웅부안동(雄府安東)/서후면

안동김씨 태장재사

자즐보 2010. 12. 4. 00:53

답사일:2010년12월3일

 

 

안동김씨 태장재사

 

이 건물은 안동김씨 시조 태사 김선평公의

단소를 지키고 봉재를 지내기 위한 재사이다.

재사 가까운 지역에는 신라시대부터 천태암이 있었다고 한다.

 

제단을 설치한 이후 단소 동쪽 100보 내에 숙종 37년(1712)경 소옥을 지었다가

영조25년(1749)재사를 확장하였으나 식수난과 질병이 겹쳐 사헌부지평 양근公이

경향각처의 뜻을 모아 현위치에 승려의 집을 철거하고 터를 닦아

정조17년(1793)에 28칸을 중건하고 익실과 문루를 옮겨 지었다.

1913년 주사를 현위치에 확장하여 10칸을 중건했고

1960년 풍수해를 당해 재사를 보수했다.

 

'ㅁ'자형의 재사와 'ㅡ'자형의 이상루, 'ㄷ'자형의 관리사로 구성되어 있으며,

재사에는 재수를 준비하는 유사실과 전사청, 그리고 참제원실이 있다.

이 지역 재사 건물 가운데서도 규모가 크고 각 부분이 용도에 따라

명확히 구분되어 있는 건물로 매년 음력 10월 10일에 묘제를 지낸다.

 

 

태장재사 전경

 

 

 

 

이상루(履霜樓)

 

"서리를 밟으며 새벽 일찍 조상을 섬기기 위해 움직인다"라는 뜻

 

정면 7칸 측면 2칸의 "ㅡ"자형 다락집으로 화려한 팔작지붕이다.

중앙에 큼직한 문이 있고,  문을 열고 들어서면 내정으로 향하게 되어 있다.

중심이 되는 기둥은 팔각형인데 주춧돌이 작아서 매우 불안하게 느껴진다. 

누(樓)의 전면은 문을 달아 폐쇄하였으며,

안쪽면은 개방하여 누마루가 들여다 보이도록 하였다.

 

여름밤 솔향기 가득 머금은 이상루에서 열리는 음악회는

색다른 정취를 느낄 수 있다...

 

 

이상루의 전면

 

 

이상루의 안쪽

 

 이상루의 누마루

 

 

이상루 1층 중앙의 출입문과 팔각기둥, 주춧돌

 

 

이상루 전면의 판문(들어열개문)과 계자난간을 두른 툇마루

 

 

이상루에 걸려 있는 북

매년 제사 때 참석자들에게 알리미 역활을 한다

 

 

태장재사

 

 

 

 

재사는 용도에 따라 구분을 하고 문패를 붙여두었다.

 

 

관리사

 

 

이상루 앞 연못

 

 

묘단으로 가면서 본 태장재사의 측면

 

 

 

 

김태사 묘단

 

[고창비고]에서 "태사공의 墓는 안동시 서후면 태장동 천등산 왼쪽 기슭에 定座하여 있으되 失展(잃어버림)되었다가 조선 인조4년(1624)에 {府西十餘里天燈山左麓有峰曰台莊}이라고 기록된 여지승람에 의거하여 墓壇을 설치하였다. 그 상세한 전말은 "태사묘단기"와 "신도비"에 기록되어있다.

 

  왜 묘소(墓所)라 하지 않고 묘단(墓壇)이라 하는가?
  始祖(시조) 태사공의 무덤이 墓所(묘소)가 아니고 墓壇(묘단)인 이유는 {神道碑銘 序}에서 밝힌바와 같이
  失展(실전)되어 오다가 조선 인조4년(1626) 墓壇을 설치하게 되었는데, 그 내력이 묘단기에 기록되어 있다.

   

 

 始祖의 墓所가 失展된 원인
 1. 고려 때는 많은 外侵으로 백성들이 戰亂에 시달리며 살기에 급급한 나머지 조상들의
     묘소를 省墓할 여가가 없어서 墓所를 잃어버렸을 수 있을 것으로 추측된다.
 2. 당시에는 문맹자가 많아 世系의 기록도 소홀했을 것이고, 기록해 두었다 하더라도 戰亂에 시달리다보니

     기록마저 잃어버릴 경우가 많았을 것이다.
 3. 조선 태조 이성계가 易姓革命으로 朝鮮을 개국하여 백성들에게 고려조를 금기시 했고, 고려조의 녹을
     받고 충성해도 그 조상들의 묘소의 참배나 성묘까지 엄하게 막았을 것이다.
 4. 족보의 시작은 조선 중기에 와서 시작된 것이기에 수백년의 歲月이 흐르다보니 조상에 대한 기록이나
    기억들이 윗대로 갈수록 확실치 못하거나 잃어버린 경우가 많았을 것이다.

