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국여행 * 문화탐방/서울♡인천

삼전도(三田渡)

자즐보 2014. 8. 30. 09:47

 

 

 

삼전도(

서울특별시 송파구 삼전동 소재

 

삼밭나루라고도 불렸으며 한강 상류의 남안에 위치하여

서울부리도(浮里島, 또는 蠶室島인 현재의 잠실지역)를 연결하는

나루터로서 교통의 중요한 기능을 담당하였다. 삼전도는 1439년(세종 21)

신설되었는데 이는 한강에 설치된 최초의 나루터 중 하나였다.

 

삼전도는 서울에서 경기도 광주남한산성에 이르는 길목에 있었고,

영남로를 지나는 사람 중에서 특히 상인들이 주로 이용하였던 교통의 요지였다.  

 주로 사람과 말이 건너던 곳이었고 우마(牛馬)의 집결지였으며,

판교(板橋)와 연결되는 상업도로로서의 기능도 수행하였다.

 

처음은 도승(渡丞)이 한명 배치되었으나 뒤에 별장(別將)으로 고쳤으며

어영청(御營廳)의 관할이었다. 한말에 이르러 도진회사(渡津會社)가 설립되어  

관할하게 되었다. 이에 속하였던 선박은 최고 여섯 척까지 운영되었다.  

 

이 지역은 병자호란 당시 남한산성의 함락으로 인조가 청군(淸軍)에게

 항복을 한 곳으로, 나라의 전승비인 삼전도비(三田渡碑)가 있다.

 

또한, 이곳은 강물이 많아서 1950년대 말경까지는 나룻배가 다녔으나

 지금은 잠실교가 놓여지고, 주변의 농촌경관이 주거지화되면서

나루터와 상업도로의 요충지로서의 기능은 완전 상실되었고  

현재는 주거지와 시가지로 되었다. 

 

 

 1637년 1월 30일 한강 이곳 삼전도에서는

우리나라 역사에서 가장 치욕적스러운 사건이 벌어진다.
이제까지 오랑캐라고 멸시했던 청나라의 황제에게 조선의 왕 인조가

세 번 절하고 아홉 번 머리를 조아리게 된다.

 

1637년 1월 30일 인조는 묘시(오전 5∼7시) 무렵

대신들과 호위군을 동반하고 남한산성 행궁을 나서...

 

 

 

남한산성 서문(우익문)을 통하여

청 태종의 지휘본부가 있던 삼전도로 향했다.

인조는 국왕의 의례복인 면복도 입지 못하고 남색 융복(戎服)을

차려입은 초라한 행색이었다. 이를 지켜보던 수많은

군사들과 백성들은 통곡하였다.

 

 

 

 그 옛날 삼전도(三田渡)자리이다.

왕은 이웃 헌릉과 선릉.정릉으로 갈 때는 이 나루를 이용했다.

현재는 서울시 송파구 삼전동 부근으로 석촌호가 들어섰으며... 

 

 

이곳이 옛 삼전나루터였다는  표지석만 있을 뿐이다.


 

 

드디어 인조는 삼전도에 마련된 수항단(受降檀·)에 나아갔다.

인조가 청태종에게 눈물을 흘리면서 세차례 큰 절을 하고 아홉 차례 머리를 땅에

박았다는 항례(항복 의식)는 역사상 가장 굴욕적인 순간 가운데 하나다.

 
단상 아래 도착한 인조는 청태종이 있는 단상을 향해 ‘삼배구고두(三拜九叩頭)’의

예를 행하였다.  세번 절하고 아홉번 머리를 조아리는 이 의식은

여진족이 그들의 천자를 배례하는 의식 절차였다.

 
인조는 땅에 엎드려 대국에 항거한 죄를 용서해 줄 것을 청하였고,
청태종은 신하들로 하여금 조선국왕의 죄를 용서한다는 칙서를 내렸다.

 

 

 조선 15대 임금 광해군 재위 때 여진족 추장 누루하치가

부족을 통일하여 후금이라는 나라를 세웠다.
후금의 태조(누루하치)는 중원을 통일하기 위해 명나라를 공격했다.
이에 명나라는 임진왜란 때 자기네가 파병해 줬다는 이유로

조선에게 도와달라고 했다. 현명한 광해군은 명나라가 질것을 예감하고 

명나라에 파병을 하는 동시에 후금에게는 싸울 뜻이 없었음을 전한다.

결국 조선은 피 한 방울 안 흘렸다.

