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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기

자즐보 2016. 5. 17. 11:13

 

 한국전쟁기

 

  전후의 전개

 

1943년 12월의 카이로선언에서 '조선'의 독립을 보장하였고, 이는 다시 1945년

7월의 포츠담선언에서 재확인되었다. 다만, 그 독립은 '적당한 시기에' 이룰

지역이었던 한반도는 군사적인 편의에 따라 38선을 경계로 남북한은 미소 양군에 의하여 분할 점령되었다.

분할된 상태로 미.영.소 3국외상은 그해 12월에 모스크바에서 회동하고 한반도에 5년간 신탁통치를 실시할 것에 합의하였다. 이에 대하여 한국민은 맹렬한 반탁

운동을 전개하였으나 좌파세력이 소련의 지령에 의하여 찬탁으로 선회함으로써 정치적인 혼란을 가져왔다. 한국문제가 반탁운동으로 난국에 직면하자,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1946년과 1947년 두 차례에 걸쳐 미소공동위원회가 개최되었으나 아무런 해결책도 강구하지 못한 채 결렬되었다.

 

1947년 9월에 미국은 소련의 반대를 뿌리치고 한국문제를 일방적으로 유엔에 제기하였다. 이로써, 38선을 경계로 한 남북한은 미소의 대립 속에서 이데올로기적인 갈등마저 겪으면서 국제무대에 노출되었다.

1947년 11월 유엔총회는 유엔임시한국위원단을 구성하고 그 위원단의 감시 아래 남북한 총선거를 실시하기로 결의하였다.

그러나 북한을 점령하고 있는 소련군사령관은 1948년 초에 활동을 개시한 위원단의 입북을 거절하였다.

이에 유엔소총회에서는 선거의 감시가 가능한 지역에서의 총선거를 결의하여 그해 5월에는 남한에서만의 선거가 행해졌고,

8월에는 대한민국정부가 수립되었으며, 그해 12월의 제3차 유엔총회는 한국을 '유일한 합법 정부'로 승인하기에 이르렀다.

한편, 북한에서는 김일성을 중심으로 하여 '최고인민회의'선거를 실시하여 9월에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선포함에

소련을 비롯한 공산제국은 이를 승인하기에 이르렀다.

이로써, 한반도에서는 남북한이 각각 별개의 정권을 수립함으로써 분단을 공식화하였다. 정부수립을 마친 북한은 곧이어

미소 양군의 철수를 요구하였고, 이에 부응하여 지정학적으로 유리한 소련은 그해 10월 부터 철병을 개시하였다.

남한에서는 공산세력의 준동에 대응하여 주한미군의 계속 주둔을 요청한 바 있고, 이에 따라 미군의 주둔은 잠시 연기되긴

하였으나, 1949년 6월에 미국은 약 500명에 달하는 군사고문단만을 남긴 채 남한으로 부터 철병을 완료하였다.

 

 

 

  유엔의 개입 경위 

 

 

 

 

 

이렇게 하여 1950년 6월 25일 새벽 북한공산군은 38선 전역에 걸쳐 전면 남침을 개시하였다. 전쟁 발발 소식을 접한 미국은 25일 유엔안전보장이사회를 긴급

소집하여 북한의 무력공격은 평화를 파괴하는 '침략행위'라 선언하고, 북한은

즉시 전투행위를 중지하고 그 군대를 38선으로 철퇴시킬 것을 요청하는 결의를 채택하였다.

또한 유엔회원국들로 하여금 유엔에 원조를 제공할 것과 북한에 대하여는 어떤 원조도 중단하도록 하였고, 6월 27일에 이르러 미국대통령 트루먼은 미국의 해군, 공군으로 하여금 한국군을 지원하도록 명령하였다.

그날 안전보장이사회는 유엔회원국들에 대하여 북한의 무력공격을 격퇴하고

국제평화와 한반도에서의 안전을 회복하기 위하여 필요한 원조를 한국에 제공할 것을 내용으로 하는 권고를 채택함으로써 미국의 의사조치를 추후 승인하기에

이르렀다.

 

곧이어 6월 28일에는 동경에 있던 극동군사령관인 맥아더원수가 내한하여 전선을 시찰하고

미국방성에 지상군의 파견을 요청하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미국의 군사조치는 다시 7월 7일에 안전보장이사회에서

한반도에서의 유엔의 군사활동을 위하여 미국에게 최고지휘권을 위임하는 결의를 채택함으로써 미국의 맥아더가

유엔군총사령관에 임명되고 유엔군의 파견이 결정되었다.