   이상의 원인들로 인해 어느 성씨를 막론하고 교려조 이상의 조상을 잃지 않음이 없는 실정이다.

<안동김씨 안동화수회>

 

묘단으로 오르는 돌계단

 

묘단전경

 

 

묘단

 

"삼한벽상삼중대광아부공신김선평제단"

 

公의 묘택(墓宅)이 오래되어 그 곳을 잃었으나 승람에 "부서(안동의 서쪽) 고태장리에 있다" 기록되이 있어 증조 문정공부군이

일찍이 여러 종인을 거느리고 두루 다니며 찾고 글을 지어 천등산에 빌기까지 하여으나 결국 찾아내지 못하였더라.

부서 십여리에  태장봉이 있으니 곧 천등산의 좌록(左麓)이다. 그 아래 당동(堂洞)이 있는데 촌인(村人)들이 모두 태사묘동(太師墓洞)이라 함으로 숭정정병인년에 종인(宗人) 김인 등이 그 이름을 가지고 그곳에 가서 찾음에 신성(申性)이 누세(累世)를 장사지내고 그 가운데 한 무덤 뒤 십여보에 고총(古塚)같은 것이 있어 평평하게 되었으나 계체가 둘려 있고 윤곽을 분별할만하니 대체 큰 무덤같고 그 형국과 안대(案對)가 또 고적(古蹟)및 향부노(鄕父老)의 기록한 바와 팔구는 맞으며, 또 듣건데 신성(申性)이 장사할 때 두 고총(古塚)을 다른 곳에 묻고 체하에서 또 지석(誌石) 같은 것이 나와 감추었다 하니 더욱 의심스럽다. 이에 여러 종인(宗人)이 그 일을 관에 송(訟)함에 관에서 체문(逮問)하고 그 발총(發塚)하던 상황을 알아 곧 파보았으나 돌을 찾지 못하여 증빙(證憑)하지 못하고 관에서도 또한 그 일을 마무리하지 않아 그만 두고 말았다. 어떻게 할 수 없어 의논하기를 우리 태사께서 공업(功業)이 나려(羅麗) 때에 있으시어 이름은 역사에 드러나고 공덕(公德)은 향방(鄕方)에 베풀어졌으므로 자손이 음덕(陰德)을 받아 번성하나 묘소(墓所) 있는 곳을 몰라 여러 백년(百年)을 지나도록 향사(享祀)도 못하고 지금 다행이 진조(眞兆)를 얻을 번 하여으나 간인(奸人)이 도점(盜占)하여 영역(塋域)을 훼상(毁傷)하고 비판(碑版)이 민멸(泯滅)하여 마침내 그 사실을 증빙하지 못한 채 봉축(封築)하니 통심절수(痛心疾首)하여 어떻게 추원(追遠)하는 효사(孝思)를 위로할 것인가. 옛날 제사에 무덤을 바라보고 단(壇)을 만든 일이 있으니 지금 만약 본떠서 만들어 후세의 사람으로 하여금 체백(體魄)이 계신곳을 짐작하고 밭 갈거나 나무하지 못하게 하면 예(禮)에 혹 맞을 것이라 하니 모두 그렇다 하고 드디어 모년모월 모갑자에 동중(洞中)에 터를 닦고 단(壇)을 만들어 제사 지내니 종인(宗人)이 모두 모이고 이로부터 춘추(春秋)로 향사(享祀)함에 상총의(上塚儀)와 같이하고 영구히 준행할 것을 기약하며 또 단측(壇側)에 입비(立碑)하고 그 일을 새기어 후세에 깊이 전할 것을 꾀함에 백부께서 창협(昌協)에게 그 본말을 갖추어 적어 입언자(立言者)의 채록(採錄)에 대비하라 명하시기에 삼가 이와 같이 쓴다. 후손 창협은 記하다.

