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개에 대하여,,,
임진왜란때 왜장 게야무라을 껴안고 도도히 흐르는 남강에 투신
순국한 의암(논개 사후에 내려진 호) 주논개는 경상우도 병마절도사
최경회의 부실이었다. 논개는 1574년(선조7년) 9월3일
(현)경남 장수군 장계면 대곡리 주촌마을에서 훈장 주달문(신안 주씨)과
밀양박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특히 논개는 甲戌년 甲戌월 甲戌일 甲戌시의
특히한 사주를 타고 태어나 이름을 논개라 하였으며 천품이 영리하고
자태가 아름다웠다고 전해지고 있다.
정실부인이 병으로 세상을 뜨기전 최경회에게 자신이 죽은후 재색과
부덕을 겸비한 논개를 처로 맞아들일 것을 권유하였고, 부인이 죽고난 후
몇 년이 흐른 후 논개는 최경회현감과 부부의 연을 맺었다.
최경회가 경상우도 병마절도사로 진주성에서 왜군을 맞아 싸울때
논개는 낭자군(여자로 편성된 군대)을 조직하여 치마폭에 돌멩이를
나르고 가마솥에 물을 끓여 성벽을 기어오르는 적병에게 퍼붓는 등
밤낮을 가리지 않고 진주성을 지키기 위해 싸웠다.
그러나 진주성은 함락되고 왜군이 진주성안으로 들이닥치자
최경회는 다른 장수들과 모여 성을 지켜내지 못한 책임을 통감하고
자결할 것을 결의하고는 촉석루에 올라 임금이 계시는 북쪽을 향해 절하고
미리 준비해 둔 임종시를 읊으며 남강에 투신 자결한다.
촉석루 중에 있는 우리 삼장사(최경회, 김천일, 고종후)
한잔 술 마시며 웃으면서 강물을 가리키네.
남강물 출렁이며 도도히 흐르는데
파도가 마르지 않으면 우리 혼도 죽지 않으리.
성이 함락되기 전 다른 부녀자들과 함께 성 밖으로 피신한 논개는
왜군들이 칠월 칠석 촉석루에서 승리를 자축하는 연회를 열기위해
기생을 소집한다는 방을 보고서 하늘이 주신 설욕의 기회라 생각하고
비장한 결심을 한다.
칠월 칠석날 논개부인은 곱게 화장하고 화려한 옷을 입고
열 손가락에 가락지를 끼고 연회에 참석해 왜장 게야무라를
대취하게 만든뒤 춤을추며 연회장에서 빠져나와 남강이 내려다 보이는
높은 바위로 왜장을 유인해 혼신의 힘을 다해 왜장을 껴안고 강물 속으로
뛰어 들었다. 그때 논개부인의 나이는 꽃다운 19살...
논개가 뛰어내린 바위를 의암(의로운 바위)이라 이름짓고
의암은 논개의 호가 되었으며, 당시의 현감 정주석은
비석에 명문장을 남겨 후세 사람들에게 사표가 되도록 하였다.
나라가 침략을 받아서 어지러울 때 구차하게 살지 않음이 쉽지 않고,
열사로도 어려운 바라. 일개 여자가 대의를 판별하고, 죽는 것을
‘근원으로 돌아가는 것’ 같이 보았으니 어찌 그리 빛나며 매울 쏘냐.
당일을 상상해 보면 위엄과 늠름한 기가 사무쳐 해와 별같이 빛나도다.
어찌 그리 장할소냐…지금 여기에 의기의 이름을 새겨 후세에 전함으로써
평생 공경하는 마음으로 뒤좇아 갈 것은 지체 낮은 사람들의 바람이라
삼가 글로써 기록하여 남기나이다.
논개는 기생이 아니었다. 진주성을 지키는 장군의 부인이었으며
남편을 도와 왜병과 맞서 싸웠고, 기생으로 변장하여
왜장을 껴안고 남강에 몸을 던져 순국한 의로운 여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