웅부안동(雄府安東)/문화·유적지

안동 문화유산 - 보물

자즐보 2015. 11. 16. 14:45

 

 

 

1.운흥동 오층전탑 - 보물 제56호

안동시 운흥동 231번지 소재

 

이 전탑은 통일신라시대의 탑으로,『동국여지승람』이나『영가지(永嘉誌)』에

기록된 법림사(法林寺)의 전탑으로 추정한다.『영가지』에 법림사 전탑이 7층이라는 점,

조선시대에 크게 보수를 하였다는 점, 탑의 머리장식은 법흥사탑(法興寺塔)과 같이

금동제였으나 임진왜란 직후 명나라 군인들이 도둑질해 갔다는 사실 등이

기록되어 있는 점으로 보아 지금의 모습과는 큰 차이가 있었을 것으로 짐작한다.

 

탑은 무늬없는 벽돌로 5층을 쌓았다. 몸돌에는 층마다 불상을 모시기 위한 방인

감실(龕室)을 설치했고, 특히 2층 남쪽면에는 2구의 인왕상(仁王像)을 새겨두었다.

지붕돌은 벽돌을 사용한 것에서 오는 제약때문에 처마 너비가 일반 석탑에 비해 매우 짧다.

밑면의 받침수는 1층부터 차례로 10단·8단·6단·4단·3단으로 줄어들었고 처마끝에는 기와골을

받기 위해 총총한 나무를 얹고 4층까지 기와를 입혀 놓았다. 이러한 지붕모양은 탑신의

감실과 더불어 목탑양식의 흔적을 보여준다. 탑의 꼭대기에는 머리 장식으로

복발(覆鉢:엎어놓은 그릇모양의 장식)만 남아 있다. (진사 자즐보)

 

 

 

2.조탑리 오층전탑 - 보물 제57호

안동시 일직면 조탑리 139-2번지 소재

 

통일신라시대의 전탑으로 화강암 석재와 벽돌을 혼용해서 만든 특이한 탑이다.

우리나라 전탑에는 거의 모두 화강암을 혼용하고 있으나 이 전탑에서는

그러한 의도가 더욱 적극적으로 나타나 있다.

기단(基壇)은 흙을 다져 마련하고 그 위로 크기가 일정하지 않은 화강석으로 5∼6단을 쌓아

1층 몸돌을 이루게 하였다. 남면에는 감실(龕室)을 파서 좌우에 인왕상(仁王像)을 도드라지게 새겼다.

1층 지붕부터는 벽돌로 쌓았는데 세울 당시의 것으로 보이는 문양이 있는 벽돌이 남아 있다.

2층 이상의 탑신(塔身)에는 2층과 4층 몸돌 남쪽 면에 형식적인 감실이 표현되어 있고,

지붕돌에는 안동에 있는 다른 전탑과는 달리 기와가 없다.

이 탑의 체감 비율은 지붕보다 몸돌에서 조화를 이루지 못했는데,

1층 몸돌의 높이가 지나치게 높은 점과 5층 몸돌이 너무 큰 것이 그것이다.

여러 차례 부분보수를 거치는 동안 창건 당시의 원형이 많이 변형되었을 것으로 짐작한다.

(진사 자즐보) 

 

 

 

3.안기동 석조여래좌상 - 보물 제58호

안동시 한화4길 11-13 (안기동) 소재

 

현재 불상의 머리는 후대에 새롭게 붙여 놓은 것으로

발견 당시에는 몸통과 대좌만 있었다. 불상이 앉아 있는 대좌(臺座) 역시

원래 불상과 같이 있던 것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비록 원래의 모습이 많이 없어지고 보존 상태도 그리 좋지 못하나

세부의 조각 수법이 우수하고 안정된 자세를 취하고 있다.

양 어깨에 걸쳐 입고 있는 옷은 소매 하나까지 매우 사실적으로 표현하였고,

짤막하게 이어진 옷주름 역시 활달한 모습이다. 오른손을 무릎 위에 올리고 손끝이 땅을

향하도록 하고 있는데, 이것은 악귀를 물리친다는 의미의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이다.

비록 불상의 신체만 남아 있지만 균형 잡힌 자세나 둥글게 처리된 어깨,
부드럽게 흘러내린

옷주름 등 힘있고 사실적인 모습을 통해 이 작품이 통일신라 후기의 것임을 알 수 있다.

