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 이야기들

화성능행도팔첩병(華城陵行圖八疊屛)

자즐보 2020. 1. 7. 21:01


화성능행도팔첩병(華城陵行圖八疊屛)

정조가 1795년(정조 9) 윤 2월 9일부터 16일까지 8일간에 걸쳐

부친 사도세자(思悼世子/1735-1762년)의 묘소에 참배하기 위해

화성(華城)에 행차했을 때 치른 일련의 행사를 그린 궁중행사도(보물 제1430호)다. 


1795년은 정조의 생부 사도세자의 탄신 60주년이 되는 해이며 생모 혜경궁홍씨(1735-1805년)가

회갑이 된 해이다. 정조는 이를 기념하여 어머니를 모시고 화성행궁(華城行宮)에서 회갑연을 치르고

부친의 묘소 현륭원(顯隆園)에 제사를 지냈다. 이 행사는 임시로 조직된 정리소(整理所)에서 담당하였으며

그 전모는 『원행을묘정리의궤(園幸乙卯整理儀軌)』로 출간되었다. 행사를 모두 마친 뒤 주요 장면을 8첩의 병풍에 그려 혜경궁에게 바치고 궁중에도 들였으며 정리소의 책임자들에게도 나누어 주었다.

(자료출처: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화성능행도팔첩병 제1폭 - 화성 성묘전배도(華城 聖廟展拜圖)

화성의 문선왕묘(文宣王廟)에서 치러진 알성의(謁聖儀)를 그린 그림

윤 2월 11일, 정조가 화성에서의 첫 번째 공식행사로 거행했던 성묘(聖廟) 참배 장면이다. 
공자(孔子)를 모신 문선왕묘(文宣王廟)는 화성 남쪽 3리쯤의 산밑에 있었기 때문에
주변을 산자락으로 빙둘러 배치하고 그 안에 작게 묘당과 행사장면을 묘사한 색다른 구도를 이루었다.

 

가장 뒤쪽의 대성전(大成殿) 위에 큰 차일을 치고 뜰에는 청금복(靑衿服)을 입은 유생(儒生)들이
시좌한 가운데 지금 섬돌 위의 오른쪽에서 정조가 4배를 올리는 장면을 상징적으로 묘사하였다.
대성전의 신문(神門) 앞에는 산선과 시위들이 서있고, 그 앞에 수행한 문무백관이 동서로 나뉘어 시좌하였다.

 

그리고 작은 차일이 쳐진 중앙의 명륜당(明倫堂)과 외신문(外神門) 주변에는 시위들이 겹겹이 서서 호위한 채

더욱 엄숙한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다. 반면에 성묘 밖의 길과 산자락에는 구경나온 부민(府民)들이 매우 자유로운

동작으로 묘사되어 대조를 이루고 있다. 8폭 중에서도 산수 표현이 가장 정중하고 뛰어나게 묘사되어 주목된다.

 

문성왕묘의 건물이 1795년 8월 7일에 준공되어'화성성역의궤(華城城役儀軌)'의 도설에 실려 있는 모습과

거의 같은 점으로 보아 이 그림은 이때 정조의 지시에 의하여 새로 개건된 문성왕묘의 모습을 그린 것으로 본다.



 화성능행도팔첩병 제2폭 - 낙남헌방방도(洛南軒放榜圖)

화성·광주·시흥·과천의 유생들을 대상으로 치른 문무과 정시별시(庭試別試)의

합격자 발표 광경을 그린 그림

윤 2월 11일, 화성에서 문무 양과에 걸친 과거시험을 본 뒤 낙남헌에서 그 합격자를 발표하고 시상하는 장면이다.

10일 저녁 화성에 도착하여 하루밤을 유숙하고 난 정조는 가장 학문을 좋아한 제왕답게 공자를 모신 성묘에

배알하고 별시(別試)를 보는 것으로서 화성에서의 첫 행사를 시작하였다. 정조는 먼저 과거를 시작하도록 하교한 다음

험을 실시하는 사이 성묘를 배알하고 다시 행궁으로 돌아와 낙남헌에서 합격자를 발표하는 행사에 친임하였다.

