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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성1(촉석문,촉석루,의기사,의암)

자즐보 2010. 10. 31. 22:20

 

 

 

진주성(晉州城)

 

진주성은 진주의 역사와 문화가 집약되어 있는 진주의 성지(聖地)이다.

삼국시대에는 거열성, 통일신라시대에는 만흥산성, 고려시대에는 촉석성,

조선시대 이래로는 진주성 또는 진양성으로 불리었다.

 

하륜의 「촉석성문기」에 의하면 고려 말 빈번한 해구(海寇)의 침범에 대비하여

 본시 토성이던 것을 고려조 우왕 5년(1379)에 진주목사 김중광이 석축하였다.


조선조 1591년(선조24) 7월, 경상감사 김수가 진주성을 수축하고 외성을 쌓았다.

1592년(선조25) 10월, 임진왜란 제1차 진주성 전투에서는 진주목사 김시민이

3,800명의 군사로서 3만 여명의 왜적을 물리쳐 진주성대첩을 이룩하였다.

 

그러나 다음 해인 1593년 6월에는 전년의 패배를 설욕코자 왜병 10만 여명이

또 침략하여 끝내 진주성이 함락되고 7만 민관군이 순절하는 비운을 겪었다.

1604년(선조37)에는 합포(마산)의 우병영을 진주성으로 옮겨 온 이래로

경상우도 병마절도영이 있었고, 1895년(고종32) 5월부터는 진주관찰부,

1896년(건양원년) 8월부터는 경상남도관찰사의 감영이 있었다.

 

1930년대에 왜정은 진영 못을 매축하면서 진주성 외성 모두와 내성 일부를 헐어

그 공사에 충당해 버렸다. 이러한 관계로 1969년부터는 진주성 복원사업을 시작하여

촉석문을 1972년 중건하였고, 1979년~1984년까지 성내의 민가 751동을 철거하였으며,

1992년~2000년 성 외각의 정비사업과 2002년에는 공북문(拱北門)을 중건하여

현재의 모습으로 복원되었으며 사적 제 118호로 지정 관리되고 있다.


성의 둘레는 1.7㎞이며 성내에는 촉석문·촉석루·창열사·의기사·북장대·서장대·

영남포정사·국립진주박물관·진주성임진대첩계사순의단·공북문·호국사 등이 있다.

 

 

 촉석문(矗石門)

 

 

촉석루 삼장사 기실비(記實碑)

三將士 김천일,황진,최경희의

활동 내용을 기록하고 추모하기 위해 세운 비

  

촉석루(矗石樓)

경상남도 진주시 본성동  남강(南江)가 바위 벼랑 위에

장엄하게 자리잡고 있는 영남(嶺南) 제일의 아름다운 누각 "촉석루"

고려 공민왕 14년(1365)에 창건하여 8차례의 중건과 보수를 거쳤던 이 누각은

진주성의 남장대(南將臺)로서 장원루(壯元樓)라고도 하였다.

 

전쟁이 일어나면 진주성을 지키는 지휘본부였고,

평화로운 시절에는 과거를 치루는 고시장으로 사용되었다.

 

이 누각은 1725년(영조 1) 진주목사 안극효(安克孝)에 의하여

여덟번째 마지막으로 중수되었고, 현재의 건물은 6·25동란 때

불타 없어진 것을 1960년에 재건한 것이다.

 

 

 

 

 

 

 

 

의기사(義妓祠,의로운 자를 모신 사당) 

 

 

 

(김은호 화백의 논개 초상화) 

               

 논개에 대하여,,,

임진왜란때 왜장 게야무라을 껴안고 도도히 흐르는 남강에 투신

순국한 의암(논개 사후에 내려진 호) 주논개는 경상우도 병마절도사

최경회의 부실이었다. 논개는 1574년(선조7년) 9월3일

(현)경남 장수군 장계면 대곡리 주촌마을에서 훈장 주달문(신안 주씨)과

밀양박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특히 논개는 甲戌년 甲戌월 甲戌일 甲戌시의

특히한 사주를 타고 태어나 이름을 논개라 하였으며 천품이 영리하고

자태가 아름다웠다고 전해지고 있다.

