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대구여행*문화탐방/구미시

금오산1

자즐보 2012. 6. 17. 21:26

 

 

 

금오산 [金烏山]

 

높이 976m. 소백산맥의 지맥에 솟아 있으며 산정부는 비교적 평탄하나

기암괴석이 조화를 이룬 급경사의 바위산이다.

 

본래는 대본산(大本山)이었으며 외국의 사신들이 중국의 오악(五岳) 가운데

하나인 숭산(崇山)에 비해 손색이 없다 하여 남숭산(南崇山)이라 불렀다가

당의 대각국사에 의해 금오산으로 불리게 되었다.

 

산 능선은 '왕'(王)자 같기도 하며, 가슴에 손을 얹고 누워 있는 사람의 모습과도 비슷하다.

산정에는 고려시대에 천연의 암벽을 이용해 축성한 길이 3.5㎞의 금오산성이 있으며,

임진왜란 때는 왜적을 막기 위한 내외성(內外城)으로도 이용되었다.

 

산 전체가 급경사를 이루며, 좁고 긴 계곡이 굽이굽이 형성되어 예로부터

명산으로 알려졌고 영남팔경의 하나로 불리고 있다. 또한 유서깊은

문화유적이 많아 1970년 6월 1일 우리나라 최초의 도립공원으로

지정되었으며, 자연보호운동의 발상지이기도 하다.

 

계곡 입구에는 금오산 저수지와 고려말 충신 길재의 충절과 덕을 추모하기

위해 지은 채미정(採薇亭)이 있으며, 북쪽 계곡에는 높이 27m의 대혜폭포(명금폭포)와

의상이 수도했다는 도선굴이 있다. 해운사·대각사·진봉사 등의 고찰과

금오산마애보살입상(보물 제490호)을 비롯해

정상인 현월봉 바로 아래에는 약사암이 있다..

 

 

산행코스:금오산 주차장(2천넝) → 매표소 → 케이블카시점 → 금오산성 → 도선굴 → 대혜폭포

 → 할딱고개 → 마애보살입상 → 정상 → 약사암 → 법성사 → 주차장 // 5시간 소요

 

 

 

금오산 도립공원 탐방안내센터, 예서부터 산행 시작...

 

 

 

자연보호운동발상지 표지석 

 

 

 

케이블카 시점

 

 

 

 

 

케이블카를 타고 가면 편하겠따만...

 

 

돌탑 21C

*위 치 : 금오산 케이블카 시점∼해운사 밑 영흥정간 등산로변
*형 태 : 원형 또는 사각 피라밋형 - 중소형 (저폭 2m, 높이 3.5m 정도) : 19기
- 대 형 (저폭 5m, 높이 10.0m 정도) : 2기
*축조방법 : 등산로변에 흩어진 구르는 돌을 수거 축조하여 안전성과 미적 감각을 부여하고
정밀하고 정교한 축조로 영구보존 가능: 금오산을 찾는 탐방객에게 볼거리 및
휴식공간을 제공하고 21세기의 힘찬 전진 이미지를 구현함.

 

  

 

 

 

 

 

 

금오동학(金烏洞壑) 

외성과 케이블카 승강장 중간지점의 북편 낮은 절벽에 '금오동학(金烏洞壑)'이라고
        하는 큰 글씨가 새겨져 있는데 보는 이로 하여금 위압할 만한 큰 글자로, 그 뜻은
                "금오산의 깊고 그윽한 절경"이란 뜻이니 선산의 대망(大網)출신으로
덕산(德山) 사람인 경주부윤(慶州府尹) 상정 황필(橡亭 黃筆)의 손자이며
진사(進士) 황옥(黃沃)의 아들인 고산(孤山) 황 기로(耆老) 선생이 쓴
초서체 글씨로 문화재적 가치가 충분히 있으나 세월의 풍마우세(風磨雨洗)로
마모되어 판독조차 어려우니 보는 이로 하여금 안스러움을 짓게 한다.

 

 

 

 

 

 

 

금오산성(金烏山城,경북 기념물 제67-1호)

금오산의 정상부와 계곡에 이중으로 축조한 산성으로

이 성은 외성이며 길이 약 3,700m이다.

