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대구여행*문화탐방/영주시

풍기 금선정

자즐보 2012. 7. 8. 22:06

 

 

 

금선정(錦仙亭) 

 

 

 

 

 

 

 

 

 

 

 

 

 

 

 

황준량(1517년,중종 12 ~ 1563년,명종 18)

황준량의 본관은 평해(平海)로 원조는 고려시대 시중(侍中) 황유중(黃裕中)이다.

그의 고조는 황연(黃鋋), 증조는 황말손(黃末孫)이며 사온주부(四醞主簿)를 지냈다.

할아버지는 황효동(黃孝童), 아버지는 황치(黃觶)인데 모두 벼슬을 하지 않았다.

어머니는 창원황씨로 황한필(黃漢弼)의 딸이다.


처의 본관은 영천으로 이문량(李文樑)의 딸이며 농암 이현보(李賢輔)의 손녀이다.

황준량은 아들이 없어 동생인 황수량(黃秀良)의 아들 황영(黃瑛)을 후사로 삼았다.


원래 선조들이 처음부터 어디에 거주하였는지 정확하지는 않으나,

고조인 황연이 영천에서 풍기로 이주하여 후손들은 대대로 풍기 지역에서 거주하였다.

 

금계 황준량은 1517년(중종 12) 풍기 지역에서 태어났다. 태어나서부터 자질이 남달라서

일찍부터 문자를 해독하고 말을 하기만 하면 다른 사람들을 놀라게 하여

기이한 아이(奇童)라 불려졌다. 18세에 국자감시(國子監試)에 응시하여

책문(策文)을 지었는데, 시험감독이 그 책문을 보고 감탄하면서

그의 명성은 더욱 자자해지게 되었다.

 

황준량은 중앙의 벼슬보다 신녕현감(新寧縣監), 단양군수(丹陽郡守),

성주목사(星州牧使) 등 외직을 통해 지방의 교육을 부흥시키고

민생의 고통을 경감시키는 업적을 많이 남김으로써

고을의 선비와 백성들에게 추앙을 받았다.


35세인 1551년(명종 6) 신녕 현감에 부임한 황준량은 백성의 진휼에 힘썼고

전임관의 부채를 절약과 긴축으로 보충하고, 부채문권(負債文券)은 태워버림으로써

백성의 부담을 덜어주고자 하였다.


그러나 무엇보다 그가 주력한 것은 학교(學校)의 부흥이었고,

백학서원(白鶴書院)의 창설은 학교 부흥에 대한 그의 의지를 잘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그는 백학서원을 보고 느낀 감회를 시를 통해서 표현하였다. 

“옷깃에 노리개를 차고 당에 올라 모두 어진 이를 바라니,

벽을 비추는 은 갈고리에 붓이 사다리 같네.

옛 골짜기에 황무지를 개간하여 강론할 자리를 마련하고,

미친 물결을 둘러막아 아름다운 못을 만드네.

존심(存心)의 요체는 시(詩) 석 자이고,

주경(主敬)을 담당하는 스승은 예(禮) 한편이라.

읊으며 돌아가니 춘흥에 저절로 서로 이끌리는 구나.”

41세인 1557년(명종 12) 황준량은 단양 군수가 되었는데,

당시 단양은 남아 있는 집이 없을 정도로 곤궁한 상황이었다.

그는 이러한 폐단을 목격하고 「단양진폐소(丹陽陳幣疏)」를 올려서

백성의 폐해가 되는 원인을 조목별로 올려서 경각심을 불러일으켰다.

그 결과 단양은 10년간 면세가 되는 특혜를 입게 되었고,

그것을 계기로 떠돌던 백성들이 모여들었다고 한다.

이 외에도 단양향교(丹陽鄕校)를 중수하고 우탁(禹倬)을 배향하여

지방 내의 학풍을 일신하고자 노력하였다.


44세인 1560년(명종 15)에는 성주 목사가 되었는데,

역시 학교의 부흥에 전력을 다하였다. 전임 목사인 노경린(盧慶麟, 1516~1568)이 세운 영봉서원(迎鳳書院)을 증수하여 규모를 더욱 넓혔으며, 오건(吳健, 1521~1574)을

성주의 교관(敎官)으로 삼아 제자들을 모아 교육을 주관하고 감독하게 하였고,

매월 한번씩 회강하여 글을 외우고 의문이 나는 곳은 토론하도록 하여 근면의 여부에

따라 상벌을 주는 제도를 마련하기도 하였다. 성주 동쪽에 공곡서당(孔谷書堂)·팔거현(八莒縣)에 녹봉정사(鹿峯精舍)를 세웠고, 그 결과 교화가 사방에 이르고 각자의 자질에 따라 성취한 자들이 적지 않았다고 한다.


황준량은 벼슬살이에 뜻이 없어 노년에 돌아가기 위해 죽령(竹嶺) 아래에 있는

금계(錦溪)에 금양정사(錦陽精舍)를 짓고는 책을 보관하고 도를 강론하는

장소로 삼고자 하였다. 그러나 그 뜻을 이루어지기도 전에 47세의 나이로

세상을 뜨게 되었다. 그는 자신이 꿈꾸던 금계에서의 노년의 삶을 시로 표현하였다.


“휘어 꺾여 맑은 산골 물을 따르고, 얽히고 돌아 끊어진 다리를 건너네.

언 구름이 돌구멍에서 피어나고 찬 눈이 소나무 끝에 쌓이네.

자리를 편 듯 바위 모양이 예스럽고 병풍을 두른 듯 산이 높네.

봄이면 한 초가집에 돌아가서 고기 잡고 나무하면서 늙으리.”

이황은 황준량의 효성과 우애가 남달랐다고 평가한다.

물건이 생기면 모친을 봉양하거나 자매에게 나누어 줄 정도였지만

정작 본인은 장사를 지내는 날 상복이나 관하나 변변한 것이 없을 만큼

청빈하였다고 한다. 또한 이황은 그가 아름다운 산수를 지날 때 그냥 지나치지 못하여

풍경을 보며 배회하고, 시를 읊느라 밤이 되도록 집에 가는 것을 잊을 정도로

감수성이 풍부하고 속세에 미련이 없는 소박한 사람이라고 평가하였다.

 

 

풍기읍 금계리 장승과 물레방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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