광해군은 명나라를 배신했다는 이유로 신하들에게 쫓겨났다.
반정으로 왕이 된 인조는 친명배금(명나라와 친하고, (후)금나라를 배척한다)정책을 썼다.

할아버지 선조가 일본에게 무방비로 전국을 유린당한지 40년만이다.

그 인조는 그 임진란에서 역사의 교훈을 얻지 못하고 후금에게 가장 치욕적인 참배를 당한다.

오랑케 후금과의 전쟁을 두 번이나 치러야 했다.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이다.
병자호란 때 오랑캐 청나라 황타이지는 삼전도에서 인조에게 항복을 받아낸 것이다.
"삼배구고두"의 굴욕적인 사건이 바로 삼전도에서 일어난다.

 

 

삼전도 비(

 

 

 병자호란이 끝난 후 청 태종은 세자와 왕자들을 인질로 데리고

본국으로 돌아갔다. 청나라의 요구에 의해 비문이 건립되게 되었다.
비문 건립에 관한 최초의 기록도 1637년 3월부터 등장한다.
그해 3월 12일 비변사에서 삼전도 비석이 이미 준비되었으니

비문을 얻어다가 새기면 된다는 보고가 그것이다.


그해 3월 20일 인조의 재가가 떨어진다. 그 비문은 수항단 터에 세우기로 한다.
한강과 가까운 곳에 위치하고 있고 지세가 상대적으로 낮아 장마철에

물이 들 것에 대비하여 지면에서 5~6장 높이로 돌계단을 쌓아 올렸다.
이 공사는 공조가 주관하고 호조와 병조의 후원하에 인부들에게 용가(雇價)를

지불하고 공사에 착수하였다. 공사는 10월 30일경에 모두 끝나고

비문의 내용을 각자하는 일만을 남겨 놓게 되었다.
당시 서울에 있던 청나라 사신 마대부(馬夫大) 등이 11월 25일

삼전도의 비가 들어 설 자리를 방문하여 기단과 귀부 등의

규모를 일일이 확인하고 돌아갔다. 비문을 찬술하는 일은

당연히 청에서 문장을 받아다가 새기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문장을 지으라는 인조의 전교가 내려져 비변사에서는

극비리에 적격자를 탐문하였다. 당시에는 누구도 이러한 비문을

지으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에 비변사에서도 극비리에 인물을 천거하였다.
인조는 비변사에서 천거한 인물들에게 급히 비문을 지어 올릴 것을 명하였다.

 

 

 

이들 가운데 이경전은 병으로 세상을 떠나 자연스럽게 빠졌고,

그 밖에 세 사람은 11월 27~29일 사이에 모두 글을 지어 올렸다.

인조는 이경석이 쓰기 싫어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를 조용히 불러 중국 춘추시대의 월나라 제2대 왕인 句踐이 吳나라에서

치욕을 참고 신첩 노릇을 하면서 와신상담하다가 끝내 夫差에게 당한

치욕을 갚았다는 고사를 인용하면서   ‘나라의 存亡이 달려 있는 일이며,

후일을 도모하는 것은 나의 역할이니 오늘은 다만 문자로 저들의 비위를 맞추어

일을 더 격화되지 않도록 하는 것 뿐이다’라고 하면서

간곡하게 비문의 찬술을 부탁하였다.

 

이경석은 자신의 명예보다는 국가의 안위를 먼저 생각한 끝에

어려운 결단을 내리고 비문을 짖게 되었다.

이경석은 자신에게 글을 가르쳐 준 형 이경직에게 편지를 보내
"글을 배운 것이 천추의 한이 됩니다"고 말한다.
훗날 이 비문의 글로 송시열과 그 제자들로 부터 많은 공격과 수모를 당한다.

다시 고쳐 쓴 비문은 이듬 해인 인조 16년(1368) 2월에

사신으로 파견된 유림(柳琳)에 의해 심양으로 보내졌다.

이것이 다시 조선으로 돌아와 청나라의 간섭과 요구로 한문과 만주어

그리고 몽고어로 나뉘어 각자(刻字) 작업에 들어가 이듬해에 완성되어

인조 17년(1639) 12월 8일에 비가 세워졌다.  
글씨는 오준(1587∼1666)이 썼고 '대청황제공덕비(大淸皇帝功德碑)'란

전서(篆書) 제목은 여이징(呂爾徵, 1588∼1656)이 썼다.

