웅부안동(雄府安東)/임동면

임동 수곡(水谷)마을 이야기

자즐보 2010. 10. 30. 22:22

 

 

 

 

수곡(水谷)마을 이야기

수곡은 우리말로 물골 혹은 무실·물실을 한자로 옮긴 것이다.

지금도 이 지역 대부분의 사람들은 천전을 내앞으로 부르듯이

수곡보다는 무실로 부르고 있다.

 
수곡리는 원래 임하현의 지역이었으나 1895년 안동군 임동면에 편입되었고,

1914년 대평, 원파, 늘치미, 독골, 박곡리 일부와 중평리 일부를 합하여

수곡리가 되었다.

수곡리는 전주류씨의 동성마을로서 조선 명종 때 류성(柳城)공이 이곳에 입향하였으며,

마을 뒷산인 아기산(峨岐山)에서 물줄기가 마을을 둘러싼 형상으로 흐르고 있다 하여

붙여진 명칭이다.

현재 수곡리는 임하댐 건설로 인하여 새로운 단지를 만들어 마을을 새로 형성하였다.

그리고 수몰민 일부는 구미의 해평면 일선리에 정착지를 만들어 이주하였다.

수몰되기 전 수곡리에는 한들, 원두들, 늘침, 독골, 밤나무골 등의 마을이 있었으나

거의 대부분이 사라지고 일부분만 남아 있다.

광산(匡山)·가구(佳丘)·개두들은 수곡리가 임하댐 건설로 인하여 수몰되자

주민들이 아기산 기슭에 새로운 단지를 만들어 이주한 곳이다.

원래 이곳은 사람이 살지 않았다고 한다. 마을 명칭은 예전부터 사용하던 것인데

아기산 기슭의 아름다운 언덕이라는 뜻에서 가구라고 하였으나

그 음이 변하여 개두들이라고 한다.


마을에는 전주류씨 종택과 기양서당, 수애당, 무실정려각 등

고가옥이 함께 이건되어 동성마을의 면모를 간직하고 있다.

황산골은 개두들 뒤편 골짜기이다.

신라시대의 고찰인 봉황사(황산사라고도 함)가 있어서 붙인 명칭이다.

독골·도곡·구수동은 옹기굴을 차렸던 마을이라 전한다.

그러나 임하댐 건설로 인하여 대부분 수몰되고 뒷산의 일부분만 남아 있어

이곳에 정재(定齋) 류치명(柳致明)의 종택과 만우정(晩愚亭)을 이건하였다.

종택이 있는 곳을 구수목·구수동이라고 하는데, 여기의 땅을 파면

군데군데 구멍이 있는 공간이 있어서 붙인 명칭이라고 한다.

현재 이곳에는 다른 민가는 없고 종택 1가구만 있다.

구수동으로 들어오는 입구의 공터에 청류쉼터가 있는데,

이 아래에 구미 해평으로 옮긴 동암정(東岩亭)이 있었다고 한다.

 

 

 

문중이야기 

 

전주류씨 시조는 완산백 류습공이며 전라도에서 상경하여

한양 묵사동에 살았다. 시조의 7대손 류윤선(1500년 생)이

영주군수로 재직하게 된 형 류윤덕을 따라 영주로 내려와

반남박씨 사직 승장의 사위가 되어 영주에서 살게 되었다. 

 

류윤선의 아들 류성(1533~1560)이 의성김씨 청계 김진선생의 딸

숙인 김옥정과 결혼하여 영주에서 천전(내앞)과 가까운 임동 수곡(무실)에

정착하여 무실의 입향조가 되었고, 그 후손들이 번성하여

많은 인재들이 배출된 영남사림의 일익을 담당했던 문중이 되었다.

 

전주류씨 무실종택

 

 

수애당(水涯堂)

수애(水涯) 류진걸(柳震杰)공이 1939년에 건립, 1987년 임하댐 건설로 현 위치로 이건

 

 

의성김씨의 정려각

무실 입향조 류성의 아내 의성김씨의 정려각은 새로 만들어진 마을의

정중앙에 넓게 자리 잡고 있다. 그만큼 무실류씨의 역사 속에서 김씨부인이

차지하는 역사적 의미는 크고 넓은 것이라는 점을 의미하는 것이리라...

