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5월 8일
JSA공동경비구역
공동경비구역(共同警備區域, Joint Security Area, JSA)은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비무장지대에서
서로 대면하고 있는 지역이다.
1953년 7월 27일 판문점에서 체결된 6.25 전쟁 정전협정에 의해
만들어졌으며, 정전협정에 관한 업무를 처리할 군사정전위원회가
판문점에 설치되었고, 군사정전위원회 인근 지역을 유엔군과 북한군이
공동으로 경비하게 되었다. 유엔군과 북한군이 경비를 하는 이유는
정전협정이 유엔군측과 북한군측(북한과 중국) 사이에 체결되었기 때문이다.
2004년 이후 공동경비구역의 경비 임무는 국군이 단독적으로 수행하나,
지휘통제권은 계속 UN사령부가 가지고 있으므로, 주한미군 일부 요원들과
중립국 감시단(스위스, 스웨덴 대표)이 주둔하고 있다.
JSA안보견학관
판문점[板門店]
문산과 개성을 연결하는 1번국도 도로상에 있으며
6·25전쟁중 휴전회담이 열린 곳으로 남북한 분단의 현장이다.
서울에서 통일로를 따라 북으로 약 50㎞, 개성 동으로 약 8㎞,
북위 38°선의 남쪽 5㎞ 지점에 있다. 6·25전쟁 전에는 초가 몇 채뿐이었던
한촌(閑村)이었으나, 1951년 10월 25일 이곳에서 휴전회담이 열리면서
국내외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휴전회담은 처음 1951년 7월 개성에서 본회담을 시작했지만,
중립지대로 결정된 회담장소가 양측의 공방전으로 위협을 받게 되자
그해 9월 6일 판문점으로 장소를 옮겼다. 1953년 7월 27일 이곳에서
북한·중국과 국제연합(UN)군 간에 전문 5조 36항으로 된
휴전협정이 조인됨으로써 개전 후 3년, 회담시작 후 2년 1개월 만에
6·25전쟁은 휴전상태로 끝을 맺게 되었다. 그때부터 이곳은
UN과 북한측의 '공동경비구역'으로 정해졌고 그해 8월부터
9월초까지의 포로교환도 이곳에서 이루어졌다.
판문점의 공동경비구역은 전후좌우 경계간의 직선거리가 800m에 불과하나
이곳에는 군사정전위원회 본회의장을 비롯해 UN측의 '평화의 집',
자유의 집 2층에는 지난 1971년 9월 20일 열린 남북적십자회담의
합의에 따라 대한적십자사연락사무소가 설치되어 있다.
이 사무소에는 북한과의 직통전화가 가설되어 있으며 2명이 상주하고 있다.
판문점은 지난 1953년 휴전협정이 맺어진 후 1967년의 '이수근위장귀순사건',
1976년의 '판문점 도끼만행사건' 등으로 198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긴장감이 감돌았다.
그러나 1970년대 들어 세계적인 긴장완화 추세로 한반도에도 대화의 분위기가
무르익어 판문점은 남북간 접촉 및 회담의 장소로 자주 등장했다.
특히 1971년 8월 남북적십자 예비회담, 1972년 7월 7·4남북공동성명이
이곳에서 열렸다. 이때부터 판문점 내의 중립국감시위원회 회의실은
실무접촉과 예비회담 장소로 북측 지역의 판문각과 UN군측의
자유의 집은 본회담 장소로 활용되어 왔다.
1980년대에 들어서는 기존의 적십자회담 외에도 경제회담, 국회회담,
로스앤젤레스 올림픽 단일 팀 구성 등이 이곳에서 열렸다.
그리고 1985년 9월 20일부터 4일 동안 서울과 평양에서 이루어진
'이산가족고향방문단 및 예술공연단 교환공연'은 남북분단 이후
최초로 판문점을 통과한 민간차원의 왕래로 기록되었다.
1988년부터 재야단체와 학생들에 의해 통일논의가 시작되었으며
곧 민간차원에서도 활기를 띄었다. 그해 8월 그동안 중단되었던
'남북국회회담'이 재개되었는데 예비접촉부터 시작하여
10여 차례 판문점에서 회담이 열렸다.
1990년에는 남북한 직접대화의 길이 열려 남북고위급 예비회담이 열렸으며,
이후 남북고위급회담에 참가한 대표들은 이곳을 통해서 '돌아오지 않는 다리'를 건너
돌아오기도 했다. 남북한간에는 휴전위반사례가 현격히 줄어들고 있고,
각종 회담과 교류가 부쩍 늘고 있다. 그리고 판문점 지역 남방 한계선
1㎞ 미군 경비구역이 국군에 이관되는 등 최근 판문점은 한국 민족에게
분단의 상징이기보다는 남북한 직접 대화 및 교류의 장으로 인식되고 있다.
