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국여행 * 문화탐방/한국 문화유적

국보(國寶) 제1호~10호

자즐보 2015. 7. 3. 12:47

 

 

국보(國寶)

국보는 보물급 문화재 가운데 국가에서 법으로 지정한 형태 있는 문화재이다.

우리 민족은 아름다운 자연과 빼어난 슬기를 바탕으로 눈부신 문화의 꽃을 피웠다.

따라서 우리 조상들이 남긴 문화재는 이루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다.

조상들이 남긴 문화재 가운데 역사적 · 학술적 · 예술적 가치가 높아

보물로 지정될 만한 것 가운데 만든 연대가 오래 되고,

그 시대를 대표하며, 기술이 뛰어나고, 형태 · 품질 · 용도가 특이하며

역사적 인물과 관계가 깊은 것들을 국보로 지정한다.

 

국보 지정 대상은 목조건물·석조물·서적·고문서·회화·조각·공예품·고고자료·무기 등이다.

지정번호는 문화재 가치의 높고 낮음을 나타낸 것이 아니고 단순히 지정된 순서이다.

국보는 국가가 소유하는 것도 있고, 개인이나 단체가 소유하는 것도 있다.

국보로 지정된 문화재는 문화재 보호법에 따라 국가의 보호를 받으며,

소유자는 관리 의무를 다하여야 하고, 이동하거나 사고 팔 때는 반드시

문화체육부 장관의 허가를 받아야 한다. 정부와 지방자치단체는 국보를

전시하거나 문화재 관련 책자에 수록하여 학자나 일반 국민에게 공개하여야 한다.

 

국보로 지정된 문화재 가운데는 석탑·석등·비석 등 돌로 만든 것이 가장 많고,

불상·금속공예품과 건축물 등이 그 다음으로 많다. 그 밖에 도자기와 서적·그림 등

여러 종류가 있다. 시대별로는 경주 부근에서 발견된 신라시대문화재가 가장 많고,

백제·고려·조선시대의 것도 많다. 고구려 시대의 것도 더러 있다.

 

 

▼ 국보 제1호, 숭례문(남대문)

조선시대 한양 도성을 둘러싸고 있던 성곽의 정문으로

원래 이름은 숭례문이며, 남쪽에 있다고 해서 남대문이라고도 불렀다.

태조 5년(1396)에 짓기 시작하여 태조 7년(1398)에 완성하였다. 

세종 30년(1448)에 고쳐 지었고, 성종 10년(1479)에도 큰 보수공사가 있었다.

2008년 2월 10일 숭례문 방화 화재로 누각 2층 지붕이 붕괴되고

1층 지붕도 일부 소실되는 등 큰 피해를 입었으며, 5년 2개월에 걸친

복원공사 끝에 2013년 5월 4일 준공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 국보 제2호, 원각사지 십층석탑
서울 종로구 종로 99 (종로2가) 소재

원각사는 지금의 탑골공원 자리에 있었던 절로,

조선 세조 11년(1465)에 세웠다. 조선시대의 숭유억불정책 속에서도

중요한 사찰로 보호되어 오다가 1504년 연산군이 이 절을 ‘연방원’이라는

기생집으로 만들어 승려들을 내보냄으로써 절은 없어지게 되었다.

이 탑은 조선시대의 석탑으로는 유일한 형태로, 높이는 약 12m이다.

대리석으로 만들어졌으며 탑 구석구석에 표현된 화려한 조각이

대리석의 회백색과 잘 어울려 더욱 아름답게 보인다.

탑을 받쳐주는 기단(基壇)은 3단으로 되어있고, 위에서 보면 아(亞)자 모양이다.

기단의 각 층 옆면에는 여러가지 장식이 화사하게 조각되었는데

용, 사자, 연꽃무늬 등이 표현되었다. 탑신부(塔身部)는 10층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3층까지는 기단과 같은 아(亞)자 모양을 하고 있고 4층부터는 정사각형의

평면을 이루고 있다. 각 층마다 목조건축을 모방하여 지붕, 공포,

기둥 등을 세부적으로 잘 표현하였다.

우리나라 석탑의 일반적 재료가 화강암인데 비해 대리석으로 만들어 졌고,

전체적인 형태나 세부구조 등이 고려시대의 경천사지 10층석탑과 매우 비슷하여

더욱 주의를 끌고 있다. 탑의 윗부분에 남아있는 기록으로 세조 13년(1467)에

만들어졌음을 알 수 있으며, 형태가 특이하고 표현장식이 풍부하여

훌륭한 걸작품으로 손꼽히고 있다.

