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국여행 * 문화탐방/경기도

구리 세계유산 조선왕릉 동구릉(東九陵)

자즐보 2012. 4. 1. 14:09

 2012년 3월 31일

 

 

동구릉(東九陵)

 

경기도 구리시에 있는 조선시대 왕과 왕비의 아홉 능으로

1.조선 태조의 건원릉  2.문종과 현덕왕후의 현릉

3.선조와 의인왕후 및 계비 인목왕후의 목릉  4.인조 비 장렬왕후의 휘릉

5.현종과 명성왕후의 숭릉  6.경종 비 단의왕후의 혜릉  7.영조와 계비 정순왕후의 원릉

8.문조와 신정왕후의 수릉  9.헌종과 효현왕후 및 계비 효정왕후의 경릉을 이른다.

1970. 5.26.사적 제 193호로 지정, 경기도 구리시 인창동에 위치하고 있다.

 

조선시대 태조에서 순종까지 27대에 이르는 왕과 왕비(계비 포함)의 능은 모두 44개이다.

그 중 연산군과 광해군의 무덤은 능이 아니고 묘이므로 정확하게는 42개의 능과

2개의 묘가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연산군이나 광해군도 일단 왕으로 쳐주고

44개 능으로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조선왕릉 44개 중
북한지역에 있는 제1대 태조의 정비 신의고황후 한씨(태종의 생모)의

'제릉'과 제2대 정종과 정안왕후의 '후릉'을 제외하고는 조선시대 왕릉 대부분을

서울근교에서 찾아볼 수 있다.

 

사람을 묻는 장소인 능, 원, 묘 등의 무덤의 명칭은 다음과 같이 구별한다.
 

*능(陵) : 왕과 왕비의 무덤

*원(圓) : 왕세자와 왕세자비, 왕세손과 왕세손비 또는 왕의 생모인 빈(嬪)과

            왕의 친아버지 무덤

*묘(墓) : 대군, 군, 공주, 옹주 등 왕족과 일반인의 무덤. 장희빈의 무덤은 능이 아니라 

            대빈묘이다. 연산군과 광해군의 묘는 능이 아니고 묘이다.

*총(塚) : 누구의 무덤인지 알지 못하지만 벽화나 유물 등 특징적인 것이 있는 경우

*분(墳) : 유물이 없고 주인공도 없는 경우

 

 

 

▼ 동구릉의 주차장

 

 

▼ 주차장 주변의 운치있게 자란 소나무 

 

 

 

조선 태조고황제 시비

태조가 왕위에 오르기 전 삼각산(북한산) 백운대에 올라

앞을 내다보면서 자신의 포부를 읊은 “登白雲峯”이라는 시다.

引手攀蘿上碧峰(인수반라상벽봉)
        댕댕이 덩굴을 휘어잡으며 상봉에 올라가니

一庵高臥白雲中(일암고와백운중)
       큰 암자 한 채 흰구름속에 높이 누워 있네

 若將眼界爲吾土(약장안계위오토)
       만약에 눈에 들어오는 세상을 내 땅으로 만든다면       

楚越江南豈不容(초월강남기불용)

초나라 월나라 강남인들 어찌 받아 들이지 않으리

 

 

▼유네스코 세계유산 조선왕릉(2009년 6월30일 등재) 

 

 

▼동구릉 종합안내도

 

 

▼동구릉 출입문 

 

 

▼출입문을 들어서면 오른쪽에 있는 "동구릉 역사문화관"   

 

 

▼홍살문,신성한 지역임을 알리는 문.

홍문(紅門) 또는 홍전문(紅箭門)이라고도 한다. 

 

 

 

홍살문을 세운 지주,돌에 구멍을 내어 나무를 박아 놓았다. 

 

 

홍살문을 지나 왕릉으로 가는 길 

 

 

▼동구릉 재실, 제사와 관련한 전반적인 준비를 하는 곳으로

왕릉을 관리하는 능참봉이 상주하였다. 

 

 

건원릉(健元陵)

건원릉은 조선의 제1대 왕인 태조 이성계의 능묘이며,

건원릉은 3대왕인 태종 8년인 1408 9월 9일 조성되었다.

현재는 매년 양력 6월 27일 제향을 지낸다.

 

태조의 원비이자, 정종과 태종의 어머니인 신의왕후1391년 조선 건국 1년 전에

건강 악화로 사망하여, 개성에 묻혔으며, 5년 후인 1396년 사망한 둘째부인이자 정비인

신덕왕후의 능묘는 서울 성북구에 존재한다. 태조는 경기도 구리에 묻혀 어느 왕비와도

같이 묻히지 못하였다. 본래 태조는 신덕왕후와 같이 묻히고 싶어하였으나 신덕왕후를

혐오하던 태종은 이러한 태조의 뜻을 거스르고 구리에 능을 조성하였다.

