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대구여행*문화탐방/청도군

용강서원*14의사묘정비*용강지*용연정

자즐보 2012. 2. 25. 02:20

 

 

용강서원*14의사묘정비(龍岡書院*14義士廟庭碑)

 

청도군 이서면 학산1리(모산)에 위치,경북문화재 제129호.

 

이곳은 밀양박씨의 현조인 충숙공(忠肅公) 박익(朴翊,1332~1398)과

임란 14의사를 제향하고 후진을 양성하기 위해 건립된 서원이다.

 

용강서원은 1868년(고종 5년)에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에 의하여 훼철되고

 

 

용강서당으로 개칭하였고, 그 후 여러번의 중수를 거쳐 오늘에 이르고 있다.

 

임진왜란 때 망우당(忘憂堂) 곽재우 등과 연합하여 의병을 일으켜

청도, 밀양, 경산 등지에서 왜적들에게 큰 타격을 준

삼우정(三友亭) 박경신(朴慶新) · 용연 경인(慶仁) · 제우당 경전(慶傳)·

국헌 경윤(慶胤) · 증좌승지 경선(慶宣) · 중추부 동지 지남(智男) · 철남(哲男)

· 괴정 선(瑄) · 운옹 찬(璨) · 행와 린(璘) · 기포 우(瑀) · 진사 근(瑾) · 용암 숙(琡) ·

판관 구(球) 등 14의사를 모신 사당(충열사)이다.

 

이들 14의사는 부자, 형제, 숙질, 종형제 사이로 나라가 위기에 처 했을 때

몸을 던져 이 지역을 수호한 밀양박씨 일족이며 위국충절의 귀감이 되고 있다.

 

이중 12분은 선무원종공신 1,2,3등에 각 책봉되었고, 한 분은 병자호란 때

진무원종공신 1등에 녹훈되었다. 

 

 

 

 

 

 

 

 

14의사비각(十四義士碑閣)

 

 

14의사 묘정비(廟庭碑)는 1876년 건립한 것으로 비문에는 임란 당시의 상황을

 

 

 매우 상세하게 기술하고 있으며 비각의 구조도 원형을 유지하고 있다.

 

 

 

 

 

 

숭절문(崇節門)

 

 

 

 

 

 

용강서원(龍岡書院)

 

 

 

 

 

 

 

 

 

 

 

 

동재(東齋),보인당

 

 

 

 

 

 

서재(西齋)

 

 

 

 

 

용강제(龍岡齊)

 

 

 

 

 

 

여충사(麗忠祠)

 

 

 

고려말 충신이며 두문동 72현에 꼽히는 송은 박익 선생과

 

그의 장자인 우당 박융 선생을 봉안한 묘우(廟宇)이다.

 

 

박익은(1332~1398) 1352년(공민왕 2) 이색(李穡), 박상충(朴尙衷)과 함께 과거에 급제했다. 나이로는 이색보다 네살 어리고, 이성계(李成桂)보다 세살, 정몽주보다 다섯 살이 많았다.

박익은 문인이었지만, 이성계와 함께 전장에 나가 남으로 왜구를, 북으로 홍건적과 여진족을 물리치기도 했다. 벼슬은 예문춘추관과 직제학을 지냈으며 고려가 망하던 해에는 예조판서를 역임했다. 박익이 예조판서를 지내기 전, 고향인 밀양땅 송계마을(현재의 밀양시 부북면 제대리 송악마을)에 은둔했던 시절이 있었는데 정몽주가 이곳에 찾아온 적이 있었다. 그때 정몽주에게 건넨 시가 있다. “송계마을 숨은 선비 집을 찾아오셨소(來訪松溪隱士家)/ 석양에 문은 닫혀 있고 꽃이 지는데(夕陽門掩落花多)/ 술통 앞에 두고 나의 깊은 마음을 묻는가(樽前問我幽閑意)/ 주렴 밖에 반쯤 보이는 저 청산이 내 마음이라오(簾外靑山半面斜).”

정몽주가 타살되고 이성계가 조선 왕조를 열자, 박익은 또다시 송계마을로 내려오고 만다.

뒷산이 송악(松岳)이고, 마을이 송계(松溪)인 것은 송도(松都, 開京)를 잊지 않기 위해서다. 이성계는 전장에 함께 나섰던 박익에게 공조판서,형조판서,예조판서,이조판서를 연달아 내리며 조정으로 불러들이려 했다. 하지만 박익은 눈멀고 귀멀었다는 핑계를 대며 태조가 내린 교지와 예관을 보지도 않고 거절했다. 마지막에는 좌의정을 내렸으나 역시 나서지 않았다.

다섯 번 불렀어도 한 번도 나서질 않아 ‘오징불기(五徵不起)’라고 하는데, 그는 죽음에

이를 때까지 고려를 향한 충절을 지켰다.

박익의 묘 남쪽 벽에 그려진 벽화.

그는 네 아들에게 남긴 유언에서 “나는 왕씨의 혼령으로 돌아가거니와 너희들은 이씨의 세상에 있다. 이미 다른 사람의 신하가 되었으니 온 힘을 다해 충성을 하라. 선천과 후천으로 부자간에도 시대가 달라졌다”며 조선에 충성할것을 당부했다. 박익의 후손들은 이 유언 때문에 조선시대에 집안이 무사할 수 있었다고 말한다.

박익은 밀양시 청도면 고법리 화악산 자락에 묻혔다. 묏자리는 경남의 최고 명당으로 꼽힐 만큼 활달하다. 묘는 사각형으로 고려 양식을 띠고 있고, 돌단이 둘러져 있어 웅장하다.

이 때문에 두 차례나 도굴당하는 곤욕을 치렀다. 2000년 9월 두 번째 도굴꾼이 지나간 뒤,

동아대 박물관 주관으로 무덤 발굴 작업이 진행됐다. 이때 고분벽화와 지석, 혼유석 등이

출토돼 세인들을 놀라게 했다

 

 

 

 

 

 

충열사(忠烈祠),14의사를 모신 사당

 

 

 

 

 

 

 

 

 

 

 

 

 

 

용강지(龍岡池) * 용연정(龍淵亭)

 

 

 

 

 

 

 

 

 

용연정은 밀성인 박경인 선생의 정자이다. 선생의 휘는 경인이요,

호는 용연으로 성품이 준고하고 절의를 숭상하였으며 임진왜란때 창의하여

순절한 14의사의 한분이다. 정자에는 (고)박정희 대통령 친필의 제액이 현액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