비석은 대리석 계통인데 오랜 세월에도 불구하고 명문이 잘 남아있다.
비석의 앞면 왼쪽을 몽
고문자, 오른쪽을 만주글자 그리고 뒷면을 한자로 새긴 희귀한 예이다.
비석 위쪽의 이수(螭首)에는 여의주(如意珠)를 중심으로 두 마리의 용이 화려하게 새겨졌다.
귀부(龜趺)는 17세기 석비의 전형을 보여준다.

몸체에 비해 머리가 지나치게 크고 비석을 받치는 비좌(碑座)를 연잎 모양으로 새겼다.

 

 

 

청일전쟁 후 고종 32년에 굴욕적인 역사를 잊어버리기를 위하여

이 비를 강물 속에 쓰러뜨렸으나, 일제강점기 때 일제가 우리 민족이

다른 민족에게 항복한 역사를 알리기 위하여 일부러 다시 세웠다고 한다.
1945년 우리 민족이 일본으로부터 독립을 한 후, 이 지역 주민들이 땅속에 파 묻었다.
1963년 홍수로 다시 모습이 드러나 비를 다시 세워 두었다.

파란만장한 역사를 가지고 있는 삼전도비다.

 

 

 

 

大淸皇帝功德碑

원문
大淸崇德元年冬十有二月 寬溫仁聖皇帝 以壞和自我 始赫然怒 以武臨之 直擣而東 莫敢有抗者
時我寡君棲于南漢 凜凜若履春氷 而待白日者 殆五旬 東南諸道兵 相繼崩潰 西北帥逗撓峽內
不能進一步 城中食且盡 當此之時 以大兵薄城 如霜風之眷秋蘀 爐火燎鴻毛 而 皇帝以不殺爲武
惟布德是先 乃降勅諭之曰,來, 朕全爾不屠之. 有若英馬諸將 承皇命相屬於道, 於是, 我寡君集文部諸臣,
謂曰, 予托和好于大邦, 十年于茲矣. 由予惛惑 自速天討 萬姓魚肉 罪在予一人 皇帝猶不忍屠殺之
諭之如此 予曷敢不欽承 以上全我宗社 下保我生靈乎. 大臣協贊之 隨從數十騎 詣軍前請罪
皇帝乃優之以禮 拊之以恩 一見而推心腹 錫賚之恩 遍及從臣. 禮罷, 旣還我寡君于都城 立召兵之南下者
振旅而西 撫民勸農 遠近之雉烏散者 咸復厥居 詎非大幸歟. 小邦之獲罪上國久矣. 己未之役 都元帥姜弘立
助兵明朝 兵敗被擒 太祖武皇帝 只留弘立等數人 餘悉防回 恩莫大焉 而 小邦迷不知悟.
丁卯歲 今皇帝命將東征 本國君臣 避入海島 遣使請成 皇帝允之 視爲兄弟國 疆土復完 弘立亦還矣.
自茲以往 禮遇不替 冠盖交跡 不幸浮議扇動 搆成亂梯 小邦申飭邊臣 言涉不遜 而 其文爲使臣所得
皇帝猶寬貸之 不卽加兵 乃先降明旨 諭以師期 丁寧反覆 不翅若提耳面命 而終未面焉.
則小邦君臣之罪 益無所逃矣.
皇帝旣以大兵圍南漢 而又命偏師 先陷江都 宮嬪王子 曁卿士家小 俱被俘獲 皇帝戒諸將 不得擾害
令從官及內侍看護 旣而大霈恩典 小邦君臣及其被獲眷屬 復歸於舊 霜雪變爲陽春 枯旱轉爲時雨
區宇旣亡而復存 宗社已絶而還續 環東十數千里 咸囿於生成之澤 此實古昔簡策所稀觀也. 於戱盛哉.
漢水上流三田渡之南 卽皇帝駐蹕之所也. 壇場在焉. 我寡君爰命水部 就壇所增而高大之, 又伐石以碑之
垂諸永久. 以彰夫皇帝之功功之德 直與造化而同流也. 豈特我小邦 世世而永賴 抑亦大朝之 仁聲武誼
無遠不服者 未始不基于茲也. 顧寨天地之大 畫日月之明 不足彷彿其萬一.
謹載其大略 銘 曰,

天降霜露 載肅載育 惟帝則之 竝布威德 皇帝東征 十萬其師 殷殷轟轟
如虎如貔 西蕃窮髮 曁夫北落 執殳前驅 厥靈赫赫 皇帝孔仁 誕降恩言
十行昭回 旣嚴且溫 始迷不知 自貽伊척 帝有明命 如寐之覺 我后祗服
相率而歸 匪惟怛威 有德之依 皇帝嘉之 澤洽禮優 載色載笑 爰束戈矛
何以錫之 駿馬輕裘 都人士女 乃歌乃謳 我后言旋 皇帝之賜 皇帝班師
活我赤子 哀我蕩析 勸我穡事 金甌依舊 翠壇維新 枯骨再肉 寒해復春
有石巍然 大江之頭 萬載三韓 皇帝之休.