(진사 자즐보) 

 

 

 

4.평화동 삼층석탑 - 보물 제114호

안동시 평화동 71-108 소재

 

탑신(塔身)을 받치고 있는 기단(基壇)을 위·아래 2단으로 꾸민 3층 석탑의 모습으로,

주목할 점은 아래층 기단에 아름다운 안상(眼象)이 새겨져 있다는 것이다. 윗층 기단은

윗면에서 상당한 경사를 보이고 각 모서리도 약간 위로 치켜 올려진 전혀 새로운 형식을 갖추었는데,

그 모습이 마치 지붕돌로 보일 정도이다. 탑신은 몸돌과 지붕돌이 각각 하나의 돌로 되어 있고,

지붕돌은 처마밑이 직선이며, 풍경을 달았던 작은 구멍들이 남아 있다.

탑의 꼭대기에는 머리장식으로 네모난 노반(露盤:머리장식받침)과

복발(覆鉢:엎어놓은 그릇모양의 장식)만이 남아 있다.

이 탑은 지붕돌이 넓어 매우 안정된 모습을 보이며, 전반적으로 그 비례감이

아름답다. 탑이 세워진 시기는 통일신라 중기 이후로 보인다. (진사 자즐보) 

 

 

 

5.이천동 마애여래입상 - 보물 제115호

안동시 이천동 산 2 소재

 

자연암벽에 신체를 선으로 새기고 머리는 따로 올려놓은 전체 높이 12.38m의

거구의 불상이다. 이러한 형식의 불상은 고려시대에 많이 만들어졌다.

머리의 뒷부분은 거의 파손되었으나 앞부분은 온전하게 남아 있다.

머리에는 상투 모양의 머리(육계)가 높이 솟아 있고, 얼굴에는 자비로운 미소가

흐르고 있어 거구의 불상임에도 전체적인 형태는 자연스럽다. 머리와 얼굴 특히 입에는

주홍색이 남아 있어서 원래는 채색되었음이 분명하다. 옷은 양 어깨를 감싸고 있으며

몇 개 안되는 옷주름은 매우 도식적(圖式的)으로 표현되고 있다. 양 손은 검지와

가운데 손가락을 맞대어 왼손을 가슴에 대고, 오른손을 배에 대고 있는 모습이다.

(진사 자즐보) 

 

 

 

6.류성룡 종가 문적 - 보물 제160호(1~11호)

조선 중기의 문신 서애 류성룡(1542∼1607)의 종손가에 소장되어 온

문헌과 각종 자료들이다. 류성룡은 퇴계 이황의 문인이며, 김성일과 동문수학하였다.

명종 21년(1566) 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권예문관검열, 공조좌랑, 이조좌랑 등의 벼슬을 거쳐

삼정승을 모두 지냈다. 왜적이 쳐들어 올 것을 알고 장군 권율과 이순신을 중용하도록 추천하였고,

화포 등 각종 무기의 제조, 성곽을 세울 것을 건의하고 군비확충에 노력하였다.

또한 도학·문장·글씨 등으로 이름을 떨쳤으며, 그가 죽은 후 ‘문충’이라는 시호가

내려졌고, 안동의 병산서원 등에 모셔졌다.

이 문서들은 임진왜란 때 도체찰사로 임금을 호종하면서 군무를 총괄하던

류성룡 선생이 직접 쓴 기록과 임진왜란과 관련되는 문건, 자료 등을 일괄하여

지정된 것이다. 그 목록은 아래와 같다.

1.진사록 3책 2.난후잡록 2책 3.근폭집 2책 4.중흥헌근 1책 5.군문등록 1책

6.정원전교 2책 7.정조어제당장서화첩제문부 채제공발 2책 8.당장시화첩 1책

9.당장서첩 2책 10~14.류성룡비망기입대통력 11.호성공신록훈교서 1축 등이다.

 

 

 

 7.임청각 (臨淸閣) - 보물 제182호

안동시 임청각길 53 (법흥동) 소재

 

임청각은 형조좌랑(刑曹佐郞)을 지낸 바 있는 이명선생이 1515년(중종 10)

건립한 주택이며, 상해 임시정부 초대 국무령을 지낸 이상룡의 집이기도 하다.

이 집은 영남산(映南山) 동쪽 기슭에 낙동강을 바라보는 배산임수 명당에

남향하여 자리잡고 있다. 일제시대 중앙선 철도부설 때 50여 간의 행랑채와

부속채가 철거되어 현재의 규모로 줄어들기는 하였으나, 길에서 보면 맞담 너머로 보이는

웅장한 모습의 행랑채가 이 집이 소위 말하는 99간집이라는 것을 느끼게 해주었다.

