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원정(淸遠亭)
예천군 용궁면 무이리 379 소재 / 문화재자료 제533호
국파 전원발(?~1421년) 선생이 만년에 건립한 정자로
임진왜란 때 소실되어 1918년 복원하였다.
척약재 김구용(1338~1384년)선생이 전서로 새긴 "청원정"
바위벽에 새긴 "국파 전선생유허(菊坡全先生遺虛)"
전원발(?~1421년)은 용궁면 무이리 소천마을 출신으로, 호는 국파(菊坡), 본관은 용궁이다.
1315년(충숙왕 2)에 원나라에 가서 고려의 인재를 뽑는 문과에 장원하여 원나라에서 현재 국방부 장관에
해당되는 벼슬인 병부상서(兵部尙書)에 까지 올랐다. 그리고 집현전 태학사를 겸직하였다.
전원발은 자주 황제에게 찾아가 고려는 바다 건너의 작은 나라로서 원 나라에 바치는 세공(歲貢)이 너무 많아
폐단이 있다고 하였다. 그리고 귀국하려 할 때도 원나라 황제 순제(順帝)를 하직하면서,
"고려에서 거두는 세공을 대폭 줄여주십시오."라고 하였다. 순제는 전원발의 애국심에 감탄하여 허락하고,
옷(公服) 한 벌을 내려 주었다. 귀국하여 축산부원군(竺山府院君)에 봉해지고(1354), 조선이 건국된 후
명나라에서도 이와 같이 세공을 적게 받았는데, 태조 이성계는 전원발의 이 공을 치하하여 다시 축산부원군에
봉하여 주었다. 전원발은 조선에서 벼슬을 마다하고 고향 성화천(省火川)의 맑은 물이 굽이치는 강 동쪽 언덕에
청원정(淸遠亭)를 짖고, 이 곳에서 김득배(金得培), 이제현(李齊賢), 김구용(金九容) 등과 사귀었다.
1698년(숙종 24)에 임금이 이르기를, "전원발은 중국에 들어가서 여러 차례 우리 나라의 세공의 폐됨을 아뢰어
지금 편안하게 되었음을 잊지 못하겠으니, 그가 쉬던 성화천을 소천으로 고치라."라고 하였다.
사후에는 소천서원에 제향되었다(1701).
소천재(蘇川齋)
소천서원(蘇川書院)
전원발(全元發)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지방유림의
공의로 1692년(숙종 18)에 정사(精舍)를 설립하고 위패를 모셨다.
선현배향과 지방교육의 일익을 담당하던 중 1869년(고종 6)에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었다가 1968년 지방유림에 의해 복원하였다.
소천서원 강당
사당 숭덕사(崇德祠)
소천서원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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