 

 

동편 문인석

 

동편 무인석

 

 

서편 문인석

 

서편 무인석

 

 

문인석 이야기

 

1. 세월이 흘러 흘러 수백년을 이어 오고

탄탄했던 내 몸에도 검버섯 피어 오고

시야는 흐려져 가끔씩 찾아 오는

후손 얼굴도 알아 보지 못하지만

내 맡은 시조 지킴이 한 점 흔들림 없어

굳건한 기개 알아주는 이 몇만 있다면

외롭지 않을 터 오늘은 두 명의 후손들이

찾아와 주니 앞의 벗과 고운 미소 지어 보겠네

 

2. 자네 말처럼 수백년 흘러 흘러

굳건한 기개 지키는 것

나 또한 소홀함이 없지 않은가

시조 모심에 한 점 소홀함 없어야 하나

후손들이 가끔 자네와 나의 자리를

바꾸어 주면 어떨까 생각해 보네

자넨 일출만 보고 나는 일몰만 보니

어디 한번 자리 바꿔 수백년 더 지켜 보세나

 

-어느 사진가가 쓴 글-

 

 

산신제단

 당시 먼저 있던 산의 신령들에게도

예를 잃지 않고 음식을 나누어 바칠 수 있는 장소

 

 

묘단 위쪽에서 본 전경

 

 

김태사신도비각

 

 

안동김씨 시조가 된 김선평公

安東金의 始祖 太師公은 신라종성(宗姓:왕실의 성) 金이며 휘(諱:이름) 선평 (宣平)이다. 신라 효공왕 5년 흥덕궁에서 태어나셨고, 공은 봉의 눈과 용의 수염, 별의 정기와 호랑이의 위엄을 갖추었다.

 

춘추 26세에 고창(古昌: 안동)의 성주(城主)가 되었는데 그때나 지금이나 지리상 중요 성(城)에 26세의 젊은 성주였다면 필시 진골(眞骨)이었을 것이니 효공왕의 왕자(王子)로 추정된다.  신라말 경애왕때 고창군(古昌郡: 안동)의 성주(城主)로 서기 927년(신라 경순왕 원년)에 후백제의 견훤이 신라 경애왕을 살해하자, 930년(경순왕 4)에 권행(權幸:안동권씨 시조), 장정필(張貞弼:안동장씨 시조)과 함께 향병(鄕兵)을 모으고 왕건을 도와 고창(안동)군에서 후백제(後百濟)의 견훤군(甄萱軍)을 토벌하여 병산대첩(甁山大捷)의 전공을 세웠다. 왕건이 고려를 개국할 무렵 그 전공으로 城主 김선평公은 대광(大匡), 권행과 장길은 대상(大相)벼슬을 받았고 [三韓壁上功臣三重大匡太師亞父]의 관작칭호를 받았다. 安東金은 이 때부터 본관(本貫)을 안동(安東)으로 하였다.

 

 

 

 

안동김씨 중앙화수회가 발간한 [고창비고]에는 "우리 안동김씨의 시조 태사공은 신라 효공왕 5년(서기901년)흥덕궁에서 출생하셨다. 봉의 눈, 용의 수염에 별의 정기, 범의 위엄으로 신라말 고창의 성주가 되셨다. 신라 경순왕 4년 (고려태조13년, 서기930년)에 고려 태조가 고창군병산(군의 북쪽10리쯤, 일명 가수천)에서 후백제왕 견훤과 싸워 견훤을 패주케하고 견훤의 장졸 8000여명을 함몰시켰다. 그 당시 태사공은 城主로서 권행,장길 公과 더불어 고려태조 왕건을 도와 큰 공을 세웠다.

 

 


그 전공으로 城主 김선평공은 대광(大匡), 권행과 장길은 대상(大相)벼슬을 받았고 [三韓壁上功臣三重大匡師亞父]의 관작칭호를 받았다. 그러한 연유로 安東은 安東金씨의 관향(本貫)으로 정해졌고 안동부민들은 삼공신의 공덕을 기리고 찬양하기 위하여 부중에 廟를 세우고 춘추로 제향을 거행하여 義行을 추모하며 오늘에 이르고 있다. 太師廟는 안동시 북문동에 위치한다"고 적고 있다.