 

정실부인이 병으로 세상을 뜨기전 최경회에게 자신이 죽은후 재색과

부덕을 겸비한 논개를 처로 맞아들일 것을 권유하였고, 부인이 죽고난 후

몇 년이 흐른 후 논개는 최경회현감과 부부의 연을 맺었다.

 

최경회가 경상우도 병마절도사로 진주성에서 왜군을 맞아 싸울때

논개는 낭자군(여자로 편성된 군대)을 조직하여 치마폭에 돌멩이를

나르고 가마솥에 물을 끓여 성벽을 기어오르는 적병에게 퍼붓는 등

밤낮을 가리지 않고 진주성을 지키기 위해 싸웠다.

 

그러나 진주성은 함락되고 왜군이 진주성안으로 들이닥치자

최경회는 다른 장수들과 모여 성을 지켜내지 못한 책임을 통감하고

자결할 것을 결의하고는 촉석루에 올라 임금이 계시는 북쪽을 향해 절하고

미리 준비해 둔 임종시를 읊으며 남강에 투신 자결한다.

 

촉석루 중에 있는 우리 삼장사(최경회, 김천일, 고종후)

한잔 술 마시며 웃으면서 강물을 가리키네.

남강물 출렁이며 도도히 흐르는데

파도가 마르지 않으면 우리 혼도 죽지 않으리.

 

성이 함락되기 전 다른 부녀자들과 함께 성 밖으로 피신한 논개는

왜군들이 칠월 칠석 촉석루에서 승리를 자축하는 연회를 열기위해

기생을 소집한다는 방을 보고서 하늘이 주신 설욕의 기회라 생각하고

비장한 결심을 한다.

 

 칠월 칠석날 논개부인은 곱게 화장하고 화려한 옷을 입고

열 손가락에 가락지를 끼고 연회에 참석해 왜장 게야무라를

대취하게 만든뒤 춤을추며 연회장에서 빠져나와 남강이 내려다 보이는

높은 바위로 왜장을 유인해 혼신의 힘을 다해 왜장을 껴안고 강물 속으로

뛰어 들었다. 그때 논개부인의 나이는 꽃다운 19살...

 

논개가 뛰어내린 바위를 의암(의로운 바위)이라 이름짓고

의암은 논개의 호가 되었으며, 당시의 현감 정주석은

비석에 명문장을 남겨 후세 사람들에게 사표가 되도록 하였다.

 

나라가 침략을 받아서 어지러울 때 구차하게 살지 않음이 쉽지 않고,

열사로도 어려운 바라. 일개 여자가 대의를 판별하고, 죽는 것을

‘근원으로 돌아가는 것’ 같이 보았으니 어찌 그리 빛나며 매울 쏘냐.

당일을 상상해 보면 위엄과 늠름한 기가 사무쳐 해와 별같이 빛나도다.

어찌 그리 장할소냐…지금 여기에 의기의 이름을 새겨 후세에 전함으로써

평생 공경하는 마음으로 뒤좇아 갈 것은 지체 낮은 사람들의 바람이라

삼가 글로써 기록하여 남기나이다.

 

논개는 기생이 아니었다. 진주성을 지키는 장군의 부인이었으며

남편을 도와 왜병과 맞서 싸웠고, 기생으로 변장하여  

왜장을 껴안고 남강에 몸을 던져 순국한 의로운 여인이었다.

 

 

촉석루에서 남강 가 의암으로 나가는 문

 

 

의암사적비 

 

 

의암(義巖)

의암 주위에는 물이 깊고 소용돌이까지 치고 있어

위험스런 바위라는 "危巖"이라 하였는데,

이 바위에서 논개가 열손가락 마다 반지를 끼고

왜장을 꼭 껴안고 물에 뛰어들어

죽음으로 義를 펼쳤다하여 "義巖"으로 부르게 되었다. 

 

그 때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흐르는 남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