웅부안동(雄府安東)/안동 불천위

보백당 김계행(1431~1517)

자즐보 2011. 12. 9. 18:58

 

보백당 김계행(1431~1517)

 

조선의 선비들은 성리학 이념에 따른 삶을 지향했다. 그들은 빈곤을 참으면서 인격을 도야하고

학문에 전념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관직에 나아가면 임금을 보필해 올바르게 정사를 펼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려고 했다. 설령 그러한 행동으로 인해 임금의 눈밖에 나더라도 개의하지 않았다.

끝내 임금이 잘못을 고치지 않고 올바른 정치가 행해지지 않는다면, 그 때는 미련 없이 관직을 떠나 은거하면서 후진 양성에 힘쓰는 것이었다.

이것이 조선시대 선비들의 삶의 방식이었고, 보백당(寶白堂) 김계행의 삶은 그 전형이었다.

그는 남처럼 후손에게 많은 재산을 물려주지는 못했다. 그가 물려준 것은 청렴하면서도 방정(方正)

했던 삶의 자세였다. 그러나 그 정신적 유산은 오랫동안 후손과 지역 사람들에게 기억되었고

삶의 지표가 되었다.


 

김계행(1431-1517) 약력
  
△1431년 안동 풍산에서 출생, 본관은 안동

   △1447년 생원시 합격, 1480년 문과 급제

   △1498년 대사간, 1859년 이조판서·대제학 추증, 시호 ‘정헌(定獻)’

   △1706년 유림이 보백당을 기려 묵계서원 건립

◆ “우리 집에 보물이 있다면 ‘淸白’뿐”
이러한 보백당의 삶은 자신의 호이자 당호(堂號)인 ‘보백당(寶白堂)’의 의미를 해설한 시에도

잘 드러난다. ‘우리 집에는 보물이 없네(吾家無寶物)/ 보물이 있다면 오직 청백뿐이네(寶物惟淸白).

자기 가문의 보물은 청렴하고 결백한 삶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87세의 나이로 자신의 거처

보백당에서 임종하면서, 자손들에게 다음과 같이 당부했다. “대대로 청백한 삶을 살고 돈독한

우애와 독실한 효심을 유지하도록 하라. 세상의 헛된 명예를 얻으려 하지 마라.”

이어 자신의 삶을 평가하면서 다음과 같은 유언을 남겼다.

“나는 오랫동안 임금을 지척에서 모셨다. 그러나 조금도 임금의 은혜에 보답하지 못했다.

살았을 때 조금도 보탬이 되지 못했으니, 장례 역시 간략하게 치르는 것이 좋겠다.

또 절대 비석을 세워 내 생애를 미화하는 비문을 남기지 말아라.

이는 거짓된 명성을 얻는 것이니, 매우 부끄러운 일이다.”

자신이 모시던 연산군이 반정으로 쫓겨났다는 소식을 듣고 눈물을 흘리며 탄식했던 그로서는,

임금을 잘 보필하여 성군(聖君)을 만들지 못한 자책만 남은 삶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이런 그에 대해 서애 류성룡은 ‘보백당은 강직한 분’이라며 칭송했다.

무오사화(1498년) 이후 고향인 안동으로 낙향해 은거한 보백당은 1501년부터 장남으로 하여금

미리 터를 잡아 마련케 한 지금의 보백당종택(안동시 길안면 묵계리)에 정착하고,

말년에는 근처 산속 계곡 폭포 위에 만휴정(晩休亭)을 지어 후학을 가르치며

산수와 더불어 보냈다.


 

◆ 수시로 관직에서 물러나게 만든 그의 直言
보백당은 17세 때 생원시에 합격하고 성균관에 들어갔으나, 문과는 많이 늦어져 51세가 되어서야

급제하였다. 하지만 과거 급제에 연연하거나 관직에 나아가려고 초조해하지 않았다.

당대의 학자였던 점필재(畢齋) 김종직 등과 교유하며 학문과 도덕 수양에 전념했다.

