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물(寶物)
보물은 유형문화재 중에서 역사적·학술적·예술적·기술적 가치가
큰것을 문화재 심의위원회의 심의를 거쳐 정부가 지정한 문화재이다.
분류상 국보 다음 가는 격이며, 보물로 지정된 문화재는 문화재 보호법에 의해
국가의 보호를 받는다. 1955년 이전에는 유형문화재는 모두 보물로 지정되었으나,
1962년에 문화재 보호법이 제정·공포되고, 1963년 국보와 보물로 나누어 지정하였다.
▼ 보물 제1호, 흥인지문(興仁之門)
서울특별시 종로구 종로 288(종로 6가 69) 소재
조선시대 한양도성의 동쪽문으로 동대문(東大門)이라고도 하며,
서울 도성의 사대문 가운데 동쪽에 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1397년(태조 6) 도성을 쌓을 때 함께 짓기 시작하여 이듬해에 세워졌다.
1452년(단종 1)에 중수가 있었으며, 조선 말기까지 존속되어 오다가
1869년(고종 6)에 이르러 전반적인 개축이 이루어져 오늘에 이르고 있다.
흥인지문은 정면 5칸, 측면 2칸의 다포계형식의 우진각지붕건물이다.
문의 기부(基部)는 화강암의 대석(臺石)을 잘 다듬어 무사석(武砂石:네모 반듯한 돌로
쌓아올린 축석)을 이루고 중앙에 홍예(虹霓:무지개 모양의 문)를 틀어 출입구를 삼았으며,
기부 위에 목조의 2층 누각을 세웠다. 문의 바깥쪽에는 무사석 한쪽에서 부터
반원형의 평면을 이룬 옹성(甕城:성문의 앞을 가리어 빙 둘러쳐서 적을 방어하는 작은 성)을
쌓아 적에 대한 방비를 견고히 하였는데, 도성 내의 여덟 개의 성문 중 옹성을 갖춘 것은
이 문뿐이다. 이 옹성 역시 창건될 때부터 마련된 것이며, 고종 때 다시 개축되었다.
(자료출처: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보물 제2호, 보신각 종
국립박물관 소장
보신각 동종은 1468년(세조 14년)에 주조되어 정릉사에 걸려 있었다.
이후 원각사로 옮겨졌으나 임진왜란으로 절이 불타 종루로 옮겨졌다.
고종 때 종루에 보신각이라는 현판을 걸게 되어 보신각종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조선시대에는 한양의 성문을 열고 닫는 시각을 알리는 기능을 하였으며, 1984년까지 새해를 맞이하여 보신각종을 타종하는 행사에 사용되었다. 원래의 종은 보호를 위해 국립중앙박물관에 보관하고 있으며 1985년부터는 성덕대왕신종의 복제품으로 제야의 타종 행사를 하고있다. (자료출처:위키백과)
▼ 보물 제3호, 대원각사비
서울특별시 종로구 종로2가 파고다공원 소재
1471년(성종 2) 건립되었으며 전체높이 4.9m, 비신 너비 1.3m이다.
원각사는 파고다공원 자리에 있던 절로서, 조선시대 태조가 한양에 도읍을 정할 때
조계종 본사로 세웠는데, 조계종이 없어지자 관서(官署)로 썼다.
세조가 간경도감에서 "원각경(圓覺經)"을 번역하고, 회암사사리탑에서
사리를 나누어 온 것을 기념하기 위하여 이곳에 다시 원각사를 짓고
마당에 13층사리탑을 세웠다. 비문은 당대 명신들이 짓고 썼다.
반구형의 이수는 비신과 한 돌로 보주를 받든 형상의 쌍룡을 조각하였다.
귀부는 둔중한 몸체로 일반적인 육각형 귀갑문 대신에 사다리꼴 평행세선을 새겼으며,
연잎 모양의 비좌(碑座)와 물고기 비늘을 조각한 꼬리나 다리가 특이하다.
(자료출처: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보물 제4호, 중초사지 당간지주
경기도 안양시 석수동 중초사지에 있는 당간지주이다.
서쪽 지주의 바깥쪽에 새겨진 명문은 모두 6행 123자로, 해서체로 쓰였다.
이 글에 의하면 신라 흥덕왕 1년(826) 8월 6일에 돌을 골라서 827년 2월 30일에
건립이 끝났음을 알 수 있다. 당간지주에 문자를 새기는 것은 희귀한 예로,
만든 해를 뚜렷하게 알 수 있는 국내에서 유일한 당간지주다.
