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선릉(宣陵) * 정릉(靖陵)
사적 제199호 / 서울 강남구 삼성동 소재
선릉(성종 & 정현왕후 릉)
선릉은 9대 성종과 부인 정현왕후의 무덤이다.
성종은 유교사상을 정착하여 왕도정치를 실현하고자 사림을 성장시켜
훈구세력을 견제하고, 정치기반을 조성함으로써 조선 초기의
전반적인 체제를 안정시켰다.
선릉은 왕릉과 비릉이 각각 다른 산등성이에 있는 동원이강의 형식으로
왼쪽 등성이의 비릉에는 병풍석을 세우지 않았고, 다른 석물들은 왕릉과 같으며
『국조오례의』를 따르고 있다. 왕릉에는 12면의 병풍석을 세우고
그안에 동물의 머리에 사람의 모습을 한 십이지신상을 새겼으며,
세조의 광릉 이후 세우지 않았던 병풍석을 성종의 선릉부터 다시 세웠다.
난간석은 12칸이며 그 밖에 양석·호석·망주석·문인석 등의 석물이 있다.
문·무인석의 얼굴은 사실적으로 표현되었으나 몸통은 입체감이 없다.
임진왜란 때는 선·정릉의 양릉이 훼손되는 변을 겪었다.
제사를 지내는 방은 양릉의 사이에 있으며, 여름철의 침수를 피하기 위해
층단에 지었는데 이러한 예는 선릉·정릉 뿐이다.
홍전문(紅箭門)
영혼이 출입하는 문으로 홍살문 또는 신문(神門)이라고도 한다.
홍살문에서 정자각까지 폭 3m의 돌길은 참도(參道)라 하며
왼쪽 폭이 넓고 약간 높은 길이 영혼이 다니는 신도(神道),
오른쪽 길은 산 사람들이 다니는 어도(御道)이다.
정자각(丁字閣)
제사를 모시는 곳으로 제향공간의 중심 건물이다.
신계(神階), 정자각의 왼쪽에 있는 계단으로 영혼이 오르는 계단이다.
어계(御階), 신계 옆에 있는 계단으로 산 사람들이 이용한다.
예감, 제례가 끝나고 지방을 태우는 곳으로 망료위(
선릉 비각과 비
조선국 성종대왕 선릉 정현왕후 분좌강
朝鮮國 成宗大王 宣陵 貞顯王后 墳左岡
수복방(守僕房)
정자각의 동남쪽 앞에 위치하며 능지기가 근무하는 건물
성종대왕 릉
12면의 병풍석과 12칸의 난간석을 두르고 봉분 좌우측에 망주석(望柱石)을 세웠다.
봉분 둘례에는 능을 수호하는 의미의 석호(石虎)와
사악한 것을 물리친다는 의미의 석양(石羊)을 배치했다.
봉분 앞 사각형의 혼유석(魂遊石 혼령이 노니는 곳), 상석이라고도 한다.
혼유석을 받치는 북모양의 돌은 고석(鼓石)으로 사악한 것을 경계하는 의미가 있다.
혼유석 앞에는 좌우로 왕명에 복종한다는 뜻이 있는 문석인(文石人)과
왕을 호위하는 무석인(武石人)이 서 있고, 그 한발 뒤에 석마(石馬)가 서 있다.
가운데는 왕릉의 장생발복을 기원하는 장명등(長明燈)이 있다.
성종대왕의 계비 정현왕후 릉으로 가는 길...
정현왕후 릉
왕후 릉에는 병풍석이 없고, 다른 석물들은 왕릉과 같다.
난간석주(欄干石柱)
정릉(중종 릉)
정릉은 11대 중종의 단릉(왕만 모셔진 릉)이다.
중종은 연산군의 잘못된 정치를 바로 잡기위해 노력하였으나,
개혁파와 공신파의 정치적 논쟁이 끊이지 않아 조정이 안정되지 못하였다.
정릉은 원래 중종 제1계비인 장경왕후의 무덤인 희릉의 오른쪽 언덕에 있었으나
제2계비인 문정왕후 윤씨가 풍수지리상 불길하다고 하여 현재의 자리로 옮겼다.
무덤 주변의 석물은 선릉의 석물제도를 본떴다.
조선왕릉 중 왕만 단독으로 있는 릉은 후대에 왕릉이 된
단종의 장릉을 제외하고 태조의 건원릉과 중종의 정릉뿐이다.
조선국 중종대왕 정릉
朝鮮國 中宗大王 靖陵
재실(齋室)
500살이 넘은 은행나무 보호수
역사문화관 및 관리사무소
선릉 정릉의 귀요미ㅎ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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