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대구여행*문화탐방/울진군

천축산 불영사(佛影寺)

자즐보 2016. 10. 2. 21:03

 

 

 

천축산 불영사(佛影寺)

경북 울진군 금강송면 불영사길 48(하원리122)

 

 

651년(진덕여왕 5)에 의상대사가 백암산 아래 단하동(丹霞洞)과 해봉(海峰)에 올라가서

북쪽을 보니 서역의 천축(天竺)과 같은 명산이 바라보여 산마루를 타고 그곳에 당도하니

산세의 묘함이 인도의 천축산(天竺山)과 비슷하여 산 이름을 천축산이라고 하였다.

전면의 큰 못에는 아홉 마리의 용이 있으므로 주문으로 용을 쫓아내고 그 자리에 절을 지어

구룡사(九龍寺)라 하였다. 그로부터 오랜 세월이 흘러간 뒤 절의 정서편(正西便) 산에 있는

부처님과 같은 바위의 그림자가 못에 항상 비춰져 절 이름을 다시 불영사로 개칭했다고 한다.

그 후 의상대사가 영주 부석사와 봉화 각화사를 창건하고 15년 동안 돌아다니다가 다시

불영사로 돌아오니 마을의 한 늙은 노인이 말하기를 “부처님이 다시 돌아오셨다”고 하여

백암산 불귀사(佛歸寺)라고도 하였다.

1397년(태조 6)에 화재로 소실되어 소진대사(小震大師)가 중건하였으나 다시 화재로 소실되었고

1500년(연산군 6) 양성법사(養性法師)가 중건하여 선당(禪堂)으로 하였다. 임진왜란의 병화를 입어

1609년(광해군 1)에 성원법사(性元法師)가 재건하여 영산전(靈山殿)을 짓고 1701년(숙종 27)에

진성법사(眞性法師)가 수선하였다. 1721년(경종 1)에 천옥법사(天玉法師)가 재건하고

1899년(고종 36)에 설운대사(雪耘大師)가 중수하였다. 창건 당시의 유적으로는

무영탑과 대웅전 축대 밑의 돌거북이 있다. 대웅보전의 편액은 몽천서원에 배향된

황림(篁林) 윤사진(尹思進)의 친필이다. (자료출처:디지털울진문화대전)

 

 

 

천축산 불영사 일주문

 

 

 

불영교(佛影橋)

 

 

 

 

 

 

템플스테이관 및 스님들의 요사채

 

 

 

불영사사적비((佛影寺事積碑)

 

 

 

불영지 & 법영루

 

 

청풍당, 스님들의 수행과 공양간이 있는 요사채

 

 

천축선원 & 무위당, 스님들의 수행공간

 

 

감로수(甘露水)

 

 

 

대웅보전(大雄寶殿, 보물 제1201호)

 

 

임진왜란과 화재로 소실되어 1725년(영조 1)에 중건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대웅보전 축대 밑에 두부만 노출되도록 중앙의 좌우에 배치된 석귀(石龜)

두부의 크기는 목까지 길이 65㎝, 경(徑)이 20㎝이다. 이와 같이 석귀가 대웅전을 받치고 있는 것은

풍수설과 거북에 대한 세간의 믿음에 따른 것이라고 한다.

 

 

 

삼층석탑(경북 유형문화재 제135호), 일명 무영탑

 

 

황화실(黃華室, 환생전)

대웅보전에서 왼편에 위치하고 있으며

백극재란 사람이 울진현령으로 부임되어 내려 가던 중 급사해서

그의 아내가 불영사에 관을 놓고 지극히 기도하여 다시 살아나

그 기쁨으로 환생전이라 하고 중수했다고 한다. 

 

 

설법전(設法殿) 

 

 

법우당, 스님들의 요사채

 

 

산신각(山神閣)

 

 

법영루(法影樓)

 

 

명부전(冥府殿)

 

 

의상전(義湘殿), 인현왕후 원당

조선후기에 건축된 건물로 2001년 보수중 상량문에서 발견된 내용에는

숙종의 비 인현왕후의 원당으로 1867년 지어졌다고 기록되어 있다고 한다.

불영사를 창건한 의상대사를 비롯한 훌륭한 스님들의 영전을 모셨다.    