嘉善大夫 禮曹參判 兼 同知義禁府事 臣 呂 爾徵 奉敎 篆.
資憲大夫 漢城府 判尹             臣 吳 竣 奉敎 書.
資憲大夫 吏曹判書 兼 弘文館大提學 禮文館大提學 知成均館事
                                臣 李 景奭 奉敎 撰.

崇德四年十二月 初八日 立.


해석문
대청 숭덕(崇德)원년(인조 14,1636) 겨울 12일에 관온 인성황제가 우리 측이 유대관계를 무너뜨린 일로
진노하여, 무력을 행사해서, 곧장 동쪽으로 진격하여 들어오니 감히 대항하는 자가 없었다.
그 때 우리 과군(인조)은 남한산성에 있으면서, 봄날에 얼음판 밟고 서서, 떠오르는 해를 기다리듯,
마음이 바짝 죄였던 기간이 거의 50일이었고, 동남쪽의 각 도 군사는 계속하여 붕괴되고,
서북쪽의 군사는 협곡에 머물러 한 발짝도 진격하지 못하였으며, 성안에는 식량이 바닥났다. 이러한 때에
대병으로 성을 공격하는 것은 서릿바람이 가을낙엽을 날리고, 이글거리는 화롯불이 기러기 털을 태우는
것과 같은 것인데도, 황제는 살생을 하지 않는 것을 무용으로 알고, 덕을 베푸는 일을 우선으로 하여
항복하라는 칙명을 내려서 유시하기를, "와라, 짐이 너희를 결코 도륙하지 않을 것이다." 하고,
영.마(英兒大와 馬夫大)등, 여러 대장이 황제의 명을 받아, 길을 오갔다. 그리하여 우리 과군은
문무 제신을 모아 놓고, 이르기를, "내가 대국과의 우호화친을 의탁하여 이로부터 10년이 되었다.
나의 어리석음으로 말미암아 스스로 하늘의 징벌을 불러 만백성이 죽게 되었으니,
그 죄는 나 한 사람에게 있다. 그런데 황제는 오히려 차마 도륙하지 못하여, 이와 같이 유시하시니,
내 어찌 감히 삼가 그 뜻을 받들어, 위로는 나의 종묘사직을, 아래로는 나의 생령을 보전하지 않을 것인가"
하니, 대신이 그 말에 동조하였다. 마침내 수십 기를 앞세우고, 군영앞에 나아가 죄를 청하니, 황제는
예로써 우대하고, 은혜로써 쓰다듬으며, 한번 보고서 마음을 허여하는 한편 예물을 하사하는 은전이,
따르는 신하들에게 두루 미쳤다.
예가 끝나자, 즉시 우리 과군을 도성에 돌려보내고, 남하하던 군대를 불러 정돈하여 서쪽으로 철수하고,
백성을 위후하며, 농사일을 권장하니 사방으로 꿩들처럼 흩어졌던 사람들도 다 제자리로 돌아왔다.
이 어찌 큰 다행이 아닌가?

우리 소국은 대국에 죄를 얻은 지 오래이다. 기미년(광해군 11년,1619년)에 도원수 강홍립이
명나라에 구원병으로 나갔다가 패배하여 사로잡혔을 때, 태조 무황제는 강홍립 등 몇명만 남기고,
나머지는 다 놓아 돌려보냈으니, 그 은혜가 더없이 컸는데도 소국은 어리석어 깨닫지 못하였고,
정묘년(인조 5년,1627년)에 현 황제가 장수를 명하여 동국을 정벌하자 본국의 군신이 군대를 피하여
섬(강화도)으로 들어가 사신을 보내 화침을 청하니, 황제는 허락하고 형제국으로 간주하였으므로
이 나라 강토가 다시 무사하고 강홍립도 돌아왔다. 그 후로는 예우가 한결같고 사신이 오가던 중
불행이도 뜬소문이 퍼져나가 혼란의 원인을 만들었고 소국이 변신(邊臣:변방을 지키는 신하)을
경계시키면서 말이 공손하지 못하였는데 그 글이 사신의 수중에 들어갔다. 그러나 황제는
오히려 너그럽게 용서하시어 즉시 군대를 출동하지 않고 먼저 조서를 내려 군대를 보내줄 기한을
유시하면서 반복하여 부탁하기를 흡사 직접 얼굴을 대하고 말하듯 하였는데도
끝내 그 요청을 들어주지 않았으니 소국 군신의 죄는 더욱 피할 수없게 되었다.

