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5마산 의거
1960년 3월 15일(화) 경상남도 마산에서 자유당 정권의 3·15 부정선거에 항의하여 학생 및 시민들이 벌인
규탄 시위이다. 3·15 정·부통령 선거를 앞두고 자유당 정권이 공권력을 동원해서 다양한 방법으로
부정선거를 자행한데에 항의하여 촉발되었다.
3월 15일 벌어진 시위는 그날 밤 경찰의 발포로 일단락 되었으나 이날 최루탄에 피격되어 사망한 김주열
군의 시신이 4월 11일 마산 앞바다에서 발견되면서 2차 시위로 이어졌다.
이 시위의 영향으로 4·19 혁명이 이루어져 이승만의 하야 선언을 이끌어내었고, 장기 집권을 노렸던
자유당 정권은 종말을 맞았다. 3·15 의거는 한국 현대사 최초의 민주 투쟁으로 기록되었다.
1950년대 말 한국 사회는 한국 전쟁이 남긴 상처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미국의 구호물자가 쏟아져
들어오면서 곡물 가격이 하락하여 농촌 경제는 어려워졌다. 이에 따라 이농 현상이 발생하면서 사람들은
도시로 몰려들었으나 실업률은 23.4%에 다달았다.
사회 전반적으로 정경 유착이 광범위하게 일어나면서 부익부 빈익빈 현상이 가중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1956년 3선에 성공한 이승만 대통령과 자유당 정권은 집권 연장을 위해 1960년 3월 15일 실시된 대통령과
부통령 선거 전후로 부정선거를 광범위하게 실행했다.
당시 이승만 후보의 가장 강력한 경쟁자였던 민주당 대통령 후보인 조병옥이 미국에서 치료를 받다가
선거일 한달 전인 2월 15일 심장마비로 서거하자, 대통령은 이승만 단일 후보로 당선이 확실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자유당 정권에서는 부통령에 이기붕 후보를 당선시키기 위해 다양한 방법으로 부정 선거를 획책했다. 정치깡패와 반공청년단 등을 동원하여 야당 입후보자의 등록서류강탈, 사진기자들에 대한 구타,
청중의 강제동원, 야당 입후보자의 선거연설 방해, 모의투표 실시, 야당 운동원에 대한 살상 감행, 유령 유권자의 조작 등 엄청난 부정선거 운동을 자행했다.
부정 선거를 단속해야 할 경찰 주요 간부는 여권에 충성하는 인물들로 교체되었으며 교육공무원과 교사를
동원, 학부모에게 자유당에 투표하도록 설득하기도 했다. 특히 마산 지역에서는 3·15 선거를 앞두고 자유당 정권의 부정과 비리에 대해 시민의 각성을 초래한 사건이 발생했다.
1958년 총선에서 민주당 후보로 당선된 허윤수 의원이 차기 국회의원 공천과 동양주정 경영권을 약속받고
1960년 1월 5일 민주당을 탈당, 1월 11일 자유당에 입당했다. 허윤수는 3월 4일 동양주정을 인수, 경쟁사였던 무학주정에 매각했다. 정경유착의 대표적인 사례로 거론된 이 사건으로 마산 시민들 사이에 공작정치를
자행하는 자유당 정권과 동양주정을 팔아 넘긴 허윤수에 대한 반감이 확산되었다.
3인조, 5인조 투표, 사전투표 등 선거를 앞두고 자행된 부정선거의 실상이 드러나면서,
3월 15일 10시 30분 민주당 마산시당에서는 선거 포기를 선언하고, 이번 정부통령 선거는 부정선거로
무효임을 가두 방송을 통해 시민에게 알렸다.
오후 2시 30분 부터 민주당 마산시당 간부 30여 명으로 시작한 시위는 시민들이 합세하여 600여 명으로
늘어났으며, 거리에서 경찰과 대치하기 시작했다. 6시 30분 무렵에는 시위 군중이 수천명으로 증가했다.
시위 진압에 나섰던 경찰들은 8시가 넘어도 시위가 멈추지 않고, 때마침 정전으로 시가지가 어둠에 잠기자 시위대에게 최루탄에 이어 실탄을 난사하기 시작했다.
이 과정에서 12명이 사망하고 250여 명의 사상자가 발생했으며 수백 명이 체포되었다.
이날 고등학생 김주열군이 최루탄에 맞아 사망했다. 이날의 시위는 11시 30분 경에 해산했으나
자유당 정권은 시위에 공산당이 개입했음을 주장하며 체포한 시민과 학생들을 고문했다.
4월 11일 11시, 시위때 행방불명되었던 김주열 군의 시신이 눈에 최투탄이 박힌 참혹한 모습으로
마산 중앙부두 앞바다에서 발견되었다. 이에 격분한 학생 및 시민들은 오후 5시에 재궐기하여 자유당정권을 규탄했다. 7시에는 3만여 명이 도립마산병원앞에 모여 마산시청, 마산경찰서, 창원군청으로 몰려가 시위를 계속했고, 8시 30분에는 마산경찰서장 차량을 불태우기도 했다. 이날 경찰이 시위대에게 발포하여 2명이
사망했다. 4월 12일에는 마산고등학교, 마산상업고등학교, 마산공업고등학교, 마산창신고등학교,
마산여자고등학교,마산성지여자고등학교, 마산제일여자고등학교, 마산간호고등학교(지금의 마산대) 3천여 명의 학생들이 시민 1만여 명과 함께 시위를 시작했다. 이들은 마산 시내 곳곳에서 밤 늦게까지 시위를 벌였다. 다음날에는 해인대학(지금의 경남대학교) 학생 200여 명이 시위를 벌였다.
3·15 부정 선거에 대해 항거한 마산 시민과 학생들의 시위에 대한 자유당 정권과 경찰의 가혹한 탄압의
실상이 알려지면서 전 국민의 분노를 자아냈다. 4월 18일 고려대학교에서 부정선거를 무효로 돌리고 구속한
마산 학생들을 석방하라는 학생 시위가 진행되었는데, 거리 행진을 마치고 학교로 돌아오던 학생들이 정치깡패에게 피습당하자 4월 19일 전국적으로 부정선거에 항의하는 시위가 벌어졌고,
이는 4·19 혁명으로 이어졌다.
4월 25일에는 대학교수단에서 시위를 벌이면서 26일 이승만 대통령의 하야 선언을 이끌어내었다.
자유·민주·정의를 기본 정신으로 하고 있는 3·15의거는 한국 현대사에 있어 최초의 민주·민족운동으로
기록되었다.
경남 창원시 마산회원구 3·15성역로 75에 3·15의거의 정신을 기리는 국립3·15민주묘지가 조성되어
4·19혁명 사망자, 부상자, 공로자를 안장하고 있다. (자료출처:Daum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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