51세의 늦은 나이에 과거에 급제한 그가 1년이 지나도록 관직에 임명되지 못하자,

이를 안타깝게 여긴 시독관(侍讀官: 임금에게 경서를 강의한 관직) 정성근(鄭誠謹)이 국왕에게

그의 등용을 직접 건의했다. 그의 건의가 계기가 되어 1481년(성종 12) 사헌부 감찰에 제수되었다. 그러나 강직한 충언 때문에 미움을 사 고령현감으로 밀려났다.

그는 고령에서 인정(仁政)을 베풀고 치적을 쌓아 다시 중앙관직으로 돌아온 후에는

언관 관직을 중심으로 다양하고 화려한 관직을 거친다.

보백당의 유별나게 다양한 관직 생활은 불과 17년 동안에 이루어진 일이었다.

그만큼 관직 교체가 잦았던 것이다. 그가 임금의 노여움을 두려워하지 않고

직언(直言)을 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아무 하는 일 없이 관직이나 보전하는 것을 매우 부끄럽게 생각하였다.

그리고 정책에 잘못이 있거나 비판 받을 일이 일어나면 평소의 소신과 학문을 바탕으로 조리있게

비판하였고, 조금도 시류나 인기에 영합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외척의 전횡이나 총신(寵臣)의 부정부패, 제도적인 병폐에 대해서는 더욱 단호한 모습을 보였다.

그들의 행위로 인한 백성들의 피해와 국정의 혼란상을 비판하며 조금도 머뭇거리지 않았다.

이 때문에 임금의 노여움을 사서 자주 관직에서 물러나야 했던 것이다.

하지만 머지않아 다시 등용되었고, 그때마다 관직은 조금씩 높아졌다.

그를 아끼는 동료들의 비호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에 대한 동료들의 애정은 두 차례의 사화에서도 잘 드러난다.

1498년(연산군 4) 그의 친구인 김종직이 지었던 ‘조의제문(弔義帝文)’이 원인이 되어 일어났던

무오사화 때, 그 역시 연루되어 국문(鞫問)을 받았다.

 

1504년(연산군 10)에 벌어진 갑자사화 때도 연루되어 국문을 받았다.

이때는 연산군의 처남이었던 신수근이 그가 평소 외척과 내시의 부정부패에 대해 강경한 비판을

일삼은 데 앙심을 품고, 갑자사화에 그를 끌어들여 해치려 했다.

또 그 이듬해에는 내수사(內需司) 노비의 횡포를 지적했다는 이유로 연산군이 직접 그를

국문하라고 명하기도 하였다.

이처럼 그는 연산군 말년의 몇 년 사이에 3차례 국문을 당하며 생사의 기로에 섰다.

하지만 그때마다 그의 성품과 인격을 흠모하고 그의 희생을 안타까워하는 선후배 관원들의

적극적인 비호에 힘입어 목숨을 구할 수 있었다. 정작 본인은 동료들과 죽음을 함께 하지

못한 것을 죄스러워했지만.

권세가 대단했던 조카를 피나게 매질한 강직한 성품
그는 권력에 연연하지 않았다. 이는 그의 조카이자 국왕의 총애를 받던 국사(國師) 학조(學祖)와의

일화에서 잘 드러난다. 학조는 늦은 나이에 향학(鄕學) 교수라는 낮은 관직에서 묵묵히 일하고 있는 숙부를 안타까워했다. 그래서 일이 있어 성주에 가게 되자 향교로 그를 찾아가 인사를 하려고 했다.

 

그런데 성주 목사가 보백당을 불러오게 할테니 갈 필요 없다고 만류, 사람을 보내 그를 오게 하였다. 그는 가지 않았고, 학조는 어쩔 수 없이 직접 찾아가 뵈었다. 그러자 김계행은 “네가 임금의

은총을 믿고 방자하게 구는구나. 나이든 삼촌에게 찾아와 인사하지 않고 도리어 나를 부르느냐”

하고 나무라면서, 살집이 터져 피가 날 정도로 회초리로 때렸다.