이 중 보존상태가 양호하여 보물로 지정된 군자정은 임청각의 별당으로

조선 중기에 지은 ‘丁’자 평면의 누각형 건물이다. 앞면 3칸·옆면 2칸 크기이고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을 한 팔작지붕이다. (진사 자즐보)

 

 

 

8.도산서원 전교당(陶山書院 典敎堂) - 보물 제210호

안동시 도산면 도산서원길 154 (토계리) 소재

 

도산서원은 퇴계 이황(1501∼1570) 선생의 학문과 덕행을 기리기 위해 처음 세웠다.

그 중 전교당은 유생들의 자기수양과 자제들의 교육을 하는 강당으로서,

전교당의 앞 마당 좌우에는 유생들이 기숙사인 동재와 서재가 자리하고 있다.

이 전교당은 조선 선조 7년(1574)에 지은 것을 1969년에 보수한 것이며

규모는 앞면 4칸·옆면 2칸이다. 화려한 팔작지붕에 온돌방과 대청마루로 이루어져 있다.

매우 간소하게 지은 건물로 선조가 서원에 내려준 ‘도산서원’이라는 현판 글씨는

명필 한석봉이 선조 임금 앞에서 쓴 글씨라고 전한다. (진사 자즐보)

 

 

 

9.도산서원 상덕사 및 삼문 (尙德祠 및 三門) - 보물 제211호

도산서원 제일 뒤쪽에 있는 상덕사는 이황 선생의 신주를 모신 사당이다.

조선 선조 7년(1574)에 지었고 지금 있는 건물은 1969년 수리한 것이다.
간결하고 매우 검소하게 지은 전통 깊은 조선시대 건축물이다. (진사 자즐보)

 

 

 

10.개목사 원통전(開目寺 圓通殿) - 보물 제242

경북 안동시 서후면 개목사길 362, (태장리) 소재

 

개목사의 원래 이름은 흥국사로 통일신라 신문왕(재위 681∼692) 때

의상대사가 세웠다고 전한다. 전설에 따르면 의상대사가 절 뒤에 있는 천등굴에서

천녀(天女)의 기적으로 도를 깨치고 절을 세웠다고 하는데 ‘개목사’라는 절 이름은

조선시대에 바꾼 이름이라고 전한다.

관세음보살을 모셔 놓은 원통전은 1969년 해체·수리시 발견한 기록에

‘천순원년(天順元年)’이라는 글귀가 있어 세조 3년(1457)에 지은 것으로 짐작한다.
전체적으로 조선 전기 건축양식의 특징을 잘 간직하고 있어

건축사 연구에 소중한 자료로 평가받고 있다. (진사 자즐보)

 

 

 

11.석빙고(石氷庫) - 보물 제305호

안동시 성곡동 산225-1번지 소재

 

얼음을 저장하기 위해 돌을 쌓아 만든 창고이다. 특히 이 석빙고는

낙동강에서 많이 잡히는 은어를 국왕에게 올리기 위해 만들어진 것으로,

조선 영조 13년(1737)에 지어졌다.

안으로 계단을 따라 들어가면 밑바닥은 경사져 있으며, 중앙에는 물이 강으로

흘러가도록 만든 배수로가 있다. 천장은 길고 크게 다듬은 돌들을 무지개모양으로

틀어올린 4개의 홍예(虹霓)를 세워 무게를 지탱하도록 하고, 각 홍예 사이는 긴 돌들을

가로로 채워 마무리하였다. 천장의 곳곳에는 환기구멍을 두었는데, 이는 안의 기온을

조절하기 위하여 설치한 것으로 바깥까지 연결하였다. (진사 자즐보)

 

 

 

12.하회 양진당 (河回 養眞堂) - 보물 제306호

안동시 풍천면 하회마을 내 소재

 

양진당은 겸암 류운룡(1539∼1601)의 집으로 매우 오래된 풍산류씨 종가이다.