 

불영사와 인현왕후 이야기
조선 숙종의 왕후인 인현왕후 민씨는 여양부원군 민유중의 따님으로 30의 젊은 나이로 돌아가신 인경왕후의 다음 왕비로서 대비전이 친히 중전으로 간택한 왕후이며, 가례를 지낸지 6년이 지나도 태기가 없으므로 크게 걱정하여 스스로 왕께 후궁을 간택할 것을 아뢰었으나,

왕께서는 왕후의 나이가 어림을 이유로 후궁을 맞기를 주저하니, 몇 차례의 간곡한 아룀에 마지못하여 후궁 간택의 전교를 내리고 희빈

장씨를 맞이하였다.

희빈 장씨는 얼굴이 매우 아름다워 임금의 총애를 받게 되었고 3개월 만에 태기가 있어 10개월이 지난 뒤 원자를 탄생하였으니 임금의 총애함이 절정에 이르렀다. 그러나 희빈 장씨는 자기가 귀히 되었음이 민후의 후덕함에 있음을 고맙게 생각하여야 할 것임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왕의 총애를 기화로 민후를 모함하게 까지 되었다. 처음에는 왕께서 민후의 어지심을 잘 알고 있으므로 귓가로 흘렸으나 그 모함의 횟수가 더해지자 차츰 민후를 멀리하기 시작하였다.

 

하루는 궁중의 생일에 왕께 진어할 상을 민후가 손수 들여갔더니 왕이 뚜껑을 열어보지도 않았다. 그 후 2품 이상의 조관을 불러 중전의

실덕함이 많으니 폐출하겠다고 하였다. 신하의 상소와 직언에도 불구하고, 비망기를 내려 "민중전은 본래 어질더니 희빈이 원자를 탄생함에

있어 시기하는 마음에 기뻐하지 않을 뿐더러 여러 가지 못된 일을 꾀하고 있으므로 내쫓아야 한다"고 하며 민후를 폐출하고 말았다.

민후는 안국동의 감교당에서 죄인을 자처하여 스스로 잡곡밥을 들고, 색옷을 입지 않았다.


이렇게 5년이란 세월을 눈물로 보내다가 마침내 자결을 결심하고, 독약 그릇을 앞에 놓고 하염없이 울다가 그만 잠이 들고 말았다. 그런데 한 백발 노승이 나타나 말하기를 "천축산 불영사에 있는 중이온데 마마께옵서 괴로우시더라도 3일만 더 기다려 주십시오. 반드시 좋은 일이 있을 것이옵니다."하고 홀연히 사라지자 깜짝 놀라 깨어보니 꿈인지라, 매우 기이하게 여기고 3일을 더 기다렸더니 과연 노승의 말과 같이 왕께서 복위시킨다는 전갈이 왔고, 다시 왕후에 오르게 되었다.

그 후 민비는 꿈이 너무도 신기하여 왕께 아뢰어 불영사에 사람을 보내어 꿈에 나타난 백발 노승의 화상을 그려 올리라는 명을 내렸는데

사자가 불영사에 와서 찾아보았으나 노승은 간곳이 없고, 1516년(중종11년)에 돌아가신 양성법사의 화상이 그와 같으므로 복사하여 민비께 드리니 민비께서 보시고, 현몽한 노승이 틀림이 없으므로 임금께 이 사실을 아뢰었더니 숙종께서 감복하시고 부처님의 은공을 갚기 위해

불영사를 중심으로 사방 10리 안에 있는 산과 전답을 불영사에 시주하였다. 현재의 불영사의 재산은 그때의 것이다.

 

양성법사는 원남면 금매리에서 태어나 11세에 출가하여 불도를 닦았으며 속성은 남씨요, 이름은 혜능이고, 자는 중열인데 승려생활 64년

만에 도를 깨닫고, 75세로 일생을 마치니 불법에 따라 화장을 하였는데 사리가 나와 불영사의 남쪽 산 옆에 부도를 세우고, 그 안에 사리를 봉안하였다. 그 부도와 비석이 그대로 남아 있으며 부도는 유형문화재로 지정되어 관리하고 있다.(자료출처:사이트불영사)

 

 

응진전(應眞殿, 보물 제730호)

 

 

칠성각(七聖閣)

 

 

극락전(極樂殿)

1739년(영조 15년)에 창건한 건물

 

 

반야당, 불영사 불자들의 공간

 

 

불영지(佛影池)

 

 

 

불영사 계곡(명승 제6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