 

 

 

 ▼ 국보 제3호, 북한산 신라 진흥왕 순수비
신라 진흥왕(재위 540∼576)이 세운 순수척경비(巡狩拓境碑) 가운데 하나로,

한강유역을 영토로 편입한 뒤 왕이 이 지역을 방문한 것을 기념하기 위하여 세운 것이다.

원래는 북한산 비봉에 자리하고 있었으나 비(碑)를 보존하기 위하여 경복궁에

옮겨 놓았다가 현재는 국립중앙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비의 형태는 직사각형의 다듬어진 돌을 사용하였으며, 자연암반 위에 2단의 층을 만들고 세웠다.

윗부분이 일부 없어졌는데, 현재 남아 있는 비몸의 크기는 높이 1.54m, 너비 69㎝이며,

비에 쓰여져 있는 글은 모두 12행으로 행마다 32자가 해서체로 새겨져 있다.

내용은 왕이 지방을 방문하는 목적과 비를 세우게 된 까닭 등이 기록되어 있는데,

대부분이 진흥왕의 영토확장을 찬양하는 내용으로 이루어져 있다.

비의 건립연대는 비문에 새겨진 연호가 닳아 없어져 확실하지 않으나,

창녕 신라 진흥황 척경비(국보 33호)가 건립된 진흥왕 22년(561)과

황초령비가 세워진 진흥왕 29년(568) 사이에 세워졌거나 그 이후로 짐작하고 있다.

조선 순조 16년(1816)에 추사 김정희가 발견하고 판독하여 세상에 알려졌으며,

비에 새겨진 당시의 역사적 사실 등은 삼국시대의 역사를 연구하는데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 국보 제4호, 고달사지 부도
경기도 여주시 북내면 상교리 411-1번지 소재

고달사는 신라 경덕왕 23년(764)에 처음 세워진 후, 고려 광종 이후

역대 왕들의 보호를 받아 큰 절로 성장하였다. 고달사에는 석조 문화재들이 많이 남아 있는데,

모두 고달이라는 석공이 만들었다고 전한다. 고달은 가족들이 굶어 죽는 줄도 모르고

절을 이루는 데에 혼을 바쳤다고 하는데, 절을 다 이루고 나서는 스스로 머리를 깎고

스님이 되었으며, 훗날 도를 이루어 큰스님이 되니, 고달사라 불렀다는 전설이 있다.

절터 안에는 깔끔한 모양과 세련된 조각수법의 고달사지 부도를 비롯하여

원종대사 혜진탑비 귀부와 이수(보물 제6호), 원종대사 혜진탑(보물 제7호),

고달사지 석불좌(보물 제8호),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된 

고달사지 쌍사자석등(보물 제282호)이 있다.

 

 

 

 ▼ 국보 제5호, 법주사 쌍사자 석등
충북 보은군 속리산면 법주사로 379, 법주사 (사내리) 소재

법주사 대웅전과 팔상전 사이에 있는 통일신라시대의 석등으로,

사자를 조각한 석조물 가운데 가장 오래되었으며 매우 독특한 형태를 하고 있다.
넓다란 8각의 바닥돌 위에 올려진 사자 조각은 두 마리가 서로 가슴을 맞대고

뒷발로 아래돌을 디디고 서서 앞발과 주둥이로는 윗돌을 받치고 있는 모습이다.

아랫돌과 윗돌에는 각각 연꽃을 새겨 두었는데, 윗돌에 두 줄로 돌려진 연꽃무늬는

옛스러운 멋을 풍기며, 현재 남아있는 사자조각들 가운데 가장 뛰어나 머리의 갈기,

다리와 몸의 근육까지도 사실적으로 표현하였다.

불을 밝혀두는 화사석(火舍石)은 8각으로 높직하며, 네 곳에 창을 내어 불빛이

새어나오도록 하였다. 지붕돌은 처마밑이 수평을 이루다가 여덟 귀퉁이에서

위로 살짝 들려 있는데, 꾸밈을 두지 않아서인지 소박하고 안정되어 보인다.

석등을 세운 시기는 통일신라 성덕왕 19년(720)으로 추측되며,

조금 큰 듯한 지붕돌이 넓적한 바닥돌과 알맞은 비례를 이루어 장중한 품격이 넘친다.

통일신라의 석등이 8각 기둥을 주로 사용하던 것에 비해 두 마리의 사자가

이를 대신하고 있어 당시로서는 상당히 획기적인 시도였을 것으로 보이며,

통일신라는 물론 후대에 가서도 이를 모방하는 작품이 나타났다.

같은 절 안에 있는 보은 법주사 사천왕 석등(보물 제15호)과 함께

통일신라 석등을 대표하는 작품이라 할 수 있다.

