웅부안동(雄府安東)/안동 불천위

학봉 김성일(1538-1593)

자즐보 2011. 12. 9. 21:02

 

학봉 김성일(1538-1593)

 

 

‘류성룡과 조목, 김성일은 이황의 문하에서 배웠다. 김성일은 마음가짐이 굳세고 꿋꿋하며 학문이 독실했다. 모습은 고상하고 위엄이 있으며, 행동거지는 가지런했다.

바른 말이 조정에 받아들여지지는 않았으나, 그 충성과 절개가 빼어나게 남달라서 다른 사람들이 감히 다른 의견을 내지 못했다. 학봉 김성일을 평한'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이다.

김성일 약력
    △1538년 안동 출생, 1556년 퇴계문하에서 수학

    △1564년 진사시 합격, 1583년 사간원 사간, 나주목사

    △1587년 안동 석문정사 건립

    △1590년 3월 일본 통신부사로 서울 출발

    △1592년 경상우도 병마절도사, 초유사 , 가선대부

    △1593년 4월 별세, 1605년 선무원종공신 1등 녹훈, 1676년 자헌대부 이조판서 증직

    △1679년 시호 문충(文忠)

◆ 올곧은 언행 ‘만인의 귀감’
학봉이 1574년(선조 7년)에 사간원 정언에 제수되었다. 어느 날 임금이 경연에 나와 “경들은 나를 전대의 제왕들과 비교해 볼 때 어떤 임금과 비슷하다고 생각하는가”하고 물었다.

그러자 어떤 이가 “요 임금이나 순 임금같은 분입니다”고 했으나, 학봉은 대답하기를 “요순같은

성군도 될 수가 있고, 걸주(桀紂)같은 폭군도 될 수 있습니다”고 했다.

임금이 그 이유를 묻자 학봉은 “전하께서는 천부적 자질이 높고 밝으시니 요순같은 성군이 되시기 어렵지 않으나, 스스로 똑똑하다고 여겨 신하가 간하는 말을 받아들이지 않는 병통이 있으십니다. 이는 걸주가 망한 까닭이 아니겠습니까”했다. 임금이 얼굴빛을 바꾸고 바르게 앉았으며,

신하들은 임금이 화가 났다는 것을 알고 모두 벌벌 떨었다.

이에 류성룡이 나아가 “두 사람 말이 모두 옳습니다. 요순같다고 한 것은 임금을 그렇게 인도하려는 말이고, 걸주에 비유한 것은 경계하는 말이니 모두 임금을 사랑해서 한 말입니다”고 했다.

임금은 겨우 얼굴빛을 고치고 술을 내리게 한 다음 자리를 파했다.

학봉은 임금과 왕실의 잘못에 대해서도 서릿발같은 비판을 가했던 만큼, 신하들의 잘못에 대해서는 더 말할 것도 없었다. 대상이 누구든 잘못이 있으면 직접적으로 비판했다.

1578년 홍문관 교리로 있을 때, 권세 있는 신하가 뇌물을 받은 일이 있자 임금 앞에서 하나하나

이름을 거론해 아뢰니 신하들은 벌벌 떨었다. 거론된 이들은 모두 그 자리를 떠나게 되었다.

그는 임금이 싫어하는 기색을 보여도 거리낌없이 간하였고, 조정 관리의 불의와 부정이 있으면

사정 없이 탄핵해 바로잡았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를 ‘대궐 안 호랑이(殿上虎)’라 불렀다.

1579년에는 사헌부 장령이 되었다. 임금의 형이 주색에 빠져 멋대로 행동하며 폐단을 많이 끼치자 학봉은 그 집 종을 잡아다가 엄하게 형벌로 다스렸다. 그 소식을 들은 사람들은 위험한 짓을 했다며 후환을 두려워했으나 그는 조금도 동요하는 빛이 없었다.

그에게는 오직 옳고 그름만이 언행의 잣대였다. 그의 올곧은 자세가 널리 알려지면서 1579년 9월 학봉이 함경도 순무어사(巡撫御史)가 되어 온다는 말을 듣고는 일부 수령들은 인수(印綬)를 끌러

놓고 달아나기도 했다. 당연히 백성들은 “우리 부모이시다”라며 칭송했다.


