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계선생구택
온계(溫溪) 이해(李瀣,1496 연산군 2년∼1550 명종 5년)선생은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진보, 진사 식(埴)의 아들이며, 퇴계 이황의 형이다.
어려서 작은아버지 우(堣)에게 글을 배워 1525년(중종 20)에 진사가 되었고,
1528년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1533년에 사간·정언 등을 거쳐 1541년 직제학에 올랐으며,
이어 경상도진휼경차관(慶尙道賑恤敬差官)·좌승지·도승지 등을 역임하였다.
1544년에 첨지중추부사·대사헌·대사간·예조참판을 지내고, 이해 또다시 대사헌이 되었다.
인종이 즉위한 뒤에도 계속 대사헌으로 있으면서 권신 이기(李芑)를 우의정에 탁용(擢用)하려는 것을
반대하고 탄핵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이기의 원한을 사게 되었다.
1545년(명종 즉위년) 강원도관찰사에 이어 1547년에 황해도관찰사,
1549년에 청홍도관찰사를 거쳐(퇴계선생은 단양군수에서 풍기군수로 전임)
1550년에는 한성부우윤이 되었다.
그러나 명종이 즉위하면서 소윤이 득세하였기 때문에 이기의 심복인 사간 이무강(李無彊)의
탄핵을 받아 무고사건에 연좌된 구수담(具壽聃)의 일파로 몰리게 되었다.
그때 주위사람들이 권세에 거짓으로 굴복하면 모면할 수 있다고 권하였으나 거절하였으며,
마침 김안로(金安老)가 인근에 살았으므로 권세로 이끌려 하였으나 끝내 거절하였다.
그러나 명종이 그의 결백함을 알고 특별히 갑산에 귀양보내는 것으로 그쳤으나,
귀양가는 도중에 양주에서 병사하였다.
예서(隷書)에 뛰어났으며 선조 때 벼슬이 환급되었다.
예조판서에 추증되었으며, 영주 이산면 우금의 삼봉서원(三峰書院),
예안의 청계서원(淸溪書院)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정민(貞敏)이다.
온계선생구택은 후손들이 최근 지은 집이다.
사랑채 삼백당(三栢堂)
사당(祠堂)
구택 뒤에 있는 요산정(樂山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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