 

 

 ▼ 국보 제6호, 중원 탑평리 칠층석탑

  충주시 가금면 탑평리 11-0 소재

남한강의 아름다운 경관과 잘 어우러져 있는 통일신라시대의 석탑으로,

당시에 세워진 석탑 중 가장 규모가 크며, 우리나라의 중앙부에 위치한다고 해서

중앙탑이라고도 부르는 이 탑은 2단의 기단 위에 7층의 탑신을 올린 모습이다.

높은 탑신을 받치기 위해 넓게 시작되는 기단은 각 면마다 여러 개의 기둥 모양을 새겨 놓았고,

탑신부의 각 층 몸돌 역시 모서리마다 기둥 모양의 조각을 두었다. 몸돌을 덮고 있는 지붕돌은

네 귀퉁이 끝이 경쾌하게 치켜올려 있어 자칫 무겁게 보일 수 있는 탑에 활기를 주고 있으며,

밑면에는 5단씩의 받침을 새겨 놓았다. 탑 정상의 머리장식은 보통 하나의 받침돌 위에

머리장식이 얹어지는 신라 석탑의 전형적인 양식에서 벗어나, 이중으로 포개어진

똑같은 모양의 받침돌이 머리장식을 받쳐주고 있다.

기단에서의 기둥조각 배치, 탑신의 몸돌과 지붕돌의 짜임수법으로 보아

통일신라 후기인 8세기 후반에 세웠을 것으로 추측된다. 1917년 탑을 보수할 때

6층 몸돌과 기단 밑에서 사리장치와 유물이 발견되었는데, 특히 6층 몸돌에서 발견된

거울이 고려시대의 것으로 밝혀져 탑 조성 이후 고려시대에 와서

2차 봉안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 국보 제7호, 봉선홍경사 갈기비

충남 천안시 서북구 성환읍 대홍3길 77-48 (대홍리) 소재

봉선홍경사는 고려 현종 12년(1021)에 창건된 절이다.

절이름 앞의 ‘봉선(奉先)’은 불교의 교리를 전하고자 절을 짓기 시작한

고려 안종(安宗)이 그 완성을 보지 못하고 목숨을 다하자, 아들인 현종(顯宗)이

절을 완성한 후 아버지의 뜻을 받든다는 의미로 붙인 이름이다. 현재 절터에는

절의 창건에 관한 기록을 담은 비석만이 남아 있다.

갈비(碣碑)는 일반적인 석비보다 규모가 작은 것을 말하는데, 대개는 머릿돌이나

지붕돌을 따로 얹지 않고 비몸의 끝부분을 둥글게 처리하는 것이 보통이다.

하지만 이 비는 거북받침돌과 머릿돌을 모두 갖추고 있어 석비의 형식과 다르지 않다.

거북모습의 받침돌은 양식상의 변화로 머리가 용의 머리로 바뀌었고,

물고기의 지느러미같은 날개를 머리 양쪽에 새겨 생동감을 더하고 있다.

비몸돌 앞면 윗쪽에는 ‘봉선홍경사갈기’라는 비의 제목이 가로로 새겨져 있다.

머릿돌에는 구름에 휩싸인 용이 새겨져 있다.

이 비는 비문의 내용으로 보아 절을 세운 지 5년이 지난

고려 현종 17년(1026)에 세운 것으로 알려져 있다. 비문은 ‘해동공자’로

불리던 고려시대 최고의 유학자 최충이 짓고, 백현례가 글씨를 썼다.

 

 

 

 ▼ 국보 제8호, 성주사지 낭혜화상탑비

 충남 보령시 성주면 성주리 80-4번지 소재

성주사터에 남아 있는 통일신라시대의 승려 낭혜화상 무염(無染)의 탑비이다.
낭혜화상은 무열왕의 8세손으로 애장왕 2년(801)에 태어나 열세 살 되던 해에
출가,

헌덕왕 13년(821)에 당나라로 유학하여 수도를 통해 깨달음을 얻게 되었고 문성왕 7년(845)에

귀국하여 당시 웅천(지금의 보령)에 있던 오합사(烏合寺)의 주지가 되었다.

이 절에서 선(禪)을 널리 알리고 점점 크게 번성하게 되자, 왕은 ‘성주사’라는

절 이름을 내려주었으며, 진성여왕 2년(888) 89세로 이 절에서 입적하니 왕은 시호를

‘낭혜’라 하고, 탑 이름을 ‘백월보광’이라 내리었다.

