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산 맹씨행단
조선초기 명재상이며 청백리로 유명한 고불 맹사성公의 집안이 살던 곳으로
고택과 사당인 세덕사, 구괴정, 기념관이 있다. 또 600세가 넘은 은행나무 두 그루가 있어서
행단(杏壇)이라고 부르며 선비가 학문을 닦는 곳이라는 의미도 있다.
도로변 안내간판
맹씨행단 전경,,,
청백사 고불 맹사성 기념관
고불(古佛) 맹사성
(1360년,고려 공민왕9~1438년,조선 세종20)
고려말~조선초의 문신. 본관은 신창(新昌). 자는 자명(自明), 호는 고불(古佛), 시호는 문정(文貞), 고려 수문전제학 맹희도의 아들이며, 최영의 손주사위이다.
고불 맹사성은 같은 시대를 살았던 황희 정승과 함께 우리 역사에서 가장 유명한
재상으로 손꼽히는 사람이다. 조선 초기 태조에서부터 세종까지 네 명의 왕을 섬기며
최고의 벼슬인 영의정까지 올랐던 맹사성은 특히 청렴결백한 것으로 유명하다.
맹사성은 1435년 나이가 많아서 벼슬을 사양하고 물러났으나,
나라에 중요한 정사(政事)가 있으면 반드시 그에게 자문을 구하였다.
사람됨이 소탈하고 조용하며 엄하지 않아 비록 벼슬이 낮은 사람이 찾아와도
반드시 공복(公服)을 갖추고 대문 밖에 나아가 맞아들여 윗자리에 앉히고,
돌아갈 때에도 역시 공손하게 배웅하여 손님이 말을 탄 뒤에야 들어왔다.
그는 효성이 지극하고 청백하여 살림살이를 일삼지 않고 식량은 늘 녹미(祿米)로 하였고,
매양 출입할 때에는 소〔牛〕타기를 좋아하였으므로 보는 이들이 그가 재상인 줄을 알지
못하였다고 하며, 음악에 조예가 있어 스스로 악기를 만들어 즐겼다.
고택의 대문채
우리나라에서 개인이 살던 가정집으로는 가장 오래된 집으로
2칸 대청을 가운데 두고 좌.우로 돌출된 방을 2칸씩 배치한 "工"자형의 특이한 구조다.
고택의 왼쪽 측면...
고택의 뒷면...
굴뚝이 이채롭다
원 주인이었던 최영장군의 호방하고 듬직한 무골의 모습을 보는 듯,,,
"세덕사" 맹유(祖父), 맹희도(父), 맹사성의 위패를 모신 사당
맹사성 정승이 1380년 경에 심었다는 은행나무, 무려 630살의 고목이다...
고불(古佛) 맹사성에 얽힌 일화들,,,
맹사성이 고향 개울가에서 유유자적하게 낚시를 즐기고 있는데
개울 건너편에서 한 젊은 선비가 그를 불러 이렇게 말했다.
"여보게 늙은이, 내가 지금 개울을 건너야겠는데
양반 체면에 어찌 버선을 벗고 바지가랑이를 걷어올리겠나.
그러니 영감이 나를 좀 업어서 건네주시게."
(계급사회였던 조선시대는 양반이면 누구나 상민에게 하대를 했기 때문에,
젊은 선비는 다리를 걷고 개울에 발을 담근 채 낚시를 하고 있는 그를
평민으로 생각하고 그렇게 말했던 것이다.)
그러자 맹사성은 아무 말 없이 그 선비를 업어서 개울을 건네줬는데
젊은 선비가 또 이렇게 물었다.
"여보게! 혹시 맹정승 댁을 아는가?"
"왜 그러시오?"
"요즘 고향에 내려와 계신다니 한번 뵙고 인사나 드리려는 참이네"
그러자 맹사성은 이렇게 말했다. "맹정승을 이미 만났으니 그냥 가시오"
"아니 그게 무슨 말인가?" 영문을 몰라 잠시 어리둥절해 있던 선비는
한참 후에야 흙바닥에 털썩 무릎을 꿇으며 고개를 조아렸다.
"아이고 대감, 미처 몰라 뵙고 죽을 죄를 졌습니다"
그런데 맹사성이 껄껄 웃으며 건넨 말은 다음 한마디가 전부였다.
"허허, 젊은이가 노인 공경할 줄도 알아야지."
