웅부안동(雄府安東)/임하면

호계서원 답사

자즐보 2011. 3. 12. 00:34

답사일 2011.3.11

 

 

호계서원(虎溪書院)

시도유형문화재 제35호


안동 지방의 대표적인 서원으로 1575년(선조 8) 지방사림들이

안동부 동북쪽 여산촌 오로봉 아래에 있는 백련사절터에 여강서원()을

세워 퇴계 이 황 선생의 위패를 봉안하고 도학을 강론하였는데,

1605년(선조 38) 대홍수로 인해 유실되어 중창하였다.

1620년(광해군 12) 이황의 큰 제자인 서애 유성룡, 학봉 김성일의 위패를

추가 배향하였다. 1676년(숙종 2) 사액을 받고 ‘호계’로 이름을 바꾸었다.

대원군의 서원철폐령 때 훼철되었다가 7년 뒤에 강당만 새로 지었으며,

원래 월곡면 도곡동에 있었으나 안동댐 건설 수몰지구로

1973년 현위치로 이건하였다.

 

현재 이황은 도산서원, 김성일은 임천서원, 유성룡은 병산서원으로

각각 위패를 옮김으로써 지금은 강당만 남아 있는데,

이곳에서 매년 1회 당회()를 개최하고 있다.

 

 

 

호계서원 뒤로 임하댐 본댐이 보인다.

 

 

호계서원은 정면5칸 측면3칸 7량가의 구조에

‘ㅡ’자형 집이나 양 끝 칸의 지붕은 맞배로 꾸며서 흡사 날개집 지붕과

같아 보이는 ‘工’자형 지붕으로 꾸며 보기드문 건물이다.

 

 

호계서원 현판 

 

 

호계서원의 강당 "숭교당" 

 

강당 동편 "사성재" 

 

강당 서편 "주경재" 

 

 

호계서원의 측면 3칸

 

서원의 뒷편 

 

안쪽에서 본 호계서원 출입문

호계서원의 연혁에 대하여 영가지는 이렇게 적었다.

<여강서원>은 안동부의 동쪽 여산촌에 있는데 곧 백련사 옛터이다.

만력(萬曆) 을해년에 창건하였으며 병자년(1576년) 봄에

증 영의정 문순공 퇴도 이 황선생을 봉안하였다.

 

묘는 6칸인데 이름은 존도사이며 신문 3칸, 신주 5칸,

당 15칸을 숭교당이라 한다. 동협실은 사성재, 서협실은 주경재인데

동재 4칸을 구인재, 서재 4칸을 명의재, 대문 1칸은 진학문이다.

그리고 동몽재 15칸, 유사방 5칸, 주사 10칸에 보상고 15칸이 있다.

서원의 이름은 백담 구봉령이 현액한 것을 정자 홍사제가 글씨를 썼다.

서애가 위패 봉안 제문(祭文)을 지었다.

<아아! 퇴계 선생의 道는 높고 德은 순전하여 청순한 기질로

혼자 천리를 터득하셨네. 정예한 학문은 오묘하게 전현과 계합되고,

참된 앎을 역천하여 징분질욕하고 개과천선하며

만가지 이치를 모아 하나의 진리로 귀일시켰으며

바다에서 흐르는 것 같도다> 하였다.


학봉-서애 400년 서열 다툼 종식 `후폭풍'
.400년 가까이 후학과 후손들이 치열한 다툼을 벌여 온 학봉 김성일(1538~1593)과

서애 류성룡(1542-1607)의 위폐 서열 문제가 최근 두 가문 종손의 합의로 일단락된

것과 관련해 이의가 제기되는 등 논란이 일고 있다.

최근 안동시는 곧 복원작업에 들어갈 호계서원(안동시 임하면)에서 퇴계 이황의 위패를 중심으로

상석인 왼쪽에 누구의 위폐를 모시느냐를 놓고 두 가문의 종손이 모여 서애(류성룡)의 위폐를

상석에 두기로 합의했다고 밝혔다.

호계서원은 퇴계 이 황 선생이 세상을 떠난 직후인 1573년 제자들이 세운 것으로,

퇴계의 수제자인 학봉 김성일과 서애 류성룡이 모두 세상을 떠난 뒤인 1610년대부터

수제자 두 사람 중 누구의 위폐를 윗자리에 모실 것인가를 놓고 후학들이

수 백년동안 치열한 신경전을 벌여왔다.

