웅부안동(雄府安東)/안동 불천위

허백당 김양진(1467~1535)

자즐보 2011. 12. 10. 01:20

 

허백당 김양진(1467~1535)

 

자는 백기(伯起), 호는 허백당(虛白堂), 진산(珍山公 諱:徽孫)공의 1남 3녀 중 아들로 태어났다.

정부인 양천허씨(貞夫人 楊川許氏)는 장사랑(將士郞)인 서(瑞)의 딸이다.

 

7세에 능히 문장을 지었으며 정효항(鄭孝恒) 문하에서 글을 배웠다.

성종 20년(1489) 22세에 진사(進士)가 되고, 연산군 3년(1497)에 문과에 급제하여 한림을

지내고 홍문관(弘文館) 부수찬(副修撰)으로 있을 때 이행, 권달수 등과 연산군 폭정을

간하다가 연산군 10년(1504) 갑자사화(甲子士禍)로 모진 형벌을 당하고 예천으로 귀양갔다.

 

1506년 중종반정으로 풀려나 형조좌랑을 시작으로 여러 청환과 요직을 거처 집의(執義)가

되었을 때 고리대금의 폐단이 심하여 이를 수 차례 상소하여 시정하였고, 중종 12년(1517)

홍문관(弘文館) 부제학(副提學)이 되어 역학에 밝아 김안국(金安國)․이행(李荇)과 같이 道를

가르치는 사유(師儒)에 뽑혔으며 이어 대사간(大司諫)에 올랐다.

 

공은 대사간이 되어 남녀 옥사(獄舍)를 구분하여 이제까지 일어난 폐단을 시정하였으며,

어질고 덕 있는 자를 대우하고 파당과 친소에 따라 인사하지 말 것을 건의하였다.

 

또 변방 특히 왜구의 출몰이 심한 남해안과 양계(평안도 함경도)의 중요성을 피력하고

변방 수령은 문신과 무신을 구별하지 말고 능력에 따라 등용할 것을 주장했다.

 

왕이 삼공(三公:삼정승) 인선에 참석토록 하였으나 공은 대간(臺諫)은 삼공을 규탄하는

자리라 하여 나가지 아니하였다.

 

공이 상소하여 덕화로 다스림에 효과가 없어도 뜻을 굳건히 하고 뜻을 변하지 말 것과,

시속의 폐단과 정사의 퇴폐로 잘못된 점과 소홀한 점을 지적 설명했다.

그리고 인애(仁愛)한 마음으로 백성을 살피고, 지혜를 기르고, 어질고 재주 있는 자를

등용하여 기강을 세울 것을 상소하니 중종은 “내 마땅히 그렇게 하리라.”하였다.

 

중종 13년(1518) 형조참의를 거처 동부승지가 됨에 주위에서 왕의 신임을 시기하고 권신들의

미움으로 사소한 일로 탄핵되었으나 왕은 듣지 않았다. 그러나 공은 스스로 외직을 청하여

영해부사로 나갔다.

 

중종 15년(1520)년 기묘사화 후 1년 만에 다시 대사간이 되어 파당에 치우치지 않고 정도로

매사를 처리하니 권신들의 배척으로 전라도 관찰사로 외직에 명 받았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다시 홍문관 부제학을 재수 받고 경연에서 역경(易經)을 강의하였다. 동부승지가 되어

중종의 신임이 두터워 우승지로 이조참의가 되었으나 모함으로 외직으로 나갔다.

 

공은 전라도 관찰사로 나가 탐관오리의 폐단을 바로잡고, 억울한 백성의 호소를 공정하게

판정하고 예(禮)로 타일러 깨우치며 청렴하게 선정을 베풀었다.

공이 떠나올 때 전송하는 말과 수레가 수리(數里)에 늘어 섰고, 호남 사대부들이 선정을 잊을

없다하여 전송 장면을 그린 그림과 많은 송덕시가 있었다는 기록은 있으나 지금은 찾기 어렵다.

 

중종 18년(1523) 공은 부제학에 제수되었으나 불부함에 다시 대사간을 재수 받고 “시비를 분명히

밝혀 곧은 말을 너그럽게 용서하여 언로를 열어 후폐(後弊)를 막으소서.”하고 인재 배양의 방도와

재변(災變)에 대하여 상소하였다. 또 상소하여 “......선(善)을 취하여 도량을 넓히고, 자신의 잘못을 찾아내어 덕(德)을 빛내고, 곧은 말을 받아드려 지혜를 넓히소서......”하고 사치를 금하고 물자

아끼기를 권하였다.

 

또 왕업을 이어 오면서 국경에 전쟁이 없게된 지 오래이므로 “장수는 기율(紀律)을 모르고,

사졸은 항오(行伍)를 모르며, 진(鎭)에는 예리한 무기가 적고, 군(軍)에는 축척된 군량(軍糧)이

없음을 ...” 걱정하여 특별히 중종에게 군사에 대한 계책을 수립하고, 통솔하는 방략을 진작시키어

수시로 무예를 익히게 하고, 군율을 해이하지 않게 하여 변방 경계를 늦추지 말 것을 주문했다.

 

다음해에 이조참의가 되었으나 성품이 강직하여 권신(權臣)들의 미움을 받았으며,

특히 김모의 저택이 너무 크고 화려함을 극간하다가 경주부윤(慶州府尹)으로 외직에 나갔다.

소임을 다하고 사직하여 오릉동(五陵洞)에 돌아와 전원생활을 했다.

 

중종 24년(1529) 공은 다시 가선대부(嘉善大夫)로 승차하여 황해도 관찰사로 해주(海州)에

부임하였다. 실정을 바로잡고 어려운 백성을 따뜻하게 살피며 어느 누구도 억울함이 없도록

공평하게 정사를 처리하고, 봉록을 털어 가난을 구휼하고, 풍속을 바로 잡아 맑고 깨끗하게

선정을 베풀어 청백리에 녹선되었으며, 소임을 마치고 사직하여 오릉동에 기거하였다.

 

다음해에 지돈영부사(同知敦寧府事) 그 다음해(1531)에 공조참판(工曹參判)이 되었으나,

권신들의 중상으로 충청도 관찰사를 보직 받고 부임하였다가 몇 달 후 병으로 사직하였다.

 

중종 29년(1534)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에 임명되고, 중종 30년(1535) 왕이 제릉(齊陵)을

참배하기 위해 송도(松都)로 갈 때 유도재상(留都宰相:임금이 거동할 때 서울서 정무를 보는 재상)

으로 숙위(宿衛) 중 병을 얻고 돌아와 병환이 심해져 졸하였다.

 

공의 성품은 매우 폭이 넓고 소탈하여 언제나 진실할 뿐 꾸밈이 없었고, 학문에 대한 지식도 높고

넓어서 주역, 수리, 음양복서(陰陽卜筮)에 이르기까지 밝았다고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에 전하고

있다. 예천군 감천면 물계서원(勿溪書院)에 배향(配享)되었다.

 

▼ 물계서원(勿溪書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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