류운룡의 부친이신 입암 류중영(1515∼1573)의 호를 빌어 ‘입암고택(立巖古宅)’이라는

편액이 걸려 있고, 양진당은 류운룡의 6대손 류영(1687∼1761)의 호에서 따 온 것이다.
 한석봉이 쓴 ‘양진당(養眞堂)’이란 당호와 함께 여러 현판들이 걸려 있다.
건물 안쪽 일부 재료를 만든 수법이 뛰어나고, 일반 주택으로는

제법 규모가 큰 조선시대 별당건축물 중 하나이다. (진사 자즐보)

 

 

 

13.감지금니묘법연화경 권3~4 - 보물 제314호

 

묘법연화경은 줄여서 ‘법화경’이라고 부르기도 하며, 부처가 되는 길이

누구에게나 열려 있다는 것을 기본사상으로 하고 있다. 묘법연화경은

천태종의 근본경전으로 화엄종과 함께 우리나라 불교사상 확립에 크게 영향을 끼쳤다.

감지금니묘법연화경 권3~4(紺紙金泥妙法蓮華經 卷三~四)은

법화경의 내용을 청색 종이에 금색 글씨로 옮겨 쓴 것으로 권3과 권4(2책)이 전해진다.

병풍처럼 펼쳐서 볼 수 있는 형태로 되어있으며, 접었을 때의 크기는 세로31㎝, 가로11㎝이다.
글자를 매우 유려하게 정성들여 썼고 금색도 선명히 남아 있는 고려 후기의 책으로 추정된다.

서후면 광흥사에서 소장하던 것을 국립경주박물관에 이관하였다. 

 

 

 

 14.백지묵서묘법연화경 (白紙墨書妙法蓮華經) - 보물 제315호

안동시 서후면 재품리 590(국립경주박물관 보관)

 

이 책은 흰종이에 먹으로 직접 글씨를 쓴 것으로, 전체 권1∼7중에서

권1과 권3이 남아있다. 각 권은 병풍처럼 펼쳐서 볼 수 있는 형태로 되어있으며,

접었을 때의 크기는 권1이 세로 37.5㎝, 가로 13.5㎝ 이고 권3이 세로 34.7㎝, 가로 12.5㎝이다.

각 권의 크기와 글씨체가 다른 점으로 보아 오랜 시간동안 여러 사람을 거치면서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각 권의 겉표지에는 금색으로 된 화려한 꽃무늬와

제목이 적혀 있고, 권3의 앞부분에는 불경의 내용을 요약하여 묘사한

변상도(變相圖)가 금색으로 그려져 있다. 권3의 끝부분에는

이 책을 만들게 된 경위를 적은 기록이 있다.

 

 

 

15.하회 충효당(河回 忠孝堂) - 보물 제414호

안동시 풍천면 하회마을 내 소재

 

조선 중기 문신 서애 류성룡(1542∼1607) 선생의 집이다.

충효당은 행랑채, 사랑채, 안채로 구성되어 있다. 사랑채와 안채는

손자인 졸재 류원지(1598∼1674)가 짓고, 증손자인 눌재 류의하(1616∼1698)가

확장 수리한 것이다. 행랑채는 8대손 일우 류상조(1763∼1838)가

지은 건물로 대문과 방, 광으로 구성되어 있다.

사랑채 대청에 걸려 있는 ‘충효당(忠孝堂)’이라고 쓴 현판은

당대의 명필가였던 허목(1595∼1682)선생이 쓴 것이라고 한다.
비교적 지을 당시의 모습을 잘 간직하고 있어 조선시대 민가 건축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진사 자즐보)

 

 

 

16.봉정사 화엄강당(華嚴講堂) - 보물 제448호

안동시 서후면 태장리 봉정사 내 소재

 

천등산 기슭에 있는 봉정사는 신문왕 2년(682) 의상대사가 지었다고 한다.

화엄강당은 스님들이 불교의 기초 교학을 배우는 곳이다.『양법당중수기』등의

기록에 따르면 같은 경내에 있는 극락전과 대웅전을 17세기에 고쳐 지었을 때

화엄강당도 함께 고쳤을 것으로 추정한다.

차분하고 안정감 있게 지은 건물로 우리나라 전통 건축사에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는 문화재이다. (진사 자즐보)

 

 

 

17.봉정사 고금당(古金堂) - 보물 제449

안동시 서후면 태장리 봉정사 내 소재

 

이 건물은 극락전 앞에 동향(東向)으로 서 있으며 원래 불상을 모시는

부속 건물이었을 것으로 생각되지만 지금은 승려가 기거하는 방으로 사용하고 있다.