낙남헌을 시위가 겹겹이 에워싼 가운데 정조가 어좌에 앉아있고 그 앞에는 방방관(放榜官)과 대치사관(代致詞官) 등의

입시관원들이 배석하였다. 섬돌 바로 밑에는 탁자 위에 합격증서인 홍패(紅牌)와 어사화(御賜花), 술과 안주가 놓여 있고,
그 앞에 문과 5명과 무과 56명의 합격자들이 머리에 어사화를 꽂은 채 늘어서 있다.

 

합격자보다 많은 사람이 묘사된 것은 혹시 다른 회방(回榜)과 잡과(雜科) 합격자들까지 모두 이 장면에 종합하여

그렸기 때문이거나, 아니면 단순히 화면 구성상 실제보다 많은 인원을 그렸기 때문인 것으로 추측된다.

 

합격자 양옆으로는 동서로 나뉘어 문무반 조신들이 엄숙히 시립 하였는데, 화면 아래 길밖에는 이와 대조적으로 시험에

행했던 복건 차림의 문하들과 그 가족, 구경나온 부민들이 매우 자유롭게 늘어서 있다.

 

혹자는 합격의 기쁨을 축하하고 혹자는 낙방의 슬픔을 억제하지 못하는 등 풍속화가 난만하게 발달하던 시대답게

다양한 표정 연출이 재미있다. 의궤의 '방방도'에 기본을 두면서 보다 성대한 장면으로 확대하였다.




 성능행도팔첩병 제3폭 - 봉수당진찬도(奉壽堂進饌圖)

화성행궁의 봉수당에서 거행된 혜경궁홍씨의 진찬례 행사를 그린 그림 

윤 2월 13일, 정조가 화성행궁의 정당인 봉수당에서 혜경궁 홍씨의 회갑년을 기념하여 진찬례를 올리는 잔치 장면이다.
본디 혜경궁의 생신은 6월 18일이었기 때문에 후에 창덕궁의 연희당(延禧堂)에서 간략한 진찬례가 다시 거행되었지만,

제로는 이것이 본격적인 회갑연인 셈이었다.  이 능행 중 가장 중요한 행사답게 매우 화려하고 성대하게 묘사되었다.

 

화면 위쪽에 거대한 차일을 친 봉수당이 보이고, 그 아래 작은 차일을 친 중양문(中陽門)을 지나 화면 밑으로

좌익문(左翊門)이 보인다. 중앙문 앞에 거대한 용기(龍旗)가 있고 봉수당 왼쪽 뜰에 가마가 있어 혜경궁과 정조가

행차하였음을 말해준다.

 

그러나 혜경궁과 내외명부(內外命婦)는 내외(內外)를 하느라 발을 친 봉수당 안쪽에 있기 때문에 화면에는 보이지 않으며,

정조는 봉수당 안에도 자리가 마련되었지만 봉수당 섬돌 위 왼쪽 병풍 앞에도 자리가 설치되어 화면에 묘사되었다.
봉수당 앞 뜰의 장전(帳殿) 안에는 온갖 화려한 꽃들로 치장하고 곱게 차린 무희들이 춤추는 가운데 혜경궁의 친척인

빈(儀賓)과 척신(戚臣)들이 둘러 앉았다. 그리고 다시 멀리 화면 하부의 중앙문 밖에는 시종한 문무백관들이 동서로

나뉘어 앉아있다.

 

지금 화면에 나타난 장면은 여러 단계로 진행된 진찬의 과정을 한 장면에 종합하여 성대하고 화려하게 묘사한 것이다.
화면 중앙의 장전 안에서 화려하게 춤추는 무희들이 제3작(爵)을 올릴 때 춘 무고(舞鼓)와 대개 끝날 때 추는 선유악

(船遊樂)을 동시에 추고 있는 것이 이를 잘 말해준다. 참석자들이 꽃을 꽂고 있는 것은 혜경궁이 꽃을 하사했기 때문인데 이는 궁중연회에서 의례 있었던 관습이다.