 

 

 

안동김씨는 태사공 宣平이후 습돈(習敦)을 1세조로 하여 世系를 이어오면서 10世원손(遠孫) 계행(係行10世)이 조선 성종 때 대사간에 오른 것을 기점으로 명문의 기틀을 다지고 왕실의 외척이 되어 세도가문의 지위를 굳혔다.

계행(係行,10世)의 종손 영(瑛)은 중종(中宗)때 무오사화(戊午士禍)에 화를 입은 사람들의 억울함을 상소하여 신원(伸寃)케 했으며, 그의 아우 번은 공조 정랑(工曹正郞)을 거쳐 평양서윤(平壤庶尹)으로 나가 치적(治績)을 쌓았다. 광해군(光海君) 때 좌의정(左議政) 정유길(鄭惟吉)의 사위가 되었던  극효(克孝)는 번의 손자로 글씨에 일가를 이루었고, 그의 아들  5형제 중 장자(長子) 상용(尙容)과  막내 상헌(尙憲)이 뛰어났다.

   

 

일찍이 석학(碩學) 성혼(成渾)의 문하에서 학문을 연마한 상용(尙容)은 인조(仁祖) 때 우의정(右議政)에 올랐으며 병자호란(丙子胡亂)이 일어나자  원임대신(原任大臣)으로서 강화도에 들어갔다가 성(城)이 함락되자 입었던 옷을 벗어 하인에게 주며  이르기를 " 네가 만일 살거던 이 옷을 내 아이들에게 전하여 뒷날 허장(虛葬)하는 제구로 쓰도록 하라"하고 남문으로 가서 화약궤에 걸터 앉자 측근에게 "가슴이 답답하여 담배가 피우고 싶으니 불을 가져오너라"하여 화약에 불을 던졌다.  그의 손자 수전(壽全)의 나이 13세로 곁에 있었는데 종에게 안고 가라고 명하였으나 아이는 옷을 잡아당기며 울면서 "할아버지를 따라 죽겠습니다"하며 가지않아 종과 함께 모두 죽었다.

 

 

상용의 아우 상헌(尙憲15세)은 백부(伯父)인 대효(大孝)에게 출계(出系)하였으며 선조조(宣祖朝)에서 정시문과(庭試文科)와 광해군(光海君) 때 문과중시(文科重試)에 각각 급제하여 벼슬이 영의정(領議政)에 이르렀고, 궤장을하사(下賜)받았다.  그는 관직에 있는 동안 강직하기로 이름이 나서 관민들이 아예 부정할 것을 포기했다고 한다. 어느날 조회 때 장약관(掌藥官) 박시량(朴時亮)이 나라에서 금한 대분투(大分套 : 신을 보호하기 위하여 겉에 신는 덧신)를 신었으며 부자(富者) 역관(譯官) 장현(張炫)은 집을 짓는데 부연(附椽 : 장연 끝에 덧 얹는 네모지고 짧은 서까래)을 하다가 대사헌(大司憲)으로 있던 상헌이 옥에 가두자 시량의 처자가 영의정(領議政) 오윤겸(吳允謙)에게 가서 목숨을 살려 줄 것을 청하였더니 윤겸이 말하기를  "비록 내 아들이 법을 범하였더라도 김공은 용서하지 않을 것인데 어찌 감히 부탁할 생각을  하겠느냐"하며 마음으로 매우 불쌍하게 여겼지마는 끝내 구해주지 못했으며, 한 왕족(王族)의 공자(公子)가 산정(山亭)을  짓는데 나라에서 금한 둥근 기둥을 세웠다가 상헌이 대사헌이 되었다는 말을 듣고 곧  기둥을 깎아서 모나게 하였다고 한다. 상용(尙容)의 아들 광현(光炫)은 광해군(光海君)의 난정으로 과거를 단념했으나 인조반정(仁祖反正) 후 유일(遺逸)로 천거되어 연원도 찰방(連源道察訪)에 임명되었으나 부임하기 전에 정시문과(庭試文科)에 급제하였고, 청주 목사(淸州牧使)로 있으면서 아버지 상용(尙容)의 유지를 받들어 청(淸)나라 연호가 적힌 문서에는 서명을 하지 않았다.

