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때 유엔군 사령부는 중공군의 참전을 우려하고 있었지만 그 징후를 포착하지 못하고 그들의 참전시기가 지난 것으로 판단하였다. 그러나 25일 운산, 온정리 일대에서 아군이 대규모 중공군의 기습을 당해 일대 혼란에 빠졌다. 비록 이때 한국군 제6사단 제7연대가 압록강변의 초산에 도달하는 쾌거를 이룩하였지만, 이 부대도 곧 퇴로를 차단 당하고 말았다. 이와 같이 중공군의 참전은 한국전쟁을 새로운 전쟁으로 변모시켰다. 남북한의 군사력 증강 미소에 의하여 잠정적인 군사분계선이었던 38선은 이제 남북한이 각각 별개의 정부를 수립함으로써 국경아닌 국경선이 되어버렸다. 그러한 분할독립과정에서 우선 북한은 소련에 의한 계획적인 군사력증강에 박차를 가하여 1948년 10월에 소련군이 철수할 때까지 북한은 이미 완전무장한 4개보병사단과 소련제 T-34중형전차로 장비한 제105기갑대대가 편성되었다. 1949년 3월 17일에는 소련과 북한간에 조소군사비밀협정이 체결되고, 또 3월 18일에는 중공과 상호방위조약을 체결하여 중국공산군에 있던 조선군 2만5000명이 북한에 인도됨으로써 10개사단 13만명이 38선에 배치되었고, 10만명의 예비군까지 후방조직이 완료되었다. 막강한 군사력을 갖추게 된 김일성은 이어 국내외정세의 변화에 고무되어 무력통일을 구상하게 되었다.
1.국외적 요인 ① 1949년 10월 중국대륙이 공산화되었고, ② 1949년 6월에 주한미군이 철수를 완료하였으며, ③ 1950년 1월 미국의 극동방어선에서 한국과 대만을 제외시킨다는 애치슨(Acheson, D.G.)미국무장관의 성명이 있었다는 것, 그리고 ④ 1949년 말 경, 김일성이 모스크바를 방문, 남한의 무력침공계획에 대한 스탈린의 승인을 받아냈다는 것 등을 들 수 있다.
2.국내적 요인 ① 남로당의 실질적 붕괴에 따라 남한내부에서 '인민혁명' 이 일어날 가능성이 희박해 졌고, ② 김일성은 '민족해방을 위한 투사로서의 경쟁'에 있어서 박헌영을 압도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는 것, 그리고 ③ 남한이 아직도 정치.경제적으로 혼란상태에 있었고, ④ 국군의 병력, 장비가 열세하였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배경에서 김일성은 1950년 4월초 조선노동당 중앙정치위원회에서 무력통일안을 확정시키는 한편, 이러한 침략계획을 은폐하기 위하여 북한공산당은 남북통일 최고입법회의의 서울 개최, 남북국회에 의한 통일정부수립을 주장하는 등 평화공세를 벌였다. 한편, 남한에서는 1946년 1월에 미군정 산하의 국방경비대와 해안경비대는 1948년 8월에 정부가 수립되면서 국군으로 개편되었고, 같은 해 9월 각각 육군, 해군으로 명칭이 변경되었다. 1949년 4월에는 해병대, 그리고 10월에는 공군이 편성되어 그 병력은 약 10만에 이르렀다. 그러나 장비는 빈약하여 북한의 군사력에는 비할 수 없는 상태이었다. 더구나 예비군도 없이 8개 사단 중 4개 사단은 38도선으로 부터 먼 후방에 배치되어 공산게릴라의 소탕에 여념이 없었다. 중공군의 침략 | 중공군은 10월 19일 압록강을 은밀히 건너 참전하였다. 그들은 청천강 북쪽으로 전개하여 방어태세를 갖추고 있다가 10월 25일 아군의 공격을 되받으며 기습적 대공세를 취하였다. 이것이 중공군의 1차 공세였다. 중공군은 이후에도 4차례의 공세를 가하였으나 그 세력을 상실하고 방어로 전환하였다. 유엔군은 공산군의 1차 공세를 청천강선에서 저지하고 11월에 최종공세를 다시 폈으나 이미 30개 사단으로 증강된 중공군이 2차 공세로 맞섬에 따라 청천강 북쪽과 장진호 일대에서 결전이 전개되었다. 아군은 청천강에서 포위망을 벗어나는 과정에서 많은 손실을 입고 평양과 흥남 철수를 단행하였다. 이어 중공군은 재편성한 북한군과 연합하여 1951년 1월 1일을 기해 3차 공세를 하였다. 중공군은 전방에 배치된 한국군의 방어선을 돌파하고 서울을 재점령하였다. |
| | 유엔군과 한국군은 위기를 벗어나기 위해 반격작전을 개시하였으며, 2월 한강남쪽까지 진출할 무렵 다시 중공군의 4차 공세를 받았다. 그러나 아군은 지평리-원주선에서 중공군에게 큰 타격을 입히면서 반격을 계속하여 3월 15일 서울을 다시 수복하는데 성공하였다. | | | | 그러나 이 무렵 중공군은 만주의 추가부대가 투입되고 원산부근의 부대도 전선으로 합류함으로써 총 51개 사단으로 증강되었으며, 이들은 4월 22일 다시 5차 공세를 시작하였다.
춘계공세에는 공산군의 병력과 유엔군의 화력이 최대로 동원되었다. 아군은 즉각 반격에 나서 6월 중순까지 임진강-연천-철원-김화-화천-간성선을 확보하였으며, 이로 인해 중공군은 방어로 전환하였다.
유엔군은 중공군이 인해전술로 계속 공격할 것에 대비하여 철군 계획을 수립하는 한편, 핵무기 사용을 포함한 중공 본토 폭격, 해안봉쇄 등의 확전 조치도 심각하게 검토하고 있었다. |
휴전회담과 교착전 | 전쟁이 발발한 지 1년이 지난 후, 쌍방은 38도선에서 약간 변형된 접촉선을 사이에 두고 대치하였다. 그러나 1년간의 전쟁에서 쌍방 모두 군사작전으로는 상대의 의지를 꺾기 어렵다는 인식하에 정치적 해결방안을 모색하기 시작하였다. 이에 따른 막후 접촉에서 1951년 6월 23일 공산군측이 유엔군의 제의를 수용할 의사를 밝힘에 따라 7월 10일 휴전회담이 열렸다. 협상의 의제는 군사분계선 설정, 휴전 체제, 포로 송환, 휴전 후 평화 회담 등이었다. 11월에 군사분계선 설정에 합의함으로써 곧 전쟁이 종결된 것으로 낙관하였으나, 포로송환 문제가 첨예한 대립을 가져와 전쟁이 20개월이나 더 계속되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
포로 협상에 있어서 문제의 핵심은 유엔군이 포획한 공산군 포로 중 절반 이상이 공산군측으로 돌아가기를 거부함으로써 제기되었는데 유엔군 측은 복귀를 원하는 포로만 송환하고 거부하는 포로는 인도적 입장에서 석방하겠다는 방침이었고 공산군측은 모두 강제 송환해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포로문제로 이승만 대통령이 반공포로 석방조치를 취하는 등 우여곡절을 겪게 되었으나, 자원 송환 원칙을 적용하는 선에서 타협점을 찾아 휴전을 성립시켰다. 그동안 전선에서는 쌍방의 휴전전략과 연관된 전투가 거듭되었으나 전선에는 큰 변화가 없었으며, 1953년 7월 27일 휴전의 발효와 더불어 한국전쟁은 끝이 났다. (자료출처 : 사이버 유엔기념공원 한국전쟁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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