 

봉수당 섬돌에 올린 헌선도(獻仙桃)와 마당에 진열한 청개(靑蓋)ㆍ홍개(紅蓋)ㆍ정절(旌節)ㆍ봉선(鳳扇)ㆍ작선(雀扇) 등이

실로 아름다워 궁중연회의 호사스러움을 잘 보여주는 작품이다.
의궤(儀軌)에서는 같은 제목을 중앙문 안의 장전까지만 설정한 뒤 정조가 헌선도 올리는 장면을 평행사선투시법으로

묘사하였지만, 이 계병(계屛)은 이를 토대로 하여 병풍의 세장한 화면에 맞도록 장면을 확대하고 더 화려한 군무(群舞)

장면으로 바꾸어 묘사하고 있다.




  화성능행도팔첩병 제4폭 - 낙남헌양로연도(洛南軒養老宴圖)

수원부 노인을 초대하여 낙남헌에서 베푼 양로연을 그린 그림

윤 2월 14일 오전, 정조가 낙남헌에서 영의정 홍낙성(洪樂性) 등 능행에 수행한 노대신(老大臣) 15명과 수원부의

노인 총 384명에게 양로연을 베푸는 장면이다.  군병(軍兵)과 시위의장(侍衛儀仗)이 낙남헌 주변의 사방을 둘러싼 가운데

차일을 친 낙남헌의 어좌에 정조가 앉아있고, 그 앞 마루에 융복(戎服)차림의 노대신과 입시관원(入侍官員)들이 앉았다.

 

섬돌앞 뜰에는 서인(庶人)들이 도포 차림으로 줄지어 앉았고, 담장 사이에는 곱게 차린 무희와 붉은 옷을 입은 악사가

늘어서 있다. 그리고 시위군병 밖의 길가에는 부민(府民)들이 이 아름다운 광경을 흡족한 표정으로 구경하고 있다.

 

화면은 지금 낙남헌의 섬돌 위에 악사(樂士)들이 시립한 가운데 정조가 노란 수건(黃細巾)을 내려 노인들의 지팡이 끝에

묶게한 다음 비단 1단(段)씩을 하사하는 장면을 묘사한 것으로 보인다.
그리하여 마당에 앉은 노인들은 모두 지팡이에 노란 수건을 매고 있으며, 그 앞에 집사들이 비단을 받쳐든 채 나누어 주는

동작을 취하고 있다. 엄격한 정면관과 상면관(上面觀)을 결합하여 수직수평성을 강조함으로써 차분하고 격조있는

양로연의 분위기를 연출하였다.




화성능행도팔첩병 제5폭 - 서장대성조도(西將臺城操圖)

화성 성곽의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서장대에서 밤에 군사 조련하는 장면을 그린 그림

윤 2월 12일 밤, 정조가 화성의 서장대(西將臺)에 갑옷을 입고 행차하여 군사조련을 실시하는 장면을 묘사한 그림이다.
동서로 길게 뻗어 규형(圭形)을 이룬 총 4,600보 길이의 장대한 화성 전경을 세장한 병풍화면을 매우 효과적으로 활용하며

아래 위로 길게 설정하였다. 그리고 그 안에 중앙의 행궁과 주변의 시가및 민가를 배치하고, 사방의 성곽에 많은 군사들을

묘사하여 실로 장대한 위용을 과시하고 있다. 가장 위쪽에 차일을 치고 호위군에 둘러싸인 거대한 누대는 팔달산(八達山)

최정상에 자리잡은 서장대로서 정조가 행차한 이 그림의 주제이기 때문에 실제보다 크게 과장하여 강조하였다.

 

화면 제일 아래에 위치한 문은 동문인 창룡문(蒼龍門)이고, 중앙 좌우변의 대문은 오른쪽이 북문인 장안문(長安門),

왼쪽이 남문인 팔달문(八達門)이다. 지금 이 그림에 묘사된 장면은 여러 단계로 이루어진 훈련장면 중에서도 가장 화려한

장관인 횃불 밝히기의 연거(演炬) 장면과 오색등을 다는 현등(懸燈) 장면이다.