한편 안동 김씨(安東金氏)의 재중흥을 일으킨 수증(壽增)·수흥(壽興)·수항(壽恒) 3형제는 우의정 상헌(尙憲)의 손자(孫子)이며 광찬의 아들들이다.  효종(孝宗) 때 생원(生員)으로 형조(刑曹)와 공조 정랑(工曹正郞)을 지낸 수증(壽增)은 숙종(肅宗)이 즉위하자 성천부사(成川府使)로 나갔다가 아우  수항(壽恒)이 송시열(宋時烈)과 함께 유배당하자 벼슬을 버리고 춘천(春川)의 곡운산(谷雲山)에  은거(隱居)했으며, 1655년(효종 6) 춘당대문과(春塘臺文科)에 급제한 수흥(壽興)은 숙종(肅宗) 때  영의정(領議政)에 올랐으나 기사환국(己巳換局)으로 남인이 집권하자 장기에 유배되었다가 배소에서 죽었다. 수항(壽恒)은 1660년(현종 즉위) 자의대비(慈懿大妃)의 복상(服喪)문제로 예송(禮訟)이 일어나자 송시열(宋時烈)과 함께 기년설(朞年說)을 주장했고, 우의정(右議政)을  거쳐 좌의정(左議政)을 지냈으며 영의정(領議政)에 올라 [현종실록(顯宗實錄)]편찬에 총재관을 지냈다.  안동김씨의 <육창(六昌)>으로 일컬어진 수항(壽恒)의 아들 6형제 중 맏아들  창집(昌集)은 숙종(肅宗) 때 영의정(領議政)을, 둘째 창협(昌協)은 대사간(大司諫)을 지냈고, 셋째  창흡(昌翕)은 성리학(性理學)에 밝아 학자로 명성을  떨쳤으며, 창업(昌業)은 문장(文章)과  도학(道學)으로 창집(昌緝  : 직장을 역임)·창립(昌立 : 사부를 역임)과 함께 가문을 중흥시켰다.  

이들 육창(六昌)의 인맥(人脈)을 살펴보면 첫째 창집(昌集)의 아들 제겸(濟謙)이 숙부(叔父) 창흡(昌翕)에게 수학하고 숙종말(肅宗末)에 증광문과(增廣文科)에 급제하여 우부승지(右副承旨)에 이르렀고, 손자 이소(履素)가 정조(正祖) 때 우의정(右議政)과 좌의정(左議政)을 역임한 후 영돈령부사(領敦寧府事)에 이르렀다.  한편 창집(昌集)의 현손 조순(祖淳)은 양관대제학(兩館大提學)에 올라 그의 딸이  순조(純祖)의 비(妃 : 순원왕후)가 되자 영돈령부사(領敦寧府事)로 영안부원군(永安府院君)에  봉해져서 철종(哲宗) 때의 안동 김씨 세도정치(勢道政治)의 기초를 마련했고 문장(文章)과  그림에 능했다.

이조 판서(吏曹判書) 명순(明淳 : 창집의 현손)의 아들 중 홍근(弘根)은  헌종(憲宗) 때 공조(工曹)와 병조 판서(兵曹判書)를 거쳐 좌의정(左議政)에 올랐으며, 응근(應根)은 여러 고을의 수령을 역임하고  형조 판서(刑曹判書)에 올랐다.

순조(純祖) 때 알성문과(謁聖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한 흥근(興根)은 홍근(弘根)의 아우로 헌종(憲宗) 때 예조 판서(禮曹判書)를  거쳐 철종(哲宗) 때는 좌의정(左議政)에 이어 영의정(領議政)에 이르렀고 고종(高宗)이 즉위하자 지실록사(知實錄事)로 [철종실록(哲宗實錄)] 편찬에 참여했다.

그외 창집(昌集)의 후손 중에서는 헌종(憲宗)의  국구(國舅)인 조근(祖根)이 영돈령부사(領敦寧府事)로 영흥부원군(永興府院君)에 봉해졌고, 철종(哲宗)  때 영의정(領議政)을 세 번 역임한 좌근(左根)은 좌찬성(左贊成)에 오른 병기(炳基)와 함께  이름을 떨쳤다.  

