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진당(養眞堂, 보물 제1566호)
상주 양진당은 검간(黔澗) 조정(趙靖)이 1626년 처가인 안동의 천전동에 있던
99칸 가옥을 옮겨 지었으며, 1807년(순조 7)에 중수를 하였다. 양진당은 전체적으로 정면 9칸,
측면 7칸의 규모의 ‘ㅁ’자형 평면을 한 고상식 건물로서 퇴칸 전면에 세운 6개 기둥은 통재를
사용하였는데, 특이하게 하층부분에는 방형으로 치목하고 상부는 원형으로 다듬었다.
지붕은 정침의 툇마루 상부만 겹처마로 하고 나머지는 홑처마로 하였는데, 겹처마의 경우
일반적으로 원형 서까래에 방형 부연을 얹는데 비해 양진당은 서까래를 네모지게 다듬어
부연과 같은 모습을 취하게 했다. 본채의 3칸 온돌방 전면과 3칸 대청 배면에 나있는
창호는 모두 중간설주가 있는 영쌍창이다. 이 건물은 소위 고상식 주거에 속하는 것으로
건물 바닥이 지면에서 1미터 이상 높게 마련하면서 고상식 주거에서는 보기 드문
구들을 설치한 점에서 조선시대 주거유형의 다양성을 보여주는 귀중한 사례이다.
방이 두 줄로 나열되는 겹집의 형식을 취하고 있는 점도 특색이며 기둥은 굵은
부재를 사용하면서도 모서리를 접어서 투박하게 보이지 않게 하는 기술적 성숙도를
보이고 있어 역사적·학술적·예술적 가치가 높은 건물로 평가된다.
부엌, 정지라고 했다
안채 뒷마당 장독대
양진당중건기념비
- 조정(趙靖) |
1555(명종 19)~1636(인조 14). 본관은 풍양(豊壤), 광헌(光憲)의 아들이다. 자(字)는 안중(安仲)이며, 호(號)는 검간(黔澗)이다. 선친의 묘소 아래에 검계(黔溪)라는 작은 개울이 있어 호로 삼았다. 김성일(金誠一), 정구(鄭逑)의 문인(門人)이다. 1592년(선조 25) 왜적이 침입하자 함창(咸昌) 황영사(黃嶺寺)에서 창의(倡義)하여 이봉(李逢)의 좌막(佐幕)이 되었다. 뒤에 순찰사(巡察使) 김성일(金誠一), 안동수성장(安東守城將) 김용(金涌)등에게 찾아가 토적(討賊)에 관해 건의하였다. 그해 12월에는 창의장(倡義將) 이봉(李逢)의 대신으로 보은(報恩)에 가서 여러 의병장들과 의거(義擧)에 관해 정약(定約)하였다. 1596년(선조 29)에 도체찰사(都體察使) 류성룡(柳成龍)의 막하종사(幕下從事)로 활약하였고, 이듬해에 기원(基遠)과 영원(榮遠) 두 아들을 망우당(忘憂堂) 곽재우(郭再祐)에게 보내어 화왕산성(火旺山城) 의병에 참여케 하였다. 1599년(선조 32)에 희릉참봉(禧陵參奉)에 임명되어 광흥창(廣興倉), 군기시(軍器寺)의 주부(主簿) 등을 지냈다. 1603년(선조 36) 사마시(司馬試)에 합격였다. 호조좌랑(戶曹佐郞)을 지내고, 1605년 증광문과(增廣文科)에 급제하여 호조좌랑(戶曹佐郞) 겸 춘추관기사관(春秋館記事官)이 되고 사헌부감찰(司憲府監察),예조좌랑(禮曹佐郞), 대구판관(大邱判官), 경주제독(慶州提督)을 지냈다. 이어 해남현감(海南縣監), 공홍도(충청도)도사(公洪道都事), 청도군수(淸道郡守)등을 지내면서 치적이 있었다. 인조반정후(仁祖反正後)에 김제군수(金堤郡守)를 지내고 이괄(李适)의 난(亂) 때에는 왕(王)을 공주(公州)로 호종(扈從)하였다. 1626년에 형조정랑 겸 춘추관기주관(刑曹正郞 兼 春秋館記注官)과 통례원상례 겸 춘추관편수관(通禮院相禮 兼 春秋館編修官), 그리고 사섬시정(司贍寺正)을 지내고 이듬해 봉상시정(奉常寺正)으로 전직하였으며, 1632년에 군자감정(軍資監正)에 제수되었으나 취임하지 않았다. 1642년(인조 20)에 이조참판(吏曹參判)에 증직(贈職)되고 1730년(영조 6)에 의성(義城 : 당시는 상주(尙州)에 속했음)의 속수서원(涑水書院)에 추향(追享)되었으며, 2008년 상주(尙州)의 장천서원(長川書院) 추원당에 배향되었다. 시문(詩文)을 모은 『검간집(黔澗集)』과 자필본(自筆本)인 『임란일기(壬亂日記)』 7책이 전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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