天燈山 鳳停寺
신라 문무왕 12년(672년)에 의상대사의 제자인 능인대사가 창건.
봉정사가 위치하고 있는 산은 원래 대망산이라 했는데 능인대사가 젊었을 때
대망산 바위굴에서 도를 닦고 있던 중 천녀가 스님의 수행에 감복하여
굴 안을 환히 비추어 주었다고 한다. 이 후 산 이름을 천등산이라 하였다.
스님께서 수도를 한 후 도력으로 종이 봉을 접어 날렸는데
종이 봉이 앉은 곳에 절을 짖고 봉정사라고 하였다.
천등산 봉정사 일주문
봉정사 안내도
만세루(萬歲樓)
만세루는 정면 5칸, 측면 3칸 규모로,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사람 인(人)자 모양인 맞배지붕이다. 앞면에서 보면 2층이나
경사진 지형을 이용하여 뒷면은 단층으로 처리하였다.
아래층 가운데 칸에 출입문을 두었으며, 위층은 네모난 우물 정(井)자
모양의 우물마루 바닥에 평난간으로 둘러져 있다.
봉정사의 입구에 해당하는 누문으로 원래는 덕휘루로 불리웠으나
언제 이름이 바뀌었는지는 알 수 없다. 조선 숙종 6년(1680)에
건립된 후 여러 차례에 걸쳐 보수되었다.
만세루 현판
나무아미타불 & 덕휘루 현판
봉정사 만세루는 1680년에 건립되었다고 전하며 그 후 수차에 걸쳐 보수하였다.
봉정사 대웅전 앞에 건립된 중층의 누문으로 정면 5칸, 측면 3칸의
홑처마 맛배지붕건물이다. 지형의 경사를 이용하여 배면은 단층으로 처리하였다.
루하부 어칸에 출입문을 두어 루하 진입방식을 채택하였다.
누상부는 우물마루 바닥에 평난간을 둘렀으며, 기둥머리는 살미의 끝을 직절하고
내부의 보아지는 초각을 하였다. 내부는 일고주 5량의 구조를 가지고 있는데
내진주 4개 중 가운데 2개만 고주 몸에 대량과 퇴량을 끼워놓았으나 그 옆의 다른 것은
대량 하부에 내진주를 받쳐놓아 서로 다른 모습을 가지고 있다. 내진고주에 끼워진
대량과 퇴량 밑에는 보아지를 두었다. 대량 위에는 동자주대공을 올렸는데
동자대공에 장식이 없는 보아지를 꽂아 놓았고, 종량 위에는 폭이 좁은
판대공을 세워 장식을 거의 하지 않은 소박한 구조이다.
만세루는 봉정사의 입구에 해당하는 누문으로 17세기 후반의 건실하면서도
당당한 건축수법의 특징이 잘 나타나 있는 건물이다.
만세루는 17세기 후반의 건실하면서도 당당한 건축수법의 특징이 잘 나타나 있다.
대웅전(국보 제311호)
대웅전에는 석가모니불상을 중심으로 문수보살, 보현보살을 좌우로 모시고 있다.
1962년 해체·수리 때 발견한 기록으로 미루어 조선 전기 건물로 추정한다.
규모는 앞면 3칸·옆면 3칸이며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을 한 팔작지붕이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만든 공포가 기둥 위뿐만 아니라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 양식인데, 밖으로 뻗친 재료의 꾸밈없는 모양이 고려말·조선초 건축양식을
잘 갖추고 있고 앞쪽에 툇마루를 설치한 것이 특이하다.
건물 안쪽에는 단청이 잘 남아 있어 이 시대 문양을 연구하는데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으며,
건실하고 힘찬 짜임새를 잘 갖추고 있어 조선 전기 건축양식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다.
화엄강당(보물 제448호)
화엄강당은 스님들이 불교의 기초 교학을 배우는 곳이다.
『양법당중수기』등의 기록에 따르면 같은 경내에 있는 극락전과 대웅전을
17세기에 고쳐 지었을 때 화엄강당도 함께 고쳤을 것으로 추정한다.
규모는 앞면 3칸·옆면 2칸이며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사람 인(人)자 모양과 비슷한 맞배지붕이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짜은 구조가 기둥 위에만 있는 주심포 양식이다.
이 부재들이 다른 기법과 섞여 절충형식을 보이고 있는 점이 특징인데 대웅전보다
간결한 형태의 장식성을 사용하였다. 또한 강당으로 사용되는 건물이기 때문에 기둥은 낮지만
공포를 크게 잡아 겉모습의 균형을 살리고 있다. 2칸은 방이고 1칸은 부엌으로 되어 있으며
부엌과 방 사이에는 벽장을 설치하였다.