(자료출처:위키백과)
▼ 보물 제5호, 고달사 원종대사 혜진탑비 귀부 및 이수
경기도 여주시 북내면 상교리 419-3번지 소재
고달사터에 세워져 있는 비로, 원종대사를 기리기 위한 것이다.
원종대사는 신라 경문왕 9년(869)에 태어나, 고려 광종 9년(958)에 90세로 입적하였다.
광종은 신하를 보내어 그의 시호를 ‘원종’이라 하고, 탑이름을 ‘혜진’이라 내리었다.
비는 일찍이 무너져 비신은 국립중앙박물관에 옮겨져 있으며,
이곳 절터에는 귀부와 이수만이 남아 있다.
받침돌의 거북머리는 눈을 부릅떠 정면을 바라보고 있는데,
눈꼬리가 길게 치켜올라가 매우 험상궂은 모습이다.
다리는 마치 땅을 밀치고 나가려는 듯 격동적이고, 발톱의 사실적 표현은
땅을 꼭 누르고 있는 듯하다. 목은 길지 않아 머리가 등에 바짝 붙어 있는 듯 하다.
등에는 2중의 6각형 벌집 모양이 정연하게 조각되었으며, 중앙부로 가면서
한 단 높게 소용돌이치는 구름을 첨가하여, 비를 끼워두는 비좌(碑座)를 돌출시켜 놓았다.
머릿돌은 모습이 직사각형에 가깝고, 입체감을 강조한 구름과 용무늬에서는
생동감이 넘친다. 밑면에는 연꽃을 두르고 1단의 층급을 두었다.
이 거북받침돌과 머릿돌은 탑비에 기록된 비문에 의해 975년에 조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거북의 머리가 험상궂은 용의 머리에 가깝고, 목이 짧고 앞을 똑바로 바라보고 있는 점,
비머리의 표현이 격동적이며, 특히 소용돌이치는 구름무늬의 번잡한 장식 등은
통일신라 후기에서 고려 전기로 진전되는 탑비형식을 잘 보여주고 있다.
(자료출처:문화재청)
▼ 보물 제6호, 고달사 원종대사 혜진탑
경기도 여주시 북내면 상교리 산46-1번지 소재
이 탑은 3단으로 이루어진 기단 위에 탑신과 지붕돌을 올린 형태로,
전체적으로 8각의 평면을 기본으로 하고 있지만 기단부는 특이한 구조다.
기단부는 네모난 바닥돌에 연꽃잎을 돌려 새겼다. 아래받침돌은 네모난 형태이며,
가운데받침돌 윗부분부터 8각의 평면이 보인다. 즉 윗부분에 1줄로 8각의 띠를 두르고,
밑은 아래·위로 피어오르는 구름무늬를 조각하였다. 그 사이에는 거북이가 몸을 앞으로 두고,
머리는 오른쪽을 향했으며 이를 중심으로 돌아가면서 4마리의 용이 구름 속에서 날고 있다.
윗받침돌에는 연꽃이 새겨져 있다.
탑신은 4면에 문(門)모양이, 다른 4면에는 사천왕입상(四天王立像)이 새겨져 있다.
지붕은 처마가 수평이나 귀퉁이 부분에서 위로 향하였고 꽃장식이 달려 있다.
꼭대기에는 지붕돌을 축소해 놓은 듯 한 머리장식이 올려져 있다.
이 탑의 주인공인 원종대사는 통일신라 경문왕 9년(869)에 태어나
고려 광종 9년(958)에 입적한 고승이다. 건립연대는 원종대사탑비의
비문에 의하여 고려 경종 2년(977)으로 추정되고 있다.
(자료출처:문화재청)
▼ 보물 제7호, 고달사지 석조대좌
경기도 여주시 북내면 상교리 420-5번지 소재
고달사는 신라 경덕왕 23년(764)에 창건되었으나,
누구에 의해 창건되었는지 확실히 알 수 없다. 이 석불대좌는
불상은 없어진 채 대좌만 있는데, 보존상태가 거의 완벽하다.
받침돌은 위·중간·아래의 3단으로, 각기 다른 돌을 다듬어 구성하였는데,
윗면은 불상이 놓여져 있던 곳으로 잘 다듬어져 있다. 아래받침돌과 윗받침돌에는
연꽃잎을 서로 대칭되게 돌려 새겼다. 이 대좌가 사각형으로 거대한 규모이면서도
유연한 느낌을 주는 것은 율동적이면서 팽창감이 느껴지는 연꽃잎의 묘사 때문이다.
