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당고택(敬堂古宅)
조선 인조 때의 학자이신 경당 장흥효(1564-1633)선생이
태어나신 곳이며 퇴계 이황과 학봉 김성일, 서애 류성룡 선생
즉 퇴계학파의 뜻을 받들어 사시던 곳이다.
위로는 학봉 선생의 학통을 잇고 아래로는 많은 제자와 문인을 길러내 영남 유학의 근간을 형성하는데 지대한 공헌을 하였다.
경당의 학문은 한결같이 명예와 이익을 멀리하고 책상위에는 항상 커다란 敬(경)자를 써 붙이고 생활의 바탕으로 삼으셨으며, 평생토록 관직에 나아가지 않고 오로지 후학 양성과 학문 연구에 몰두하셨던 분이다.
현재 이 고택에는 경당의 11대 손인 성진(星鎭)이 살고 계신다.
흙담밑에 곱게 핀 금낭화
종가 뒤편 사당(祠堂), 장흥효의 불천위를 모신 곳 不遷位(불천위)란 : 德望(덕망)이 높고 國家(국가)에 큰 功勞(공로)가 있는 사람에게 永遠(영원)히 祠堂(사당)에 모시도록 國家(국가)에서 許可(허가)한 神位(신위)를 모시는 곳이다.
경당선생은 제자들에게 "언제나 책 읽는 것은 그것을 배게하여 생활에 옮기게 함으로써 값이 있게 되고 소중함이 있는 것이니 그렇지 못하면 아무런 보람도 없는 것이다"라고 훈육하였다.
또 이르기를 "사람이 도리를 떠나면 고기 가 물을 떠난 것과 마찬가지다"라고 했으며, 처음으로 학문연구에 뜻을 둔 선비에게는 "오늘 한가지 어려운 일을 행하며, 오늘 한가지 사물을 관찰하고, 내일 한가지 사물의 이치를 궁리하며 깨치게 되면서 꾸준히 하나하나 쌓아 가면 아는 것과 실천하는 일, 행하는 일이 쌓이게 되어 크게 이루게 될 것이고 이것이 힘이 되어 반드시 환하게 꿰뚫어 통하게 될 것이다"라 했다.
또 이르기를 "공부는 남이 보지 않은 곳에서 조심함을 으뜸으로 하여야 한다. 그렇지 못하면 아무리 많은 것을 배워도, 또 잘 안다고 해도 그것이 자신 이 고 익혀지지 않으면 거짓된 공부가 될 뿐이다"라 했다.
이와 같이 忠厚(중후)와 誠實(성실)을 바탕으로 敬(경)의 학문을 중시하여 선생은 자신의 아호를 敬堂(경당)으로 불렀다.
경당고택의 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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