웅부안동(雄府安東)/임하면

사빈서원(泗濱書院)

자즐보 2010. 5. 16. 23:43

 

 

 

 

 

사빈서원(泗濱書院)

 

이 서원은 청계 김진(靑溪 金璡)과 그의 아들 5형제의 유덕을 추모하고

후학양성을 위해 1685년(숙종 11)에 사림과 자손들의 공의로 세운 서원이다.


1709년(숙종 35) 동구밖 사수가로 이건하여 ′사빈서원′이라 하였다가

서원철폐령에 의하여 훼철되고 1882년(고종 19) 사림과 후손들에 의하여

복설되었으나 현재는 강당과 주사만 남아있는 것을 

임하댐 건설로 임하면 사의리에서 1987년 임하리로 이건하였으며

청계공파 후손들에 의해 2005년 중창사업에 따라 현위치로 이건하고 

사당,동.서재,전사청,누각 등 새 건물을 지어 규모를 확장했다,

 

 

 

경원루(景遠樓)

최근에 지은 루각이며 양옆으로 담장도 둘렀다.

 

 

 

 

사빈서원 강당

정면 6칸, 측면 2칸의 큰 규모의 강당이며, 많은 변경과 중수 흔적이 있다.

중앙에 정면 4칸의 커다란 대청을 두었고,

그 좌우에는 각기 중앙에 내통하는 문을 낸 2칸씩의 온돌방을 놓았다.

대청과 방 사이의 개구부는 좌우 동형으로 건물의 정면 쪽 주간에는

출입을 할 수 없는 머름을 들인 쌍여닫이 띠살창이,

배면 쪽 주간에는 출입문인 굽널띠살문이 나 있다.

 

 

 

 

주사는 원형보존이 양호한 편이며 정면 5칸, 측면 5칸의 완전 ‘口’자형 집이다.

정면 왼쪽에서 두 번째 칸에 나 있는 대문을 들어서면 안마당 건너편에 3칸 대청이 있다.

대청 좌우에는 각기 2칸통씩의 안방과 윗방이 자리 잡고 있다.

안방 머리 쪽에는 도장방을 두었고, 출입은 대청에서만 가능하게 하였다.

 

 

 

사빈서원 전경

 

 

 

 

청계 김 진 선생과  아들 오형제

 

사빈서원은 원래 안동부 임하현 경출산에 있던 청계(靑溪) 김진 선생의 분암을 숙종 원년(1675)에 확장하여 선생의 유상을 봉안하고 사빈영당이라 하였다. 이를 숙종 11년(1685) 사림과 내.외손들이 합의하여 선생을 주향으로 그리고 다섯 자제인 약봉(藥峯) 김극일, 귀봉(龜峯) 김수일, 운암(雲巖)  김명일, 학봉(鶴峯) 김성일, 남악(南嶽) 김복일을 배향하고 묘호를 경현사라 하였다.  숙종 35년(1709)에 동구 밖 사수가로 이건하여 사빈서원이라 하였다가 고종 5년(1868)에 서원 철폐령으로 훼철 되었고, 고종 19년(1882) 사림과 本孫들에 의해 복설되었으나 1989년 임하댐 건설로 인하여 임하면 사의리에서 현 위치로 이건 했다.

 

 

 


* 청계 김 진(金  璡/1500-1580) 

字는 영중(瑩仲)이고 호는 청계(靑溪)로 의성인이다. 안동부 임하현 천전 내앞에 정착한 증(贈) 승지 김예범 공의 아들로 중종 20년(1525)에 사마시에 합격하였다. 성행이 엄정하고 후진 교도에 전력하여 부암서당과 임천서당을 창건하였다.  시속(時俗)에 구애받지 않고 직정으로 행의하여 아들 오형제를 퇴계 이황 선생 문하에서 수학케하여 아들 삼형제는 문과, 두형제는 소과에 급제하여 천전파의 문호를 크게 열고 유림대가의 터전을 닦았다. 뒤에 자헌대부, 이조판서 겸 지의금부사로 증직되었다.



① 약봉(藥峯) 김극일(1522-1585) 

字는 백순(伯純)이고 호는 약봉(藥峯)이다. 청계 선생 의 맏아들로 태어나 글을 배운 뒤로 경인구를 지어 신동이란 칭이 있었다. 성장해서는 퇴계선생에게 네 아우와 함께 수학하여 사문의 장허를 받았고 사림의 중진이 되어 세상에서는 김씨오룡이라는 칭이 있었다. 명종 원년(1548) 문과에 급제하여 밀양부사, 성주목사, 사헌부장령, 내자시정을 역임하였다.


②귀봉(龜峯) 김수일(1528-1583)

字는 경순(景純)이고 호는 귀봉(龜峯)이다. 명종 10년(1555)에 생원시에 합격하고 유일로 천거되어 자여도찰방에 임명되었다. 임하 부암에 정사를 짓고 학문에 힘썼다. 아들 운천 김용 은 이조판서에 증직되었다.

 

 

③운암(雲巖) 김명일(1534-1570) 

字는 언순(彦純)이고 호는 운암(雲巖)이다. 일찍이 소수서원에 가서 글을 읽었는데 금계(錦溪) 황준량 선생이 한번 보고서 대성을 예견하였고, 퇴계선생에게 나아가서도 선생이 손수 잠명(箴銘)을 써 주시며 기대하였다. 명종 19년(1564)에 아우 문충공과 남악공 삼형제가 동방으로 사마시에 삼체연방함으로 세인의 칭송을 받았다. 그러나 문과에 응시하고자 서울로 갔다가 병환이 위중하여 급거 환향중 용인군 김양역에서 돌아가셨다.

 

 

④학봉(鶴峯) 김성일(1538-1593)

字는 사순(士純)이고 호는 학봉(鶴峯)이다. 퇴계선생의 문인으로 선생께서 행고학정함을 칭찬하여 심학연원(心學淵源)을 병명(屛銘)으로 써주었다. 27세(1564)때 진사시에 합격하고 선조 원년(1568) 31세로 증광문과에 급제하여 사은사의 서장관으로 명나라에 가서 종계변무를 위해 노력하였으며 나주목사를 거쳐 경상도관찰사에 이르렀다. 일본에 사신으로 가서는 직절불굴하였으며 임진왜란때는 경상도초유사로 많은 공을 세웠다. 퇴계선생의 학통은 선생을 거쳐 경당(敬堂) 장흥효, 갈암(葛庵) 이현일, 대산(大山) 이상정, 정재(定齋) 류치명, 서산(西山) 김흥락으로 전해졌다. 예학에도 밝아 상례고증을 편찬하였다. 선무원종공신 일등에 책록되고 숙종 5년(1679)에 이조판서에 증직되었으며 문충공의 시호를 받았다.


⑤남악(南嶽) 김복일(1541-1591)

字는 계순(季純)이고 호는 남악(南嶽)이다. 명종 19년(1564)에 진사시에 합격하고 선조 3년(1570)에 문과에 급제하여 울산군수, 창원부사, 단양군수,풍기군수 등 목민관으로서 많은 치적을 남겼으며, 봉산서원에도 제향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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