철종(哲宗)의 비(妃)인 철인왕후(哲仁王后)의 아버지 문근(汶根 :  인순의 아들로 이순에게 출계)은  돈령부사로 영은부원군(永恩府院君)에 봉해지고  몸이 비대하여   <포물대원군(包物大院君)>으로  별칭되었다.  대사성(大司成) 창협(昌協)의 인맥으로는  그의 손자 원행(元行)이  왕세손(王世孫)을 교육할 적임자로 영조(英祖)의 부름을 받았으나 소(疏)를 올려  사임하고 누차 벼슬에 임명되었을 때도  사양한 후 학문에 전력했다.  특히 그는 당시 성리학계(性理學界)의 2대 주류인 낙론(洛論)과 호론(湖論)의 논쟁에서 이간(李柬)의 낙론을 지지하여 주리(主理)와 주기(主氣)를 절충한 학설(學說)을 주장했다.  

그의 아들 이안(履安)도 아버지의 학문(學問)을 이어받아  학행(學行)으로 경연관(經筵官)에 천거되었고 당시 북학파(北學派)의 학자로서 홍대용(洪大容)·박제가(朴齊家)와 교유하며 실학연구(實學硏究)에 앞장섰다.  거창 부사(居昌府使) 인순(麟淳)의 아들 수근(洙根)은 헌종(憲宗) 때 대사성(大司成)과 이조 판서(吏曹判書)를 거쳐 선혜청당상(宣惠廳堂上)이 되고 병조(兵曹)와 형조 판서(刑曹判書)를 역임한 후 한성부  판윤(漢城府判尹)에 이르렀으며, 수근(洙根)의 아들  병학(炳學)은 고종(高宗) 때 실록총재관(實錄總裁官)으로  [철종실록(哲宗實錄)]을 편찬하고 조두순(趙斗淳)·이유원(李裕元)과 함께 [대전회통(大典會通)]을 완성했다.  병국(炳國)은 철종(哲宗)  때 훈련대장(訓鍊大將)과 고종(高宗) 때 이조 판서(吏曹判書)를  지내고 경복궁(景福宮)을 중건(重建)할 때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로 영건도감 제조(營建都監提調)를  지냈다.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 창흡(昌翕)의 후손에서는  <초계문신(抄啓文臣)>으로 뽑혔던  달순(達淳)이 우의정(右議政)에 올랐으며, 매순(邁淳)은 문장이 뛰어나서 홍석주(洪奭周)와 함께 <여한 10대가(麗韓十大家)>의 한 사람으로 손꼽혔다.  도학(道學)과 문장으로  이름을 떨쳤던 창업(昌業)의 후손에서는  그의 아들 신겸(信謙)과 윤겸(允謙)형제가 문장과 그림으로 유명했고, 양행(亮行 : 신겸의 아들)은 이조 참의(吏曹參議)를 거쳐 형조 참판(刑曹參判)을 지냈다.  

 


그밖의 인물로는 선천 부사(宣川府使) 익순(益淳)의 손자 병연(炳淵)이 조선의 이름난 시인으로 전국을 방랑하며  해학(諧謔)과 재치가 넘친 싯귀(詩句)로 세상을 풍자하는 작품을 남겼고, 한말에 와서는 농상공부대신(農商工部大臣) 명규(明圭), 궁내부대신(宮內府大臣) 종한(宗漢), 시종원경(侍從院卿) 병익(炳翊)과  독립투사로 3·1운동에 참가했던 가진(嘉鎭)이 뛰어났다.

 

 


                                                               

詠笠

 

영립

浮浮我笠等虛舟

一着平生四十秋

 

부부아립등허주

일착평생사십추

牧堅輕裝隨野犢

漁翁本色伴沙鷗

 

목수경장수야독

어옹본색반사구

醉來脫掛看花樹

興到携登翫月樓

 

취래탈괘간화수

흥도휴등완월루

俗子依冠皆外飾

滿天風雨獨無愁

 

속자의관개외식

만천풍우독무수

 

 개화혁명(開化革命)의 기수 옥균(玉均)과 한일합방(韓日合邦)의 울분으로 음독자결한 석진(奭鎭), 유림의 대표로  곽종석(郭鍾錫) 등과 함께 파리에 독립청원서를 발송했던 복한(福漢), 민종식(敏宗植)의 의병(義兵)에 가담했던 덕진(德鎭), 대한독립군단(大韓獨立軍團)을 결성하고 흑룡강(黑龍江)을 무대로 독립군 양성에 전력했던 좌진(佐鎭), 만주에서 재만 한족총연합회(在滿韓族總聯合會)를 조직하여 민족운동에 앞장섰던 종진(宗鎭) 등이 명문 안동 김씨(安東金氏)의 전통을 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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