차분하고 안정감 있게 지은 건물로 우리나라 전통 건축사에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는 문화재이다.
고금당(보물 제449호)
이 건물은 극락전 앞에 동향(東向)으로 서 있으며 원래 불상을 모시는
부속 건물이었을 것으로 생각되지만 지금은 승려가 기거하는 방으로 사용하고 있다.
1969년 해체·복원공사 당시 발견한 기록에 광해군 8년(1616)에 고쳐 지은 것을
알 수 있을 뿐 확실하게 언제 세웠는지 알 수 없다.
앞면 3칸·옆면 2칸 규모이며,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사람 인(人)자 모양을 한 맞배지붕이다.
복원 전에는 북쪽 지붕 모양도 달랐고 방 앞쪽에 쪽마루가 있었으며 칸마다 외짝문이 달려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앞면 3칸에 2짝 여닫이문을 달았고 옆면과 뒷면은 벽으로 막아 놓았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짜은 구조가 기둥 위에만 있는 주심포 양식이다.
비록 건물은 작지만 다양한 건축기법을 사용하여 구조가 꼼꼼히 짜인 건축물로
주목 받고 있는 문화재이다.
삼층석탑(경북유형문화재 제182호)
봉정사 극락전의 영역에 자리하고 있는 3층 석탑이다. 2층 기단(基壇)을 쌓아 탑의 토대를 마련하고 그 위로 3층의 탑신(塔身)과
머리장식을 얹은 일반적인 모습이다. 아래·위층 기단의 각 면에는 모서리와
가운데에 기둥모양을 새겼다. 기단에 비해 폭이 좁아진 탑신부는 각 층의
몸돌 크기가 위로 갈수록 적당하게 줄어들면서도, 폭의 변화는 적다.
지붕돌도 높이에 비해 폭이 좁고 두툼하며,
꼭대기에는 머리장식의 일부만 남아있다.
각 부분에 형식화가 심하고, 지붕돌이 두툼한 점으로 보아
고려시대의 작품으로 짐작된다.
극락전(국보 제15호)
극락전은 원래 대장전이라고 불렀으나 뒤에 이름을 바꾸었다고 한다.
1972년 보수공사때 고려 공민왕 12년(1363)에 지붕을 크게 수리하였다는 기록이 담긴
상량문을 발견하였는데, 우리 전통 목조건물은 신축후 지붕을 크게 수리하기까지 통상적으로
100~150년이 지나야 하므로 건립연대를 1200년대 초까지 올려볼 수 있어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 건물로 보고 있다.
앞면 3칸·옆면 4칸 크기에,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사람 인(人)자 모양을 한
맞배지붕으로 꾸몄다. 기둥은 가운데가 볼록한 배흘림 형태이며,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짜은 구조가 기둥 위에만 있는 주심포 양식이다. 앞면 가운데 칸에는 문을 달고,
양 옆칸에는 창문을 내었다. 건물 안쪽 가운데에는 불상을 모셔놓고 그 위로 불상을
더욱 엄숙하게 꾸미는 화려한 닫집을 만들었다. 또한 불상을 모신 불단의 옆면에는
고려 중기 도자기 무늬와 같은 덩굴무늬를 새겨 놓았다.
봉정사 극락전은 통일신라시대 건축양식을 본받고 있다.
석조여래좌상(경북유형문화재 제44호)
안동시 미질동에서 발견된 것으로 안정사에 있었던 것인데, 안동댐 건설로 인해
안정사가 없어지면서 인근의 봉정사로 옮겨 보관하고 있다.
금가루가 칠해져 있어 자칫 금동불상으로 오해를 받기도 하지만 석불이다.
머리에는 상투 모양의 머리묶음이 있고 얼굴은 둥근 편이다. 옷은 양 어깨에
걸쳐 입고 있으며, 가슴부분에 표현된 나비 리본 모양의 매듭이 인상적이다.
손은 오른손을 무릎 위에 올리고 손가락이 아래로 향한 모습으로
땅속의 악귀를 물리친다는 의미를 지닌다. 불상이 앉아있는 대좌(臺座)는 반원형으로 연꽃무늬가 새겨져 있다.
이 불상은 안동시 월곡면 미질동에서 발굴 된 것으로, 그곳에 있던
안정사(安定寺)에 보관되어 있었다.
본래는 연화좌대에 안치된 석불상(石佛像)인데 안정사 주지가 방에 안치하면서
금분을 칠해 원형이 다소 손상되었다. 안동댐 건설로 인해 안정사가
폐사(廢寺)되므로 서후면 봉정사 주지였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