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대구여행*문화탐방/문경시

운강 이강년기념관

자즐보 2014. 9. 15. 10:20

 

 

운강 이강년기념관

雲崗李康秊記念館

 문경시 가은읍 완장리 소재

 

의병대장 운강 이강년 선생의 항일투쟁의 숭고한 위업을 재조명하고

후손들에게 역사의 산 교육장으로 관광 문경의 토대를 마련하고자

기념관을 건립하고 2002년 4월 11일에 개관하였다.

 

 

 

 

 

 

 

 

 

도창의대장 운강 이강녕 시비(雲崗 李康秊 詩碑)

총상을 입고 : 탄환이여 자못 무정하여라 / 복사뼈만 상하게 하단말가 /

신복을 꿰뚫었던들 욕됨이나 없을 것을

 

옥중에서 : 일평생 이 목숨을 아껴본바 없거늘 / 죽음앞둔 지금에사 삶을 어찌 구하랴만 /

오랑캐 쳐부수길 다시하기 어렵구나 / 이 몸 비록 간다해도 넋마저 사라지랴

 

형장에서 : 우리나라 이천만 민족이 장차 나와 같은

죽음을 당할 것이니 이것이 제일 원통하도다.

 

 

 

운강동상(雲崗銅像)

 

 

도체찰사 도창의대장 운강이강년선생상

都體察使 都倡義大將 雲崗李康秊先生像

 

 

 

유물전시관(遺物展示館)

 

 

 

 

 

 

 

 

 

 

 

 도창의대장 운강이강년선생기적비

 都倡義大將 雲崗李康秊先生紀積碑

 

 

해동의사운강이선생강년지비

海東義士雲崗李先生康秊之碑

 

 

창의문(倡義門)

 

 

의충사(義忠祠)

이곳은 운강선생의 영정을 모신 사당으로 매년 9월에 봉행제를 올린다.

 

 

 

운강 이강년

본관은 전주. 자는 낙인(樂寅), 호는 운강(雲岡),

아버지는 기태(起台)이며, 효령대군(세종대왕의 형)의 19세손이다.

3세 때 옥편에서 신체부의 속자를 알만큼 총명하였으며,

장성해서는 무예와 병서,그림에도 뛰어난 재주를 보였다.

 

1880년(고종 17) 무과에 급제하여 절충장군행용양위부사과(折衝將軍行龍驤衛副司果)로서

선전관(宣傳官)이 되었으나, 1884년 갑신정변이 일어나자 사직하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1895년 8월 민비가 일본군에 의해 학살되고 단발령이 내려지자, 1896년 1월 11일

문경에서 의병을 일으켜 문경·평천·조령 등지에서 활약했다.

 1907년 일본의 침략이 더욱 노골화되어 헤이그 밀사사건으로 고종이 강제로 물러나고

한일신협약으로 한국군대가 해산당하자, 영춘(永春)에서 더 큰 규모의 의병부대를 일으켰다.

1907년 7월 7일 제천에서 일본군과 교전한 것을 비롯하여, 풍기·문경·단양·연풍·영월·죽령 일대에서

일본군 수비대를 격파하는 등 1908년 7월까지 충청도·강원도·경기도 일대에서

약 500명을 이끌고 치열한 항일무장투쟁을 전개하면서 일본군을 공포의 도가니로

몰아 넣고 많은 전과를 올렸다.

 

청풍(淸風)·작성(鵲城) 전투에서 부상을 입고 1908년 6월 4일

일본군 수비대에 체포되어 같은 해 7월 8일에 서울의 일본군 헌병사령부로

압송되었다가 평리원으로 옮겨 9월 22일에 교수형을 선고받고

10월 13일 사형되었다. 1962년 건국훈장 대한국민장이 추서되었다.

(자료출처 : 백과사전)

 

 

운강이선생신도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