◆ 자신의 성품이 너무 강함을 알고 ‘寬弘’ 써붙여 놓고 반성
학봉은 일찍이 “내가 평생에 걸쳐 얻은 한마디 말은 ‘나의 허물을 공격하는 자는 나의 스승이고,

나의 아름다움을 말하는 자는 나를 해치는 자다(攻吾過者 是吾師, 談吾美者 是吾敵)’라는 것이다”

라 했는데, 이 열 네 글자로써 항상 자신을 깨우쳤다. 또 ‘관홍(寬弘)’ 두 글자를 벗에게 크게 써

달라고 하고는, 그것을 벽에다 붙여놓고 보면서 반성했다. 자신의 성품이 너무 강직한 것을 스스로 알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읽지 않은 책이 없을 정도였으나, 퇴계 이황의 ‘주자서절요(朱子書節要)’를 가장 애독했다.

마음 속으로 깊이 탐구하고 가슴에 새겨 두며 삶의 지침으로 삼았으며, 마음을 가라앉혀

음미할 때는 침식까지 잊어버렸다. 강독할 때는 마치 선현을 직접 대한 듯한 자세로 앉아서,

정밀하게 생각하고 명확하게 분변하며 조금도 방과(放過)하는 바가 없었다.

배움을 청하는 이가 있으면 온 마음을 쏟아 간절하고 지극하게 가르쳐 주었고, 문장을 지음에 있어서는 명백하고 전아하였다. 사람들을 놀라게 할 만한, 험하고 기괴한 말을 쓰지 않았다.

내외의 집안 친족 가운데 스스로 먹고 살 수가 없는 사람이 있을 경우에는 모두 다 보살펴 주었다. 얻은 것이 있으면 모두 나누어 주었는데, 더 궁핍한 사람부터 먼저 나누어 주었다.

반드시 온 정성을 다해 보살펴 주었으며, 마을사람들에게도 나누어 주었다.

문인들에게는 “배우는 자가 걱정할 바는 오직 뜻을 세우는 것이 성실하지 못한 데 있는 것으로,

재주가 부족한 것은 걱정할 바가 아니다”고 강조했다. 또 “자신을 속이지 말라는 ‘무자기(毋自欺)’ 세 글자는 모름지기 종신토록 명심해야 하는 것이다. 선을 행하고 악을 제거함에 있어서 한결같이 성실하게 하지 않으면 이는 모두 자기를 속이는 일이다”고 가르쳤다.

자제들에게는 “학문을 하는 자는 마땅히 심학(心學)을 우선으로 해야 한다. 만약 과거 공부만

힘써서 한다면 비록 과거에 급제하더라도 그 본심은 이미 먼저 이욕에 빠져들게 되니

두려워하지 않아서야 되겠는가”라고 훈계했다.


◆ 한글 편지로 부인에게 자상한 情 표시
1587년 8월, 안동 청성산에 석문정사(石門精舍) 를 완공하고 그곳에서 깊이 사색하며 마음을 닦았다. 1천500여편의 시를 남긴 시인이기도 한 그는 “내가 원래 바라던 바가 이것이다”면서 남은 평생을 학문 연구와 제자 교육에 바치려고 했다. 배우고자 하는 이들이 구름처럼 모여들었다. 하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다. 국난이 그를 조용히 지내게 놔두지 않았다.

온 가족이 서로 붙들고 울며 작별하는 가운데 전장으로 떠나면서 큰아들에게 이르기를 “공과 사에는 구분이 있는 법이니 서로 돌아볼 수가 없다. 너는 돌아가서 너희 어미를 모셔라. 홀로 되신

큰어머니와 둘째 큰어머니도 너희들이 어미와 같이 종신토록 잘 섬겨라. 어찌할 도리가 없게

되었을 경우에는 온 집안이 한꺼번에 죽어 황천에서나 만나는 것이 옳다. 나라가 보존되면 함께

보존되고, 나라가 망하면 함께 망하는 것이다. 어찌 나라가 멸망했는데 집안이 보존되겠는가”

라고 했다.