황제는 이미 대군으로 남한산성을 포위하는 한편, 편사(偏師:한쪽 군대)를 명하여 먼저 강도를
함락하여 빈궁,왕자및 경사들의 가족들이 모두 포로로 잡혔다. 황제는 여러 장수에게 피해를 가하지
말라고 경계하고 시종관원과 내시로 하여금 간호하도록 하였다. 이윽고 은전을 크게 베풀어
군신과 사로잡혔던 가족들이 다시 옛날로 돌아가니, 서리 눈밭이 봄날씨로 변하고 가뭄이 단비로 변하여
나라가 멸망했다가 다시 보존되고 종묘사직이 끊기었다가 도로 이어졌다. 그리하여 동국 수천리의 강토가
다 생육해준 덕을 입었으니 이는 옛 서책에서도 보기 드문 일이다.

아, 훌륭하다.
한강 상류 삼전나루의 남쪽은 곧 황제가 주필(駐蹕:천자가 행차를 머무름)한 곳인데 그곳에 제단터가 있다.
우리 과군은 수부(水府:工曹)에 명하여 제단을 증축하여 높고 크게하고 또 돌을 다듬어 비를 세워서
영원히 황제의 공덕이 곧 천지조화와 같음을 드러냈으니 이 어찌 우리 소국이 대대로 길이 힘을
입을 뿐이겠는가 한편 어떤 나라도 복종하지 않음이 없는 대국의 어진 명성과 용맹한 의리가 여기에
근본이 되지 않음이 없을 것이다. 다만 광대한 천지를 모사하고 밝은 일월을 그리자니 그 만분의
하나도 비슷하게 하기에도 부족하다.

삼가 그 대략만을 실어 놓으니, 명하여 왈

하늘이 서리와 이슬을 내려
죽이기도 하고 살리기도 한다
오직 황제가 그것을 본받아
위엄과 은택을 아울러 편다
황제가 동쪽으로 정벌함에
그 군사가 십만이었다
기세는 뇌성처럼 진동하고
용감하기는 호랑이나 곰과 같았다
서쪽 변방의 군사들과
북쪽 변방의 군사들이
창을 잡고 달려 나오니
그 위령 빛나고 빛났다
황제께선 지극히 인자하시어
은혜로운 말을 내리시니
열 줄의 조서가 밝게 드리움에
엄숙하고도 온화하였다
처음에는 미욱하여 알지 못하고
스스로 재앙을 불러왔는데
황제의 밝은 명령 있음에
자다가 깬 것 같았다
우리 임금이 공손히 복종하여
서로 이끌고 귀순하니
위엄을 두려워한 것이 아니라
오직 덕에 귀의한 것이다
황제께서 가상히 여겨
은택이 흡족하고 예우가 융숭하였다
황제께서 온화한 낯으로 웃으면서
창과 방패를 거두시었다
무엇을 내려 주시었나
준마와 가벼운 갖옷이다
도성 안의 모든 사람들이
이에 노래하고 칭송하였다
우리 임금이 돌아오게 된 것은
황제께서 은혜를 내려준 덕분이며
황제께서 군사를 돌리신 것은
우리 백성을 살리려 해서이다
우리의 탕잔함을 불쌍히 여겨
우리에게 농사짓기를 권하였다
국토는 예전처럼 다시 보전되고
푸른 단은 우뚝하게 새로 섰다
앙상한 뼈에 새로 살이 오르고
시들었던 뿌리에 봄의 생기가 넘쳤다
우뚝한 돌비석을
큰 강가에 세우니
만년토록 우리 나라에
황제의 덕이 빛나리라

가선대부 예조참판 겸 동지의금부사 신 여의징 봉교 전
자헌대부 한성부 판윤             신 오 준 봉교 서
자헌대부 이조판서 겸 홍문관대제학 예문관대제학 지성균관사
                                신 이 경석 봉교 찬

숭덕4년(인조 17년,1639년) 12월 초 8일에 세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