이로써, 한반도에서의 군사지휘권은 미국의 맥아더원수에게 주어졌으며, 한국을 원조하기 위하여 육군, 해군, 공군 및

지상군을 파견한 16개국의 군대는 유엔군사령관의 지휘를 받게 되었다. 이때 한국의 이승만대통령도 한국군에 대한

작전지휘권을 유엔군사령관인 맥아더에게 이양한다는 각서를 썼고, 이것이 이른바 대전각서로써 7월 14일에 수교되었다.

 

 

  반격과 북진 

 

 

작전의 주도권을 장악한 유엔군과 한국군은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과 동시에

총반격 작전을 수행하여 서울을 수복하고 파죽지세로 진격하여 9월 말 38도선에 도달함으로써 97일만에 전쟁 이전의 상황을 회복하였다. 유엔군 사령부는 아군이 38도선에 도달하자 유엔의 6ㆍ28결의와 군사작전의 '추격권 원칙'에 입각하여

북한군 격멸을 위한 북진작전을 단행하였다.

한국군은 10월 1일 역사적인 북진작전을 전개하였고 유엔군은 10월 9일 38도선을 돌파하고 북진길에 올라 10월 19일에 평양을 탈환하고 23일에는 청천강으로 진출하였다. 유엔군은 추수감사절까지는 전쟁을 종결짓는다는 판단하에 10월 24일

중공과의 국경지대를 목표로 진격작전을 시작하였다.

 

이때 유엔군 사령부는 중공군의 참전을 우려하고 있었지만 그 징후를 포착하지 못하고 그들의 참전시기가 지난 것으로 판단하였다. 그러나 25일 운산, 온정리 일대에서 아군이 대규모 중공군의 기습을 당해 일대 혼란에 빠졌다. 비록 이때 한국군

제6사단 제7연대가 압록강변의 초산에 도달하는 쾌거를 이룩하였지만, 이 부대도 곧 퇴로를 차단 당하고 말았다.

이와 같이 중공군의 참전은 한국전쟁을 새로운 전쟁으로 변모시켰다.

 

 

 

  남북한의 군사력 증강 

미소에 의하여 잠정적인 군사분계선이었던 38선은 이제 남북한이 각각 별개의 정부를 수립함으로써 국경아닌 국경선이

되어버렸다. 그러한 분할독립과정에서 우선 북한은 소련에 의한 계획적인 군사력증강에 박차를 가하여 1948년 10월에

소련군이 철수할 때까지 북한은 이미 완전무장한 4개보병사단과 소련제 T-34중형전차로 장비한 제105기갑대대가

편성되었다. 1949년 3월 17일에는 소련과 북한간에 조소군사비밀협정이 체결되고, 또 3월 18일에는 중공과 상호방위조약을

체결하여 중국공산군에 있던 조선군 2만5000명이 북한에 인도됨으로써 10개사단 13만명이 38선에 배치되었고, 10만명의

예비군까지 후방조직이 완료되었다. 막강한 군사력을 갖추게 된 김일성은 이어 국내외정세의 변화에 고무되어 무력통일을 구상하게 되었다.

1.국외적 요인
① 1949년 10월 중국대륙이 공산화되었고,
② 1949년 6월에 주한미군이 철수를 완료하였으며,
③ 1950년 1월 미국의 극동방어선에서 한국과 대만을 제외시킨다는 애치슨(Acheson, D.G.)미국무장관의

    성명이 있었다는 것, 그리고
④ 1949년 말 경, 김일성이 모스크바를 방문, 남한의 무력침공계획에 대한 스탈린의 승인을 받아냈다는 것

    등을 들 수 있다.

 

2.국내적 요인
① 남로당의 실질적 붕괴에 따라 남한내부에서 '인민혁명' 이 일어날 가능성이 희박해 졌고,
② 김일성은 '민족해방을 위한 투사로서의 경쟁'에 있어서 박헌영을 압도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는 것, 그리고
③ 남한이 아직도 정치.경제적으로 혼란상태에 있었고,
④ 국군의 병력, 장비가 열세하였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배경에서 김일성은 1950년 4월초 조선노동당 중앙정치위원회에서 무력통일안을 확정시키는 한편,

이러한 침략계획을 은폐하기 위하여 북한공산당은 남북통일 최고입법회의의 서울 개최, 남북국회에 의한

통일정부수립을 주장하는 등 평화공세를 벌였다.

한편, 남한에서는 1946년 1월에 미군정 산하의 국방경비대와 해안경비대는 1948년 8월에 정부가 수립되면서

국군으로 개편되었고, 같은 해 9월 각각 육군, 해군으로 명칭이 변경되었다.