공은 여러 진(陣)에서 왜적의 머리를 베어 바치면 몸소 검사했다. 옆에서 누가 더러우니 가까이

가서는 안 된다고 하자 “싸움터에서는 으레 거짓으로 속이는 일이 많은 법이다.

잘못해 우리나라 사람을 죽였을 경우, 그 죄는 실로 나에게 있다. 그러니 신중히 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했다. 그러자 머리를 베어 바치는 자가 감히 속임수를 쓰지 못했다.

임진왜란 중이던 1592년 12월, 싸움 준비로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와중에도 시간을 내어 안동의

부인에게 한글로 편지를 보냈다.

‘요사이 추위에 모두들 어찌 계신지 가장 염려하네. 나는 산음고을에 와서 몸은 무사히 있으나,

봄이 이르면 도적이 대항할 것이니 어찌할 줄 모르겠네. 또 직산 있던 옷은 다 왔으니 추워하고

있는가 염려 마오. 장모 뫼시옵고 설 잘 쇠시오. 자식들에게 편지 쓰지 못하였네. 감사라 하여도

음식을 가까스로 먹고 다니니 아무 것도 보내지 못하오. 살아서 서로 다시 보면 그 때나 나을까

모르지만, 가필 못하네. 그리워하지 말고 편안히 계시오. 섣달 스무나흗날.’

학봉의 또다른 면모를 엿보게 하는 글이다. 이 편지는 결국 영원히 이별하는 편지가 되고 말았다.

4개월 뒤 그는 진주성 공관에서 삶을 마감했다.

 

◆ 학봉 불천위 이야기

학봉 불천위가 언제, 어떤 과정을 거쳐 결정되었는지에 대한 기록은 남아있지 않다.

김종길 종손(1941년생)도 학봉의 불천위 역사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한다고 말했다.

학봉 불천위 신주는 학봉종택(안동시 서후면 금계리) 안채 동쪽 뒤편에 위치한 사당에 봉안돼 있다. 학봉 내외 신주가 가장 서쪽에 있고, 종손의 4대조 신주가 그 동쪽에 모셔져 있다.

학봉 불천위 제사(기일은 음력 4월29일)는 기일 0시30분경 출주(出主)를 시작으로 진행된다.

학봉종택 안채 대청에서 열리며, 참석 제관은 50여명에 이른다. 아헌은 종부가 올린다.

학봉 내외의 제상이 따로 차려지며, 제청에는 ‘중류지주’(中流砥柱: 난세에도 의연하게 절의를

지키는 일 또는 그런 인물 비유하는 말)와 ‘백세청풍’(百世淸風: 영원토록 변치 않는 선비의 절개, 후세인의 모범이 될 만한 훌륭한 사람을 일컫는 말) 글씨가 있는 대형 탁본 족자가 내걸린다.

제수로 약과 위에 산마를 익혀 올리는 것이 특징이다. 이는 학봉이 전쟁터에서 전염병(장티푸스)이 도는 병사들에게 직접 미음을 먹이다 본인도 전염돼 며칠만에 사망하게 되는데,

그 때 마를 먹은 것으로 전해지는 데서 유래한 것 같다고 했다.

그리고 송기를 이용한 송편을 쓰고 있다. 이는 독야청청한 소나무의 기상을 닮은 학봉의 기개를

기리기 위해서라는 설명이다. 또 소금장을 올리는데, 더운 여름에 별세해 초혼(招魂)할 때 부패방지를 위해 소금을 쓴 데서 비롯된 것 같다는 이야기였다.

불천위 제사 때만 사용하는 병풍이 있다. 10폭인 이 병풍은 지금의 종부가 40년 전에 직접 수놓은 것으로, 퇴계가 심학의 요체를 학봉에게 써준 병명(屛銘)이 새겨져 있다.

 

▼ 학봉종택, 서후면 금계리에 위치(경북기념물 제11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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