 

 

외성의 대혜문(大蕙門)

 

 

문 천정에 용그림 

 

 

 

 

 

 

 

 

영흥정(零興井)

 

 

 

 

해운사(海雲寺)

해운사는 근세(1925년 4월 20일)에 창건된 절로써 대혜폭포 북서쪽의
언덕받이에 위치하고 있으며 관음보살 좌성에 칠성탱화 등이 유존하고 있고,
 일구의 석조나한상도 있다. 해운사 절 안내문에 의하면
신라말 고승 도선이 대현사라는 절을 창건(서기 827〜898)하였으나
임진왜란때 소실되어 철화스님이 현재의 해운사를 복원했다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도선굴(道詵窟)

암벽에 뚫려 있는 천연동굴로 큰 구멍이라는 뜻으로 대혈(大穴)이라고 하며,

 신라 말 풍수의 대가인 도선이 참선하여 득도한 곳이라 하여 도선굴이라고 한다.

 

대혜폭포에서 병풍처럼 펼쳐있는 벼랑을 끼고 북으로 따라 가노라면
쇠사슬로 만든 난간을 손잡이로 하여 간신히 발붙일 수 있도록 약간은 다듬은 듯한
흔적이 있는 천길 벼랑 중간을 붙어 오르다 보면 해운사가 발아래 가물거리고
다듬은 길이라 하나 몇 번이고 숨을 가다듬어야 한발 한발 내디딛을 수 있으니
오뉴월 삼복더위 때도 소름이 끼치니 납량에는 다시없는 곳이기도 하다.

구미공단과 낙동강하며 멀리 해평의 냉산등도 한 눈에 들어오는 조망이라,
그것이 바로 극치의 풍경이라 하겠다. 수억만년의 기나긴 세월에 풍마우세로
시달리다 못해 움푹 패인 천연동굴로 이따금씩 박쥐나 새들이 쉬어 가는 곳을
신라 말 도선이라는 고승이 이곳을 어떻게 알고 찾아들어 참선하여
도를 깨우쳐 우리나라 최초의 풍수지리설의 창시자가 되었다고 한다.

그 후 언제부터 도선굴이라고 불렀는지는 알 수 없으나
최인재 선생의 일선지에 의하면 넓이가 16척, 높이가 15척,
안으로 깊이가 24척으로 그 안에 구옥(얽어만든집)이 두칸이었다 하여
내부가 30평은 됨직하고 임진왜란 때는 인동, 개령의 수령과 향민5~600명이
피난했으며 왜군은 빤히 보고도 범접을 못했다 하며 통로가 개설되기 전이라
바위틈에 가느다란 쇠못을 박고 칡이나 등 • 넝쿨을 휘어잡고 올라갔다 하며,
일선지에도 도선굴이라 했으니 조선조 초부터 이름이 불려졌으리라 추측된다.
고려 때는 아마 대혈, 즉 큰 구멍이란 뜻으로 불렀던 것이 굴 아래 대혈사라는 절이
있었다 했으니 여기서 연유된 것이 아닌가 생각되기도 한다. 또한 현재의 통로와
쇠사슬 난간은 일제초 구미면장 김승동씨에 의해 개통되었다 한다.

 

 

 

 

  

 

 

 

대혜폭포(명금폭포)

대혜골의 중간지점 해발 400여m 지점에 위치하는 폭포로
높이가 28m인 이 폭포는 수직으로 떨어지는 물의 위력은 금오산을 진동시키고도
남는다. 금오산을 소금강이라 하는 것도 폭포 주변의 경관이 크게 한 몫을
차지했으리라. 주변의 기암괴석의 천애벼랑이 병풍처럼 에워싼 유곡에
짚동같이 쏟아지는 물소리며, 물보라에 7색 무지개가 하늘높이 솟아오르곤 하여
보는 이로 하여금 여기가 바로 신선계라는 착각에 빠지게 하는 곳이다.
 
삼복더위 때 폭포 물을 맞으면 땀띠가 싹 가신다고 하고 견비통이나 요통이 있으면
물을 맞아 치유했으니 요사이 성행하는 물리요법의 극치라, 그래서 30~40년 전에는 부녀자들의 물리치료장이 되어 남정네는 감히 범접을 못할 때도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겨우내 대혜골에서 흐르던 물이 절벽에 얼어붙어 고드름이 되는데
초봄까지 병풍같은 벼랑에는 옥색수정 발을 친 듯 신비롭고 웅장한
천상 궁궐을 연상케 하는 또 하나 신비의 극치를 이룬다.
웅장한 신비의 대자연 속에서 자신을 잊어버리고 자연과 일체되어
그저 조물주의 조화에 감탄하게 된다.  

 

 

 

 

 

여기서 부터 할딱고개이다...

가파른 경사길이라 할딱거리며 올라야 했지만

지금은 나무계단을 설치하여 많이 수월한 편이란다. 

 

 

 

 

* 2편에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