맨 처음 이들의 서열이 정해진 건 1620년대로 당시 서애의 제자이자 대학자였던

우복 정경세(1563~1633)가 벼슬의 높낮이로 정해야 한다면서 서애 류성룡의 손을 들어줬다.

서애 류성룡은 임진왜란 당시 지금의 국무총리인 영의정으로 활동하면서

국난 극복에 공을 세운 인물이며 학봉 김성일은 임진왜란 때 지금의 도지사급인

경상우도 초유사, 관찰사 등을 맡아 활약하다가 병을 얻어 세상을 떠났다.

학봉의 후학들은 그러나 자기 스승이 서애보다 나이도 4살 더 많고 학식도 뛰어난 데도

벼슬이 낮다는 이유로 아랫자리에 머무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 반발했지만

상대적으로 학파의 세력이 약했던 시대 상황에서 어쩔 수 없이 따라야 했다.

그 뒤 200년 가까운 세월이 흐르는 동안 두 세력간 역학 구도의 변화와 함께

엎치락 뒤치락하는 모습을 보이면서 급기야 1800년대 초에 임금에게 상소까지 올리게 되지만

한 치의 양보도 없었던 양측의 대립으로 결국 결론을 내지 못했다.

그 일이 있은 직후 서애 류성룡의 위패가 호계서원을 떠나 병산서원으로 옮기게 되면서

사실상 두 위패의 불편한 동거는 막을 내렸다.

따라서 최근에 두 가문의 종손이 위패 서열 문제를 논의한 것은 약 200년 만의 일로

400년 전에 촉발된 긴 다툼에 종지부를 찍는 듯 했다.

그러나 종손들의 이 같은 합의가 부적절했다는 비판의 목소리가 나오면서

이 문제가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고 있다.

우선 서원에서 위패를 모시는 것은 학문의 전당에서 행해지는 사제간의 일로

특정 가문이 나설 일이 아니라는 지적이다.

경기문화재연구원 윤여빈 전문위원은 "두 가문의 종손이 무슨 자격으로 그런 결정을

내렸는지 모르겠다"라며 "수 백년간 갑론을박하며 나름대로 자존심을 지켜 온

양측 유학자들에게는 모욕이 될 수 있다"라고 말했다.

성균관 관계자도 "전후 사정은 잘 모르겠지만 서원에서 위패를 모시는 일을 후학이 아닌

가문 사람들이 논의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잘라 말했다.

현실적으로 두 가문 종손의 합의를 인정한다 하더라도 결국 벼슬의 높낮이로 사람을 평가하는

결과를 낳은 것 아니냐는 비판이 거세게 일고 있다.

윤여빈 전문위원은 "이번 합의는 1620년대 우복 선생의 결정을 그대로 따르겠다는 것이나

마찬가지"라며 "결국 관찰사보다 영의정 벼슬이 높다는 이유로 서애를 윗자리에

모시겠다는 얘기밖에 안 된다"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는 "서원에서 위패의 소목(昭穆:신주 모시는 차례)은 배우는 학생들의 모범이 되는 선생님을

순서대로 모시는 것"이라며 "학덕, 연령, 국가에 대한 공로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해야지

단순히 벼슬 높낮이로 구분하는 것은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라고 덧붙였다.

그는 또 "병호시비(서애의 병산서원, 학봉의 호계서원간 시비)라는 이름으로 유학의 본향인

안동지역에서 수 백년간 전개돼 온 이 다툼은 단순히 자존심만을 내세운 것이 아니라

양측의 선의의 경쟁을 유도하면서 역사의 한 단면을 장식해 왔다"라며 "그 자체로 의미가

있다고 할 수 있는데 굳이 지금 와서 서열을 정한다는 것은 이해할 수 없는 일"이라고 말했다.

학봉(의성 김씨)의 후손인 김모(67.안동시)씨도 "지금껏 두 가문이 각자 두 분을 잘 섬겨왔는데

또다시 서열을 따지게끔 만들 필요가 뭐 있느냐"라며 "후세들에게 사람은 지위의 높고 낮음으로

평가된다는 인식을 심어줄까 봐 적잖이 걱정스럽다"라고 말했다.

이 같은 논란과 관련해 안동시 관계자는 "유림측에서 호계서원 복원을 추진하면서

나름대로 위폐 서열을 정리를 할 필요를 느꼈던 것 같다"라며 "서원 복원까지는

많은 시간이 남아 있는 만큼 앞으로 제기되는 문제들은 신중하게 검토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방치한 상태의 호계서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