 

건원릉은 고려 공민왕노국공주현정릉을 기본으로 삼아서 만들었다.

건원릉은 조선 왕조 최초의 왕릉인 만큼, 이후 왕릉의 본보기가 되었다.

또한 능에는 갈대가 심어져 있는데, 함흥에서 가져온 것이라고 한다.

태조는 함흥에 묻히길 바랐는데 신덕왕후를 혐오하는 태종 때문에 태종이

국가의 제사를 이유로 구리에 능을 조성하는 대신

함흥의 흙과 억새를 가져와 능을 만들었다.

 

 

 

▼금천교, 홍살문 앞에 조성한 다리로 속세와 성역의 경계역할을 한다.

 

 

홍살문과 정자각 그리고 능침이 일직선상에 배치되어 있다.

홍살문을 지나 정자각에 이르는 길은 참도이며 박석이 깔려 있고

왼쪽은 神이 다니는 神道,오른쪽은 임금이 다니는 御道이다. 

 

 

▼정자각, 제향을 올리는 丁자 모양으로 지은 집

제향을 올릴 때 왕의 신주를 이곳에 모신다. 

 

 

▼참도를 따라 정자각 우측으로 난 두개의 계단

왼쪽은 선왕의 혼령이 오르는 곳이고, 오른 쪽은 왕이 오르는 곳으로

왼쪽의 계단이 화려하게 만들어져 있다. 

 

 

▼정자각의 우측면 

 

 

▼정자각의 후면 

 

 

▼정자각의 좌측면

정자각 뒤 왼쪽에 능제가 끝나고 축문을 태우는 叡感(예감, 소전대라고도 한다)이 있다.

 

 

▼건원릉의 비각과 태조비문

대체로 비각은 정자각 우측에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이 보통인데

건원릉은 정자각 뒤 바로 우측에 비교적 크게 만들어져 있다.

비각 안에는 전서체 한자글씨로  ‘대한 태조고황제건원릉’이라는 비석과

태조의 신도비가 세워져 있다. 현재 신도비가 세워져 있는 비각은

태조의 신도비와 헌릉의 태종 신도비 밖에 없다고 한다. 

 

 

 

 

 

▼건원릉의 능침

봉분으로는 올라가지 못하도록 울타리가 쳐져 있다.

왕릉의 봉분들은 멀리서 보면 윗부분이 대충 보이나 능원 아래쪽에서는

보이지 않게 되어 있다.

 

 

 

▼억세풀이 무성하게 자란 봉분 

 태조 이성계는 말년에 고향을 그리워하며 그 곳에 묻히기 원했으나

태종이 구리에 릉을 조성하면서 고향 함흥의 흙과 억새를 가져와서 심었다고 한다.

억새풀은 그 특성이 잔디처럼 자주 깎아주면 죽어버리므로 1년에 한번

4월 한식 때에 깎아준다고 한다. 일반 백성들은 억새풀이 생명력이 강하여

묘에 억새풀을 심지 않는데 태조의 건원릉만은 억새풀이 심어져 있다는 것이 이색적이다.

 

봉분 주위로 곡장이 둘러싸고 봉분에는 병풍석과 난간석이 둘러쳐져 있으며,

난간석 밖으로 석호와 석양이 4마리씩 교대로 배치되어 있다.

봉분 앞에는 고석 5개가 받치는 널따란 석상(혼유석)이 있고,

그 좌우로 망주석이 서 있으며 중앙에 장명등이 서 있다.

그리고 그 밑에 좌우로 문인석과 무인석이 석마 한 쌍과 함께 서 있다.

 

 

▼ 수복방

 

 

 

수릉(綏陵)

수릉은 조선 제 23대 왕 순조의 세자 효명세자(후 익종, 문조로 추존)와

신정왕후 조씨의 능이다. 1855년(철종 6) 용마산 아레에 있던 능을

지금의 자리로 천장하였고, 1890년(고종 27) 신정왕후를 합장하였다.  

현재는 매년 양력 4월 세째 일요일 제향을 지낸다.

 

효명세자1809년 9월 18일 순조와 순원왕후의 장자로 태어났다.

1812년 왕세자에 책봉되었으며, 1819년 음력 10월에 세자빈(신정왕후)과 가례를 올렸다.

1827년에는 아버지 순조의 명에 따라 대리청정을 하며, 안동 김씨의 세도 정치를 견제하고

처가인 풍양조씨의 인물을 중용하였으나 4년 만인 1830년에 서거하였다.