이와 같은 연꽃잎의 표현 수법은 여주 고달사지 승탑(국보 제4호) 아래받침돌과
매우 비슷하며, 가운데 꽃잎을 중심으로 좌우로 퍼져나가는 모양으로
배열하는 방법은 고려시대의 양식상 공통된 특징이다.
조각솜씨가 훌륭한 사각형 대좌의 걸작으로, 절터에 있는 여주 고달사지 승탑이
고려 전기의 일반적인 양식을 따르고 있는 것으로 보아,
이 대좌도 10세기 후반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자료출처:문화재청)
▼ 보물 제8호, 서봉사 현오국사 탑비
경기 용인시 수지구 신봉동 산110번지 소재
서봉사의 창건에 대한 기록은 없고 절터의 크기로 보아 아주 큰 규모의 절로 추정한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임진왜란 때 절에서 떠내려오는 쌀뜨물이 10리나 흘러내려와
왜적이 물을 따라 올라가서 절을 불태웠다고 한다. 이곳은 탑비의 비각을 세우는
공사를 하던 중에 기록이 남아있는 기와조각이 발견되어 서봉사의 옛터임이 밝혀졌다.
명종 15년(1185)에 세워진 이 탑비는 현오국사(玄悟國師)의 행적을
후대에 알리고자 만들어졌다. 보통 부도와 함께 건립되는데 절터에 부도의 흔적은 없고
이 비석만 남아 있다. 화강암의 비받침위에 점판암으로 만들어진 비몸돌이 놓여있는 단촐한 모습이다.
비받침부분의 윗면은 4변을 비스듬히 잘라내었고, 비문이 새겨지는 비몸에도
윗부분의 양 귀끝을 사선으로 접듯이 잘라서 마무리하였다.
비문에 의하면, 현오국사는 15세에 불일사(佛日寺)에서 승려가 된 후
부석사(浮石寺)의 주지를 거쳐 명종 8년(1178) 53세의 나이로 입적하였다.
왕이 크게 슬퍼하여 국사(國師)로 삼고 시호를 ‘현오(玄悟)’라 한 뒤
동림산 기슭에서 화장하였다. 그 외에도 글을 지은 이와 건립연대 등이 기록되어 있다.
전체적인 조형이 간략한 고려 후기 석비의 새로운 양식을 보여준다.
(자료출처:문화재청)
▼ 보물 제9호, 강화 하점면 오층석탑
인천 강화군 하점면 장정리 산193번지 소재
이 탑은 무너져 있었으나 1960년 수리하여 다시 세운 것이다.
파손된 곳도 많고, 없어진 부재도 많아서 3층 이상의 몸돌과 5층의 지붕돌,
머리장식 부분 등이 모두 사라진 상태이다. 낮은 언덕의 중턱에 위치하고 있는 절터로
그 규모를 알 수가 없으며, 가람을 배치한 흔적도 찾아볼 수 없다.
탑은 1층의 기단 위에 5층의 탑신을 올린 모습이다.
기단의 네 모서리에는 기둥모양을 새겼다. 탑신부는 1층 몸돌만
두 장의 돌로 짜여있고, 그 이상은 각각 하나의 돌이다.
1층 몸돌의 크기에 비해 2층 몸돌의 크기가 급격히 줄어들어 있다.
지붕돌은 밑면에 1층은 4단, 나머지층은 3단의 받침을 두었으며,
추녀밑은 반듯하다가 네 귀퉁이에서 약간 치켜올려져 있다.
신라석탑의 양식을 이어받아 변형된 고려시대 석탑의 전형적인 특징을
보여주는 작품으로 고려 후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짐작한다.
(자료출처:문화재청)
▼ 보물 제10호, 사인비구 주성동종(강화동종)
강화 고려궁지에 보관되어 있는 조선시대 동종으로
높이 176㎝, 지름 145㎝, 두께 21㎝이다. 종신에 있는 명문을 통해
1711년(숙종 37) 주조되었음을 알 수 있다. 종의 정상부에 있는 용뉴에는
쌍룡이 조각되어 있고, 종신을 상하로 구분하는 중앙의 횡대는
한국종의 전통형태에서 벗어난 이례적인 형식이다.
어깨부분에 비스듬히 나온 턱이 있는데 이는 고려동종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입화형의 퇴화형식인 것 같다. 윗부분에는
4개의 유곽이 있는데, 보상당초무늬가 장식된 넓은 유곽대가 있고
그 안에 연꽃으로 표현한 9개의 유두가 있다. 종신에 당좌가 없는 점,
어깨부분의 입화장식이 퇴화한 점, 유곽이 어깨에서 떨어진 곳에 있는 점,
용뉴에 음관이 없는 점 등은 조선 후기 동종의 특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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