절터 서북쪽에 세워진 이 비는 거북 모습의 받침돌 위에 비몸을 세우고

그 위로 머릿돌을 얹은 모습으로 받침돌이 심하게 부서진 채

흙에 묻혀 있던 것을 1974년에 해체·보수하였다.

얼굴의 일부분이 깨져 있는 거북은 머리 위쪽에 둥근 뿔이 나 있고,

뒤로 째진 눈에는 눈썹이 휘말려 있으며, 입은 마치 불을 내뿜으려는 기세이다.

등에는 선명한 이중의 육각무늬를 새기고, 중앙에는 제법 굵직한 구름무늬가

사실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구름무늬 위로는 비몸을 꽂아두는 네모난 홈을

높게 마련하여 각 면을 장식하였다. 길다란 비몸은 앞면에만 비문을 새기고,

위쪽 양 모서리를 둥글게 깎아 놓았다. 맨 위에 올려진 머릿돌은 밑면에

연꽃을 두르고, 그 위로 구름과 용이 서로 뒤엉킨 장면을 입체적으로 조각하였는데,

힘찬 용틀임과 웅장한 기상이 잘 나타나 있다. 앞면에는 받침돌의 거북머리와

같은 방향으로 용머리가 툭 불거져 나와 있어 흥미를 자아낸다.

비문에는 낭혜화상의 업적이 자세히 적혀 있는데, 진골이던 낭혜화상의 가문이

아버지 대에 이르러 6두품의 신분으로 낮아지는 대목도 나타나 있어 당시 신라골품제도의

연구자료로서도 중요한 가치를 지닌다. 최치원이 글을 짓고 그의 사촌인 최인곤이

글씨를 썼으며, 비를 세운 시기는 적혀 있지 않으나, 낭혜화상이 입적한 지 2년 후인

진성여왕 4년(890)에 그의 사리탑을 세웠다는 기록이 있어

이 때 비도 함께 세웠을 것으로 보고있다.



 

 ▼ 국보 제9호, 정림사지 오층석탑

  부여군 부여읍 동남리 254 소재

이 석탑은 미륵사지석탑(국보 제11호)과 함께 백제석탑이

목탑의 번안(飜案)이라고 하는 근거를 보여 주고 있다는 점에서

우리나라 석탑양식의 계보를 정립하는 데 귀중한 자료이다.

1981년 이 사지에 대한 전면발굴이 이루어져서 석탑 주변도 조사되었다.

석탑의 주변일대를 발굴 조사한 결과 가람배치의 전모가 밝혀졌고, 석탑 주변에서

‘太平八年戊辰定林寺(태평8년무진정림사)’라는 명문이 있는 기와가 출토되어

고려 초기에는 정림사라고 불렀던 것이 확실히 밝혀져, 그 뒤 이 석탑의 명칭을

정림사지오층석탑이라 부르게 되었다. 태평 8년은 1028년(현종 19)으로

사찰을 크게 중수한 것으로 본다.

 

 

 ▼ 국보 제10호, 실상사 백장암 삼층석탑
전북 남원시 산내면 대정리 975 소재

실상사는 지리산 천왕봉 서편에 위치한 절로, 통일신라 흥덕왕 3년(828)에

홍척(洪陟)이 창건하였다. 이 곳에서 북쪽으로 얼마쯤 가다보면 백장암이 나타나는데,

실상사에 딸린 소박한 암자로, 그 아래 경작지에 이 탑이 세워져 있다.

낮은 기단 위에 3층의 탑신을 올린 모습으로, 각 부의 구조와 조각에서

특이한 양식과 수법을 보이고 있다. 즉, 일반적인 탑은 위로 올라갈수록 너비와 높이가

줄어드는데 비해 이 탑은 너비가 거의 일정하며, 2층과 3층은 높이도 비슷하다.

층을 이루지 않고 두툼한 한 단으로 표현된 지붕돌의 받침도 당시의 수법에서 벗어나 있다.

또한 탑 전체에 조각이 가득하여 기단은 물론 탑신에서 지붕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조각이 나타난다.

기단과 탑신괴임에는 난간모양을 새겨 멋을 내었고, 탑신의 1층에는 보살상(菩薩像)과

신장상(神將像)을, 2층에는 음악을 연주하는 천인상(天人像)을,

3층에는 천인좌상(天人坐像)을 새겼다. 지붕돌 밑면에는

연꽃무늬를 새겼는데 3층만은 삼존상(三尊像)이 새겨져 있다.

통일신라시대 후기에 세워진 것으로 추측되는 이 탑은 갖가지 모습들의

조각으로 화려하게 장식하는 등 형식에 얽매이지 않은 자유로운 구조가

돋보이고 있어, 당시를 대표하는 아름다운 석탑 중 하나라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