 문과에 급제하여 밀양부사, 성주목사, 사헌부장령, 내자시정을 역임하였다.

의성김씨 종택,임하면 천전리 내앞마을 소재(보물 제450호) 

 

 

②귀봉(龜峯) 김수일(1528-1583)

字는 경순(景純)이고 호는 귀봉(龜峯)이다. 명종 10년(1555)에 생원시에 합격하고 유일로 천거되어 자여도찰방에 임명되었다. 임하 부암에 정사를 짓고 학문에 힘썼다. 아들 운천 김용 은 이조판서에 증직되었다.

귀봉종택은 임하면 천전리 내앞마을 소재(경북민속자료 제35호) 

 

 

③운암(雲巖) 김명일(1534-1570), 사빈서원 제향 

字는 언순(彦純)이고 호는 운암(雲巖)이다. 일찍이 소수서원에 가서 글을 읽었는데 금계(錦溪) 황준량 선생이 한번 보고서 대성을 예견하였고, 퇴계선생에게 나아가서도 선생이 손수 잠명(箴銘)을 써 주시며 기대하였다. 명종 19년(1564)에 아우 문충공과 남악공 삼형제가 동방으로 사마시에 삼체연방함으로 세인의 칭송을 받았다. 그러나 문과에 응시하고자 서울로 갔다가 병환이 위중하여 급거 환향중 용인군 김양역에서 돌아가셨다. 운암종택은 임하면 신덕리 소재(경북민속자료 제50호)

 

 

④학봉(鶴峯) 김성일(1538-1593)

字는 사순(士純)이고 호는 학봉(鶴峯)이다. 퇴계선생의 문인으로 선생께서 행고학정함을 칭찬하여 심학연원(心學淵源)을 병명(屛銘)으로 써주었다. 27세(1564)때 진사시에 합격하고 선조 원년(1568) 31세로 증광문과에 급제하여 사은사의 서장관으로 명나라에 가서 종계변무를 위해 노력하였으며 나주목사를 거쳐 경상도관찰사에 이르렀다. 일본에 사신으로 가서는 직절불굴하였으며 임진왜란때는 경상도초유사로 많은 공을 세웠다. 퇴계선생의 학통은 선생을 거쳐 경당(敬堂) 장흥효, 갈암(葛庵) 이현일, 대산(大山) 이상정, 정재(定齋) 류치명, 서산(西山) 김흥락으로 전해졌다. 예학에도 밝아 상례고증을 편찬하였다. 선무원종공신 일등에 책록되고 숙종 5년(1679)에 이조판서에 증직되었으며 문충공의 시호를 받았다.

학봉종택은 서후면 금계리 소재(경북기념물 제112호)

 

 

⑤남악(南嶽) 김복일(1541-1591), 사빈서원 제향 

字는 계순(季純)이고 호는 남악(南嶽)이다. 명종 19년(1564)에 진사시에 합격하고 선조 3년(1570)에 문과에 급제하여 울산군수, 창원부사, 단양군수,풍기군수 등 목민관으로서 많은 치적을 남겼으며, 봉산서원에도 제향 되었다.

남악종택은 예천군 용문면 구계리 소재 (중요민속자료 제248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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