맹사성은 유머감각이 뛰어난 것으로도 유명하다.
고향집이나 부임지 등 먼 곳으로 출타할 때도 수행원 없이
혼자서 다니기를 좋아했던 그가 고향집에 갔다 한양으로 돌아올 때였다.
혼자 길을 가던 그는 날이 저물어 한 주막에 묵게 되었는데
손님이 많아 방이 없어 한 젊은 선비와 방을 함께 쓰게 되었다.
둘이서 무료하게 있던 참에, 맹사성의 초라한 행색을 보고
깔보는 맘을 가지고 있던 젊은 선비가 거만한 투로 말을 걸었다.
"보아하니 글은 좀 읽은 것 같은데 우리 심심한 차에 글짓기 놀이나 합시다.
나는 글의 끝에 ‘당’자를 넣을 테니, 영감은 ‘공’자를 넣어서 말을 끝내는 거요.
영감이 먼저 하시오"
빙그레 웃고 있던 맹사성이 "그럽시다"하며 입을 열었다.
선비는 어디에 가시는공?" "한양에 간당"
"한양에는 뭐하러 가시는공?" "벼슬하러 간당"
"벼슬할 자신은 있으신공?" "문제없당"
그렇게 놀다가 다음날 둘은 서로 헤어져 한양으로 올라갔다.
얼마 후 새로 벼슬길에 오른 젊은이들이 좌의정인 맹사성에게 인사를 하러 왔는데
그중에는 말짓기 놀이를 하던 그 젊은이도 끼여 있었다.
맹정승은 장난끼가 발동해 고개를 숙이고 절을 하고 있는 그 선비를 향해 불쑥 물었다.
"내가 누군지 아시겠는공?" 난데 없는 질문에 놀란 젊은이가
맹정승을 올려다보더니 얼떨결에 대답한다는 것이 이랬다.
"죽을 죄를 지었습니당"
이 일화가 그 유명한 ‘공당문답’이다.
맹사성이 살던 시기는 국가적으로 매우 혼란한 시기였다.
고려가 망하고 조선이 막 개국한 격동의 시절이었으며
두번이나 왕자의 난이 일어나 수많은 벼슬아치들이 다치거나 죽었다.
그런데 그런 어려운 세월 가운데서도 맹사성은 50여년의
세월동안 4명의 임금을 섬기며 한성판윤(서울시장)과 대사헌(감사원장),
우의정, 좌의정, 영의정 등 높은 벼슬을 두루 거쳤고
천수를 다 누린 후 76세를 일기로 사망했다.
그렇다면 그 험난한 시절에 맹사성이 이처럼 벼슬길에서
장수할 수 있었던 비결은 과연 무엇일까.
다음의 일화가 그 비결을 가르쳐 준다.
19세의 어린 나이에 과거에 장원급제하고 20살에 경기도 파주군수가 되어
자만심에 가득차 있던 맹사성이 어느 날 고승으로 이름높던
무명선사를 만나기 위해 산사를 찾아갔다.
"선사께서 생각하기에 이 고을을 다스리는 사람으로서
최고로 삼아야 할 좌우명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오?"
그러자 선사가 대답했다. "그건 어렵지 않지요.
나쁜 일을 하지 말고 선한 일을 많이 베푸시면 됩니다"
"그런건 삼척 동자도 다 아는 이치인데
먼 길을 온 내게 해 줄 말이 고작 그것뿐이오?"
맹사성은 거만하게 말하며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습니다.
맹사성의 말과 행동에 거드름이 잔뜩 묻어있는 것을 본 무명선사가
"오신 김에 녹차나 한잔하고 가시라"며 차를 대접했는데
스님은 찻물이 철철 넘치도록 그의 찻잔에 자꾸만 차를 따르는 것이 아닌가.
"스님, 찻물이 넘쳐 방바닥을 망칩니다" 맹사성이 소리를쳤다.
하지만 스님은 태연하게 계속 차를 따르다 화가 잔뜩 나있는 맹사성을 쳐다보며 말했다.
"찻물이 넘쳐 방바닥을 적시는 것은 알고, ‘지식’이 넘쳐 ‘인품’을 망치는 것은 어찌 모르십니까?"
스님의 이 한마디에 부끄러워진 맹사성이 급하게 일어나 방문을 열고 나가려다
그만 머리를 문에 세게 부딪히자 스님이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고개를 숙이면 부딪히는 법이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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