조금 뒤 학조가 변명하면서 “숙부께서 오랫동안 문과에 급제하지 못하셨는데, 혹 관직에 뜻이

있으면 힘을 써보겠습니다”라고 하였다. 그러자 화를 내면서 “네 덕으로 관직에 오른다면

다른 사람들을 무슨 면목으로 보겠느냐”라고 하면서 엄하게 꾸짖었다.

당시 학조의 권세가 대단해서, 그가 성을 내면 주변 분위기가 싸늘해질 정도였다.

그럼에도 보백당은 조금도 개의치 않았을 뿐 아니라, 오히려 학조가 권세를 믿고

방자한 행동을 할까봐 준엄하게 꾸짖었던 것이다.

이러한 성품은 연산군이 즉위한 이후 간언에 귀를 기울이지 않자, 사직하고 고향으로 은거한데서도 잘 드러난다. 그는 연산군 즉위 이후 대사간으로 재직하면서 외척과 권신(權臣)이 국왕의 총애를

믿고 온갖 횡포를 자행하자 여러 차례 지적하며 잘못을 시정할 것을 건의했다.

그러나 건의가 받아들여지지 않자 사직 상소를 올리고 고향으로 내려갔다. ‘임금의 잘못을 세 차례 간언하고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사직한다’는 선비의 도리를 실천한 것이었다.

그리고는 고향에 ‘보백당’이라는 조그만 집을 짓고 은거하며, 후진 양성과 자손 교육에

전념하면서 여생을 마쳤다.

◆ 보백당 불천위 이야기

보백당 사후 오랜 세월이 흐른 뒤인 1858년, 사림은 그동안 묻혀있던 보백당의 삶과 학덕을 기리는 포상을 청하는 상소문을 올린다. 조정에서는 검증과 심의를 거쳐 가선대부 이조참판(종2품)을

증직했다. 그의 충효와 청백한 인품, 학덕을 인정한 것이다.

사림과 가문에서는 종2품 증직으로는 보백당의 공적이 충분히 인정을 받지 못했다고 여기고,

1859년 다시 1품계 이상의 증직과 시호를 받게 해달라는 상소를 올렸다.

이에 대해 이조에서는 같은 해 5월 예조에 청원, 판서의 증직과 시호를 내리는 것이 합당한

일이라며 심의를 권하고, 예조는 드디어 이조판서 증직의 교지를 내렸다.

곧이어 사림은 보백당의 시호를 받기 위한 시장(諡狀)을 왕에게 올려 ‘정헌(定獻)’이란 시호

교지를 받게 되었다. 그리고 1909년에는 불천위 칙명 교지도 받았다.

불천위 교지는 매우 드문 사례다.

불천위 제사(기일은 음력 12월27일)는 10여년 전까지 자시(子時)에 시작했으나 제관 불편 등을

고려해 기일 오후 8시에 지내는 것으로 변경했다. 제사 시간을 바꾼 후 30여명으로 줄었던

제관들은 70~80명으로 늘어났다. 아헌은 종부가 올리며, 제수로 전은 안 쓴다고 한다.

다른 대부분의 종가와 달리 고위 기일에만 제사를 지내고,

고위 기일에 비위 2위를 함께 모시는 합설로 지낸다.

보백당종택(안동시 길안면 묵계리)은 6·25전쟁 때 건물 대부분이 불타고 사당과 사랑채

‘보백당’만 남았다. 현재의 다른 건물은 그 후에 다시 지었다.

‘보백당’ 건물은 제청으로 사용된다. 불천위 교지는 1909년에 내려왔지만,

그 전부터 불천위 제사는 지냈다는 것이 차종손 김정기씨(1954년생)를 비롯한 후손들의 설명이다. 보백당의 현 종손은 김주현 전 경북도교육감이다.

 

▼ 묵계종택, 보백당 김계행의 집(경북민속자료 제19호)

 

 

▼ 묵계서원, 보백당 김계행과 응계 옥고 선생을 봉향한 서원. 숙종 13년(1687년) 창건

(경북민속자료 제19호)

 

 

▼ 만휴정, 보백당 김계행이 연산군 6년(1500년)에 지은 정자(경북문화재자료 제17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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