순조의 뒤를 이어 헌종이 왕으로 즉위한 뒤 익종(翼宗)으로 추존하였으며,

1899년 고종에 의해 문조익황제(文祖翼皇帝)로 재추존 되었다.

 

순조 30년 1830년 효명세자가 승하하자 성북구 석관동 의릉 왼쪽 언덕에

세자의 무덤형식인 원(園)으로 능을 조영하고, "연경묘"라고 하였다.

그 후 아들 헌종이 1835년 즉위하여 익종으로 추존하고 능의 이름을 수릉이라고 하였다.

헌종 13년 1846년 풍수상 불길하다는 의논이 제기되어 천장하기로 하고, 현궁을 발굴하여

정자각에 봉안하고, 그 해 5월 19일에 발인하여, 20일에 양주 용마산 아래로 천장하였다.

철종 6년 1855년 8월에 다시 능을 발굴하여 건원릉 좌측 언덕으로 천장하였다.

그래서 현재의 수릉은 1890년 8월 30일에 조성한 것이다. 고종 27년 1890년에는

83세로 승하한 신정왕후를 수릉에 합장하여 모셨다.

 

신정왕후 조씨는 1808년 풍은부원군(豊恩府院君) 조만영의 딸로 태어나,

1819년 효명세자와 가례를 올리고 세자빈이 되었다. 그러나 1830년에 남편인 효명세자가

승하하였고, 1834년에 순조가 승하하고 아들 헌종(憲宗)이 왕위에 오르자 왕대비(王大妃)가

되었다. 1890년 음력 4월 17일, 83세의 나이로 경복궁 흥복전에서 승하하여

동구릉 내에 남편 익종과 합장되었다. 그래서 수릉은 단릉이 아니라 합장릉이다.

 

 

 

▼수릉 전경

홍살문,참도,정자각,비각 그리고 뒤편의 능침

 

 

▼수릉의 정자각  

 

 

 

▼수릉 비각과 비문 

 

  

 

 

 

▼수릉 능침

  

 

 

 

 

현릉(顯陵) 

현릉(顯陵)은 조선 제5대 문종현덕왕후 권씨의 능이다.

1452년(단종 즉위년) 건원릉 동쪽에 조성하였으며,

1513년(중종 8) 현덕왕후 능을 천장하여 동원이강릉으로 조성했다.

현재는 매년 양력 6월 10일 제향한다.

 

문종은 세종소헌왕후 심씨의 맏아들로, 세종 3년 1421년 8세의 어린 나이로

세자로 책봉되어 세종 32년 1450년 37세의 나이로 왕위에 올랐다.

 

1452년 9월 1일 문종이 승하하자 조성된 능으로, 능지는 수양대군, 황보인, 김종서,

정인지 등의 대신을 비롯하여 풍수학랑관이 현지를 답사하고 정하였다.

 

그의 비인 현덕왕후 권씨는 화산부원군 권전의 딸로 태어나, 1431년 세종 13년

14세의 나이로 세자궁으로 들어와 세자의 후궁이 되었다. 1437년 세자빈인 순빈봉씨가

폐위되자, 세자빈에 책봉되었다. 그러나 세종 23년 1441년 문종이 승하하기 11년 전에

단종을 낳고, 병이 위독해져 24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원래 현덕왕후는 안산의

소릉에 장사지냈는데, 수양대군계유정난으로 단종을 내쫓고 집권한 이후, 세조 3년 1457년

의경세자(덕종으로 추존됨)의 죽음으로 추폐되었다가 중종 7년 1512년 복위되어

그 다음해 봄, 1513년 문종이 묻혀 있는 현릉의 왼쪽 산줄기 언덕으로 사후 72년 만에

옮겨져 왕의 곁으로 돌아왔다.

 

 

 

▼현릉 전경 

 

 

▼현릉 정자각

 

 

▼현릉 비각과 문종비문 

 

 

 

 

▼문종의 릉 

정자각 뒤로 문종왕릉이 있고, 우측으로 조금 떨어진 언덕에 현덕왕후의 능이 있다.

동원이강(同原異岡)의 형식이다. 같은 능의 이름 아래 왕과 왕비의 능을 각각 다른

언덕 위에 단릉처럼 만든 것이 동원이강이다. 

 

 

▼현덕왕후의 릉 

 

 

 

서울을 다녀 오면서 3얼 31일 오후 5시가 넘어 동구릉 답사를 하였다.

문을 닫을 시각이 다 되어 수릉,현릉,건원릉만 둘러 보고 발길을 돌여야 함이 몹시 아쉬웠다.

목릉,휘릉,숭릉,혜릉,원릉,경릉은 다음 기회에 답사를 할 생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