 

정려각 앞의 안내판에는, 정려각이 경북 민속자료 제48호라는 점과,

1635년(인조 13)에 조정에서 김씨부인의 언행을 높이 평가해서 정려를 내려

비각을 세우게 하였다는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정려각 속에 나지막한 비석의 앞면에는 ‘절부 고 유학 류성 처 문소김씨지각’,

‘절개를 지킨 부인, 죽은 류성의 처 문소김씨의 비각’이라는 뜻의 한자가

크게 새겨져 있고, 뒷면에는 그 사적이 자잘한 한자로 각인되어 있다.

‘문소김씨’는 바로 ‘의성김씨’이니, 의성의 옛 이름이 ‘문소’였다고 한다.

 

 

물 속에 잠긴 무실마을 

무실마을 주변의 산천은 기양서당에서 살펴보는 것이 한결 그럴듯하다.

기양서당은 마을 동쪽 산언덕에 한층 높이 올라 앉아 임하호의 물밭을 그대로

시야 가득히 담아낼 수 있기 때문이다. 
기양서당은 기봉 류복기가 처음 세워서 학생들을 가르치던 곳이다.

 

기양서당

 

 

이건한 무실마을에 사시는 분의 말씀이...
“여기 무실 뿐만 아니라 한들에서도, 박실에서도 다 구미 해평으로 옮겨갔어요.

원래 해평에 연고가 있었던 것은 아니지. 거기도 백사장을 밀어붙여서 만든 이주단지예요.

수몰되니까 나라에서 이주지를 거기다 잡아 준 것이지. 거기 이주하는 사람들은 터를 주고,

또 집집마다 12마지기씩 땅을 주었어요. 우리 무실마을에서도 한 80집이 옮겨갔지요.

전에는 여기 120세대가 살았는데 지금은 한 20여 세대쯤 되어요. 딴 집도 있고 …….”

 

물이 들어온 것은 무실, 한들, 박실 등을 중심으로 하여 수백 년 이어 내려왔던

전주류씨 집성촌의 역사를 해체시켜 내는 기능을 수행하였다.

4백년의 연륜을 갖는 역사를 하루아침에 수장시켜 버리고, 전주류씨들은 뿔뿔이 흩어져 갔다.

해평으로 많이 옮겨갔고, 새로 산 위에 들어선 무실 마을에는 조금 옮겨 앉고,

간혹은 혼자서 떨어져 나가기도 하였다. 그렇게 하여 무실의 전주류씨들은

다시 맨몸으로 서서 새로운 터전을 가꾸어 나가야만 하였다.

그러나 그들의 마음은 이미 임하댐의 깊은 물속에 수장되어 버린 다음이었다.

 

류희걸 씨가 전주류씨 수곡파의 역사를 옮겨놓은 『기하수류』라는 책에서 적고 있는 일절...
“그 전만 하더라도 고색창연한 기와집과 초가들로 온갖 정취를 맛볼 수 있는 집성촌이었으나

근대화의 회오리에 밀려 ‘임하댐’이란 대역사에 희생의 제물로 바쳐진 채 찬란했던

‘수류문물’(수곡류씨의 유적들)들은 ‘백장심당’(백장되는 깊은 물) 깊은 물속에

깡그리 수장되고 말았다. 고향 잃은 설움, 그 누가 알아줄까?

두고 온 이북 고향 통일 되면 갈 수 있고, 나그네 떠난 고향 찾아가면 그뿐인데,

우리 같은 수몰민은 고향이 용궁되어 꿈에서나 그려볼까?

기약도 하소연도 통한만 남을 뿐이다. 망향의 설움 달래고자

옛 집을 찾아가니, 넘실대는 파도 속에 추억조차 아련한데,

저 멀리 수평선엔 보일 듯 말 듯 물새가 나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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