 

본래는 횃불을 밝힌 다음(演炬) 횃불을 끄고 다시 깃발을 내린 뒤에(落旗) 등을 다는 것이지만(懸燈)
이를 한꺼번에 묘사하여 더욱 성대한 화면을 연출하였다. 전체 장면은 기본적으로 의궤의 도설과 거의 흡사한데,
특히 세장한 병풍의 화면을 효과적으로 활용하면서 평행사선시점으로 잡은 장면설정과 공간파악이 돋보이는 그림이다.




 화성능행도팔첩병 제6폭 - 득중정어사도(得中亭御射圖)

화성행궁의 득중정에서 정조가 활쏘기를 하고 혜경궁과 함께 불꽃놀이를 즐겼던 장면을 그린 그림

윤 2월 14일 오후 정조가 화성행궁 안의 득중정(得中亭)에서 신하들과 함께 활쏘기를 한 다음
저녁에 혜경궁을 모시고 불꽃놀이〔埋火砲〕를 구경하는 장면이다.
화면 뒤편의 왼쪽에 용마루가 보이고 큰 차일이 쳐지며 노란 용기(龍旗)가 보이는 것이 낙남헌(洛南軒)인데

지금 그 안의 오봉병(五峯屛) 앞에 정조가 앉아 불꽃놀이를 구경한다. 그 뒤 오른쪽으로 상변에 연이어 길게 뻗은

일자집은 득중정이며, 그 계단 앞 어사대(御射臺)에는 지금 혜경궁이 나인들의 호위를 받으며 잠시 행차하여
가마를 열어 놓은 채 불꽃놀이를 구경하고 있다.

 

화면 중앙 아래의 행궁 밖에서 매화포가 폭발하여 신기전이 하늘로 치솟으며 화려한 불꽃놀이의 장관이 펼쳐진다.
주변에는 굉음을 울리며 밤하늘을 수놓는 신기한 불꽃놀이를 구경하는 많은 부민(府民)들이 운집해 있다.

 

그리고 화면 맨 아래 왼쪽 구석에는 행궁에서 동쪽으로 780보 떨어진 수원의 북문 장안문(長安門)이
이층 팔작지붕의 위용을 과시하며 자리잡아 다소 위쪽으로 쏠린 화면의 무게를 적절히 조정해 주고
있을 뿐만 아니라 이 불꽃놀이가 벌어지는 넓은 공간적 장소성을 알려준다.

 


 화성능행도팔첩병 제7폭 - 시흥환어행렬도(始興還御行列圖)

환궁하는 여정중에 숙소인 시흥행궁(始興行宮)으로 향하는 어가행렬을 그린 그림 

윤 2월 15일, 화성행궁을 출발하여 서울로 올라오면서 이제 막 시흥행궁 앞에 다다른 장대한 행렬을 묘사하였다.
처음으로 혜경궁을 모시고 함께 능행하여 무려 6,000여 명의 인원과 1,400여 필의 말이 동원된 가장 성대했던

행렬의 장관을 과시한 장면이다.

 

이런 행렬장면을 더욱 상징적이고 뜻깊은 수원으로의 행차 모습으로 설정하지 않고 서울로 돌아오는 모습으로

묘사한 것은 이 행렬 장면을 공자성묘(孔子聖廟)에 대한 배알이나 혜경궁의 회갑연보다 앞에 배치하기가 저어되었기

때문이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8폭 중에서 회화성과 풍속성이 가장 뛰어난 명작일 뿐만 아니라 조선시대의 기록화

중에서도 무비(無比)의 걸작이다.

 

그림의 내용은 시흥행궁을 멀리 바라보면서 그 남쪽의 안양교(安養橋) 앞길에서 행렬을 잠시 멈춘 다음
정조가 직접 혜경궁에게 미음(米飮)과 다반(茶盤)을 올리는 매우 효성스러운 장면을 담은 것이다.
화면 밑에 정조가 능행을 위해 세운 시흥 행궁이 정조의 치정(治政)을 자랑하듯 거대한 위용을 과시하고 있다.
그 뒤 화면 중앙의 큰 바위가 있는 곳에 미음을 들기 위해 푸른 휘장으로 가린 혜경궁의 가마가 보이고,
그 바로 뒤에 산선(?扇)을 받고 있는 정조의 좌마(座馬)가 서 있다.