1949년 4월에는 해병대, 그리고 10월에는 공군이 편성되어 그 병력은 약 10만에 이르렀다.

그러나 장비는 빈약하여 북한의 군사력에는 비할 수 없는 상태이었다. 더구나 예비군도 없이

8개 사단 중 4개 사단은 38도선으로 부터 먼 후방에 배치되어 공산게릴라의 소탕에 여념이 없었다.

 

 

 

  중공군의 침략 

 

 

 

중공군은 10월 19일 압록강을 은밀히 건너 참전하였다. 그들은 청천강 북쪽으로 전개하여 방어태세를 갖추고 있다가 10월 25일 아군의 공격을 되받으며 기습적 대공세를 취하였다. 이것이 중공군의 1차 공세였다. 중공군은 이후에도 4차례의 공세를 가하였으나 그 세력을 상실하고 방어로 전환하였다.

유엔군은 공산군의 1차 공세를 청천강선에서 저지하고 11월에 최종공세를 다시 폈으나 이미 30개 사단으로 증강된 중공군이 2차 공세로 맞섬에 따라 청천강

북쪽과 장진호 일대에서 결전이 전개되었다. 아군은 청천강에서 포위망을

벗어나는 과정에서 많은 손실을 입고 평양과 흥남 철수를 단행하였다.
이어 중공군은 재편성한 북한군과 연합하여 1951년 1월 1일을 기해 3차 공세를

하였다. 중공군은 전방에 배치된 한국군의 방어선을 돌파하고 서울을

재점령하였다.

 

 

유엔군과 한국군은 위기를 벗어나기 위해 반격작전을 개시하였으며, 2월 한강남쪽까지 진출할 무렵 다시 중공군의 4차

공세를 받았다. 그러나 아군은 지평리-원주선에서 중공군에게 큰 타격을 입히면서 반격을 계속하여 3월 15일 서울을

다시 수복하는데 성공하였다.

 
 

그러나 이 무렵 중공군은 만주의 추가부대가 투입되고 원산부근의 부대도 전선으로 합류함으로써 총 51개 사단으로

증강되었으며, 이들은 4월 22일 다시 5차 공세를 시작하였다.

춘계공세에는 공산군의 병력과 유엔군의 화력이 최대로 동원되었다. 아군은 즉각 반격에 나서 6월 중순까지 임진강-연천-철원-김화-화천-간성선을 확보하였으며, 이로 인해 중공군은 방어로 전환하였다.

유엔군은 중공군이 인해전술로 계속 공격할 것에 대비하여 철군 계획을 수립하는 한편, 핵무기 사용을 포함한 중공 본토 폭격, 해안봉쇄 등의 확전 조치도 심각하게 검토하고 있었다.

 

 

 

  휴전회담과 교착전

전쟁이 발발한 지 1년이 지난 후, 쌍방은 38도선에서 약간 변형된 접촉선을

사이에 두고 대치하였다. 그러나 1년간의 전쟁에서 쌍방 모두 군사작전으로는

상대의 의지를 꺾기 어렵다는 인식하에 정치적 해결방안을 모색하기 시작하였다. 이에 따른 막후 접촉에서 1951년 6월 23일 공산군측이 유엔군의 제의를 수용할

의사를 밝힘에 따라 7월 10일 휴전회담이 열렸다. 협상의 의제는 군사분계선

설정, 휴전 체제, 포로 송환, 휴전 후 평화 회담 등이었다.

11월에 군사분계선 설정에 합의함으로써 곧 전쟁이 종결된 것으로 낙관하였으나, 포로송환 문제가 첨예한 대립을 가져와 전쟁이 20개월이나 더 계속되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포로 협상에 있어서 문제의 핵심은 유엔군이 포획한 공산군 포로 중 절반 이상이 공산군측으로 돌아가기를 거부함으로써 제기되었는데 유엔군 측은 복귀를 원하는 포로만 송환하고 거부하는 포로는 인도적 입장에서 석방하겠다는 방침이었고 공산군측은 모두 강제 송환해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포로문제로 이승만 대통령이 반공포로 석방조치를 취하는 등

우여곡절을 겪게 되었으나, 자원 송환 원칙을 적용하는 선에서 타협점을 찾아 휴전을 성립시켰다. 그동안 전선에서는

쌍방의 휴전전략과 연관된 전투가 거듭되었으나 전선에는 큰 변화가 없었으며, 1953년 7월 27일 휴전의 발효와 더불어

한국전쟁은 끝이 났다.

 

(자료출처 : 사이버 유엔기념공원 한국전쟁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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