웅부안동(雄府安東)/안동 불천위

유연당 김대현(1553~1602)

자즐보 2011. 12. 9. 20:36

 

유연당 김대현(1553~1602)

 

김대현은 오미동 풍산김씨 14대이며 김농의 장남으로, 한양 장의동(壯義洞)에서 태어났다. 1582년(선조 15) 생원시에 합격하였다.
장성해서 영남으로 돌아와 23세에 부친의 명을 받아 오릉동의 집을 현재의 자리로 옮겨 새로 중수하였으며, 아울러 뒷산 죽자봉(竹子峯) 바위 위에 정자를 짓고 자신의 호를 따 죽암정사(竹巖精舍)라고 하였다.

 

* 영주로 거처를 옮기고 유연당을 짓다

생원시에 합격한 후 벼슬을 마다하고 향리를 지키며 학문에 전념하다 36세 되던 해 영천(지금의 영주) 봉향리로 거처를 옮기고 호를 ‘죽암’에서 ‘유연당(悠然堂)’으로 고치고 집의 당호로

삼았다.
‘유연’이라는 호는 중국 동진시대의 시인 도연명의 「음주(飮酒)」에 나오는 “동쪽 울타리 아래 국화꽃 꺾어 들고, 한가로이 남산을 바라보네.[採菊東籬下, 悠然見南山]”라는 구절에서 따온 것이다.

 

* 이산서원장을 역임하다

영주로 이주한 후로도 명리에는 신경쓰지 않고 학문에만 더욱 정진하였는데, 그렇게 쌓여진

학덕에 힘입어 37세 되던 해에 이황이 세운 이산서원의 원장을 역임하였다.
지역 유림 가운데 원로를 추대하여 서원의 원장으로 임명하는 것이 일반적인 관례임을

감안할 때, 그처럼 젊은 나이에 이산서원의 원장에 추대되었다는 것은 김대현의 학덕이

어떠했는지를 충분히 짐작케 한다. 이후 1598년 상의원 직장을 지내고 영주로 낙향한 뒤

한 번 더 이산서원 원장으로 추대되기도 하였다.

 

* 임진왜란을 맞아 의병을 일으키고 난민을 구제하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향리 사람들을 모아 안집사(按執使)였던 백암(柏巖)

김륵(金玏)의 밑에 들어가 의병 활동을 했다.
한 해 전에 부친인 김농이 별세해 상중에 있었지만 자신의 집 앞에 구호 장막을 치고 난민들을 구제하는 등 백성들의 구휼에 앞장을 섰다. 김대현이 살던 영주 지역은 경상도 관내에서도

비교적 전화를 덜 입어 각지에서 난민들이 많이 몰려들었다. 하지만 당시 아전들의 농간으로

난민들에게 구호물자가 제대로 전달되지 못하자 군수에게 구호 업무를 자청하여 맡고는,

집 앞에 천막을 치고 난민들을 직접 구제하였다.
특히 당시는 역병이 창궐하여 병자의 동기들조차 간호를 꺼리는 형국이었는데,

매일 새벽부터 저녁까지 정성을 다해 환자들을 찾아다니며 구호를 하였다.

 

* 관리 생활을 하면서 선정을 베풀다

임진왜란 때의 활동이 조정에 알려져 영의정 이덕형(李德馨)과 호조참판 김륵의 천거로

43세 되던 해인 1595년(선조 28) 성현도(지금의 경북 경산과 청도 사이)의 찰방에 부임하였다.
부임 후 전쟁 뒤 온갖 폐해가 난무하는 것을 보고 조정에 보고를 올려 바로 잡았다.

임기를 마치고 이임한 뒤 성현도 찰방의 이졸(吏卒)들이 송덕비를 세워 그 공을 기렸다고

전한다.

그 뒤 1601년(선조 34) 산음(현재의 경남 산청) 현감으로 다시 부임하여 전쟁으로 황폐해진

향교를 녹봉을 털어 중건하여 학문의 기풍을 진작시키는 등 선정을 베풀었다.
차탄리라는 곳에 향교를 새로 지어 준공하던 날 지역의 70세 이상의 노인들을 초대하여

양로연을 베풀었고, 부득이 불참한 사람에게는 지팡이와 쌀과 고기를 보내 위로하였다.

향년 50세로 생을 마감한 장소도 산음현의 임지에서였다.

 

* 가문을 중흥시켜 ‘오미동’이라는 지명의 유래를 이루다

아들 아홉을 두었는데, 이 가운데 여덟째 술조(述祖)만 17세에 요절하고 나머지 여덟은 모두

소과에 합격했다.

특히 첫째 김봉조(金奉祖), 둘째 김영조(金榮祖), 다섯째 김연조(金延祖), 여섯째 김응조(金應祖), 아홉째 김숭조(金崇祖)는 문과에도 급제를 했는데, 이를 높이 평가한 인조가 김대현의

가문을 ‘팔련오계지미(八蓮五桂之美)’라고 칭찬하고, 이들이 살던 마을에 ‘오미동(五美洞)’

이라는 이름을 하사했다고 전한다.

‘팔련오계’는 과거에서 소과인 사마시(司馬試) 합격방을 ‘연방(蓮榜)’이라고 하고 대과인 문과 합격방을 ‘계방(桂榜)’이라고 한 데에서 연유한 것으로서, 소과 합격자가 여덟이고 대과 합격자가 다섯에 이른다는 뜻이다. 김대현의 세거지인 오미동은 다섯 산줄기가 뻗어 있는 지세에

자리잡은 까닭에 처음에는 ‘오릉동(五陵洞)’이라고 불렸다.
그러다가 김대현의 조부인 김의정(金義貞)이 을사사화로 낙향하면서 오릉동을 ‘오무동’

이라고 고쳤는데, 인조의 교시를 계기로 다시 오미동으로 바뀌어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또 당시 인조는 경상감사로 하여금 마을 입구에 ‘봉황려(鳳凰閭)’라는 문을 세우도록

했다고도 전하는데, 예로부터 봉황은 새끼를 낳으면 반드시 아홉 마리를 낳는다는

전설을 빌어 김대현의 가문을 기리기 위함이었다. 현재 봉황려는 없어지고 그 유래를

적은 비석만 세워져 있다.

 

* 칠송정 동도회를 조직하여 주관하다

임진왜란 직후인 1598년 상의원 직장으로 근무할 때 한양에 사는 영남인들을 규합하여 칠송정(七松亭) 동도회(同道會)를 조직하여 이 모임을 실질적으로 주관하였다.
당시 이 모임에 참여한 사람은 김대현을 비롯하여 동강 김우옹(성주), 죽호 윤섭(용궁),

농고 황언주(풍기), 사촌 김행가(성주), 근헌 황침(풍기), 송계 도응종(고령), 이송 김윤명(안동), 귀왕 김자(고령), 양담 곽수인(함창), 남곡 권형(함창), 만오 정장(성주), 석담 김석광(선산), 쌍백 권유남(성주) 등이었다.

 

* 남의 옷으로 소렴할 정도로 청렴하였다

산음현 임지에서 세상을 떠났을 때 남은 옷이 없어 그 지역의 선비인 오장(吳長), 권집(權潗), 박문영(朴文楧) 등이 자신들의 옷을 벗어 소렴(小殮)을 했다고 전할 정도로 일생을 청렴하게

살았다. 산음현감으로 있을 때 재종형인 김정현(金挺賢)이 임소에 들렀다가 초라한 살림에

아이들이 배고파 칭얼거리는 것을 보고 혀를 찼다는 이야기 역시 김대현의 청빈한 삶을

보여주는 일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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