도끼만행사건 현장
1976년 8월 18일 판문점 공동경비구역 내 국제연합(UN)군측
초소 부근에서 미루나무 가지치기 작업을 감독하던 미군 장교 2명이
북한군 50~60명에게 도끼로 살해당한 사건이다.
이날 오전 10시 45분쯤 미군 장교 2명과 사병 4명,
한국군 장교 1명과 사병 4명 등 11명이 "돌아오지 않는 다리"
남쪽 UN군측 제3초소 부근에서 시야를 가리고 있는
미루나무의 가지를 치는 한국인 노무자 5명의 작업을 지휘·경호하던 중,
북한군 장교 2명과 20여 명의 사병이 나타나 "나뭇가지를 치지 말라"고
요구했으나 우리측 경비병이 작업을 계속하자, 북한군 장교와 북한초소에서
2대의 트럭에 분승한 50~60명의 북한병사들이 달려와
도끼·쇠꼬챙이·몽둥이 등을 휘두르며 폭행하여 미군장교 2명을
도끼로 살해하고 나머지 9명에게 중경상을 입힌 뒤
UN군 트럭 3대와 초소를 파괴하고 돌아갔다.
사건 직후 주한미군사령부는 주한미군 장병들의 휴가취소와
부대복귀명령을 내리는 한편, 주한미군과 한국군은
데프콘 3호(경계상태돌입)를 발령하고 전투태세를 갖추었다.
미국은 백악관·국무부·중앙정보국(CIA) 등 행정부 고위관리들로
특별대책위원회를 구성, 대책을 논의하는 한편 F-4전폭기, F-111전폭기
각 1개 대대를 한국기지에 배치하고, 핵항공모함 레인저호를
한국해역으로 이동시키는가 하면, B-52폭격기를 급거 출동시키고
오키나와에 주둔중인 미해병대 1,800명을 한국에 증파하는 등
강경한 대응을 취했다. 이와 동시에 헨리 키신저 국무장관은
내셔널방송(NBC) TV회견을 통해 북한의 해명과 배상을 요구했다.
동시에 8월 21일 새벽 7시 데프콘 2호(전쟁돌입상태)하에서
문제의 미루나무 절단작업에 나섰다. 포드 대통령의 지시에 따라
한·미 양국간 협의결정으로 실시된 이 작전에는 건십헬리콥터 26대,
B-52 중폭격기 3대, F-4 및 F-111 폭격기 수십 대가 판문점 상공을
엄호하는 가운데 3백여 명의 한·미 양군 기동타격대가 투입되어
미루나무를 완전 절단하여 제거하였다.
문제가 크지자 북한의 김일성이 8월 21일 유감의 뜻을 표명하는
사과문을 UN군측에 전달함으로써 사건은 일단락되었고, 9월 1일부터는
판문점공동경비지구를 남과 북으로 분할경비하기로 합의해
사건은 19일 만에 마무리되었다.
이 합의로 1976년 9월 16일부터 판문점 공동경비구역에도
군사분계선을 연결하여 남쪽은 한국군이 북쪽은 북한군이
각 각 경비를 하게 되었다.
돌아오지않는 다리
남한과 북한사이의 군사분계선을 가로지르며
공동 경비 구역 서쪽에 흐르는 사천에 위치한 다리로
1953년 7월 27일 휴전협정 후 이 다리를 통해 포로 송환이 이루어졌다.
본래의 다리 이름은 "널문다리"였으나 포로들이 한번 다리를 건너면
다시는 돌아올 수 없다고 해서 "돌아오지않는 다리"로 불리게 되었다.
이 후 돌아오지 않는 다리가 포로 송환용으로 사용 된 적은
1968년 푸에블로호 선원들이 석방되어 이 다리를 통해
대한민국으로 건너 온 때가 마지막이다.
이 다리는 1976년 8월 18일 도끼 살인사건이 발생하기 전까지는
북한군측에서 판문점으로 들어오는 용도로 자주 사용하였으나
사건 발생 이후 국제연합사령부는 공동경비구역 내에서도
군사분계선을 구분 짓도록 하였고, 북한이 판문점 서쪽에
새로운 다리를 만들면서 돌아오지 않는 다리는 쓰이지 않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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