 

그리고 그 옆의 길가 빈터에 수라를 실은 수레〔水刺架子〕와 음식을 준비하는 막차(幕次)가 보이는데,
이 수레는 본래의 정상적인 행렬이라면 이보다 훨씬 앞의 기수대(旗手隊) 바로 뒤에 위치해야 되는 것이다.

기수대 앞의 길이 급격히 꺾인 부분에는 임금의 행차임을 알리는 거대한 용기(龍旗)가 펄럭이고,
그 앞에 지금은 비어있는 정조의 정가교(正駕轎)가 위치하고 있다.

전경 행궁의 삼엄한 경비가 오늘밤 정조와 혜경궁이 이곳에서 유숙할 것임을 말해준다.

 

길 양옆에서 구경하는 수만 군민(郡民)들의 다양하고 풍부하며 재미있는 모습들은
이 그림을 조선시대 최고의 풍속화로 승화시켜 주는 더 없이 정이 가는 귀중한 장면들이다.
이 능행에서 정조가 그토록 신경을 썼던 민의(民意)까지 효과적으로 전해주는 우의(寓意)가 느껴진다.




 화성능행도팔첩병 제8폭 - 노량주교도섭도(鷺梁舟橋渡涉圖)

노량진에 설치된 주교를 사용하여 한강을 건너는 환어행렬을 그린 그림

'화성능행도병'의 마지막 폭으로서 윤 2월 16일 노량진(鷺梁津)의 주교(舟橋)를 건너며 서울로 환궁하는

정조와 혜경궁의 행렬장면을 용산 쪽에서 바라보고 묘사한 것이다.
멀리 남쪽의 노량진 용양봉저정(龍槐鳳灣亭)을 뒤로 하고 혜경궁의 화려한 가마가 지금 한강을 가로지른

거대한 주교의 한 가운데 홍살문을 막 통과하고 있다.

 

그리고 그 뒤로 산선(?扇) 시위(侍衛)에 겹겹이 둘러싸인 정조의 좌마(座馬)가 뒤따르는데,
조선시대의 기록화가 대개 그러하듯 정조는 감히 묘사하지 못하고 말만 묘사하는 상징적 기법을 사용하였다.
용양봉저정의 행궁 앞 홍살문 뒤에는 군주쌍교(郡主雙轎)가 막 길을 돌아 다리 쪽으로 다가오고 있다.

 

36척의 교배선(橋排船)과  240쌍의 난간, 3개의 홍살문, 그리고 수많은 상풍기(相風旗)와 군기(軍旗)가 펄럭이는

거대하고  화려한 주교가 긴 병풍의 화면을 실로 효과적으로 활용하며 전개되어
화면 전체를 압도하고 있다. 이 주교는 기왕의 부교(浮橋)에 위험성과 번거로움이 많았기 때문에 1789년 정조가

새로이 고안 설치하며 시작된 것으로 정조의 지혜(智慧)와 애민(愛民)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의궤어 이'주교도(舟橋圖)'가 강조되어 그려진 것도 이 때문인데,
이 그림은 여기에 화려한 행렬을 첨가하여 완성함으로써 이제 정조의 효성(孝誠)까지 담고 있다.
이 병풍의 8폭 중에 환어장면이 2폭에 걸쳐 그려진 것도 주교가 시각적 효과도 좋지만
이처럼 특별한 의미가 담겨 있었기 때문이라 생각된다.

 

주교의 앞뒤로 끝이 없는 수행행렬은 장대한 주교를 더욱 강조해 준다.
그리고 주변에 구경나온 많은 사람들은 이 그림을 더욱 풍부하고 다양하게 꾸며주고 있을 뿐만 아니라
생생한 풍속화의 성격을 부여해 주고 있다.
아울러 주교의 인물과 주변의 경치가 분리되지 않고 적절히 연결되며 조화되도록 만드는
놀라운 조형적 작용도 발휘하고 있다.
여기에 다시 주교가 뒤로 갈수록 좁아지고 주교 뒤편의 정조는 다리 앞의 백성들보다도
작을 정도로 엄격한 초점투시법을 적용하여 묘사함으로써 화면전체가 더욱 생생한 현장감을 얻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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