1969년 해체·복원공사 당시 발견한 기록에 광해군 8년(1616)에 고쳐 지은 것을

알 수 있을 뿐 확실하게 언제 세웠는지 알 수 없다.
비록 건물은 작지만 다양한 건축기법을 사용하여 구조가 꼼꼼히 짜인

건축물로 주목 받고 있는 문화재이다. (진사 자즐보)

 

 

 

18.의성김씨 종택(義城金氏 宗宅) - 보물 제450호

안동시 임하면 경동로 1949-9 (천전리) 소재

 

의성김씨 종가로 현 건물은 임진왜란 때 불에 타 버렸던 것을

학봉 김성일(1538∼1593) 선생이 다시 지은 것이라고 한다.
건물은 사랑채, 안채, 행랑채로 구분되고 간략한 양식으로 지었지만

보기드문 주택구조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 조선시대 민가 건축연구에

소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진사 자즐보)

 

 

 

19.태사묘 삼공신 유물 일괄 - 보물 제451호(1~12호)

안동시 북문동 태사묘 내 소재

 

태사묘 삼공신 유물은 고려 태조 왕건이 안동에서 후백제의 견훤을 토벌할 때,

활약한 공로로 대광태사란 벼슬을 받은 권행, 김선평, 장정필 3인의 위패를 모신 

사당인 태사묘의 유물들이다.
유물에는 붉은 칠을 한 1개의 잔과, 꽃무늬를 수 놓은 비단 1점,

꽃무늬 장식이 있는 비단 6점, 검은색 관모 1개, 목이 긴 가죽신발 1켤레,

비단 천으로 만든 부채 1개, 구리로 만든 육면체 도장 2개, 놋쇠로 만든 뚜껑이 달린 합 1개,

옥으로 만든 관자 1개, 손상이 심한 허리띠 4개, 공민왕의 친필로 보이는 교지 1개,

동으로 만든 숟가락 1개와 젓가락 3개 등이 있다.

 

 

 

20.유성룡 종가 유물 - 보물 제460호(1~3호)

안동시 풍천면 하회마을 내 영모각 (일부 국학진흥원 보관)

 

서애 유성룡(1542∼1607) 선생의 종손가에 전해오는 유물들로

첫째, 유성룡 선생이 직접 쓰던 것, 둘째, 선생의 어머니에 관한 곤문기,

그리고 선생에게 조정에서 내린 여러 문서들 등 세 가지로 구분된다.

 

 

 

21.소호헌 (安東 蘇湖軒) - 보물 제475호

안동시 일직면 소호헌길 2 (망호리) 소재

 

조선 중종 때 문신 서해(徐懈) 선생이

서재로 쓰기 위해 명종 때 지은 별당이다.

규모는 앞면 4칸·옆면 2칸의 팔작지붕이며 부속된 방은 맞배지붕이다.

왼쪽 3칸은 대청, 오른쪽 1칸은 누마루며 앞쪽으로 온돌방 2칸을 붙여

집의 구조가 T자 모양을 이루고 있다.

기와에 새겨진 용 두 마리가 나는 문양은 민가에서 보기 드문 것이며,

건물에 나타나는 오래된 수법들은 조선시대 민가 건축 연구에 소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진사 자즐보)

 

 

 

22.김용 호종일기(金涌 扈從日記) - 보물 제484호

조선조 관료인 김용(1557∼1620)이 임진왜란 때에

선조가 의주로 피난 중 임금을 호종하였을 때 직접 쓴 일기이다.

김용은 안동출신으로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올랐으나,

일찍 벼슬을 그만두고 낙향하였는데 그 후 임진왜란이 터지자

임금이 피난한 곳으로 달려가 왕을 수행하였다.

후에는『선조실록』을 펴내는 일에 참여하기도 했다.

작성기간은 1593년 8월∼1594년 6월까지 약 1년간이다.

표지에는『운천선조호종일기』라고 썼다. 이 자료는 후에 잊혀졌다가

1925년 9월에 발견되어 3책으로 장첩하였다.

피난 중 직접 체험하고 보고들은 사실들을 그대로 기록하였으며,

사생활은 물론 국가의 정치, 군사, 외교 등 각 방면에 걸친 귀중한 자료이다.

 

 

 

23.정탁초상 (鄭琢肖像) - 보물 제487호

안동시 도산면 한국국학진흥원 보관

 조선 중기 문신인 약포 정탁 선생의 초상화로, 크기는 가로 89㎝,

세로 167㎝이다. 정탁(1526∼1605) 선생은 이황의 제자로, 명종 13년(1558)

과거에 급제하여『명종실록』편찬에 참여하였다.

선조 37년(1604)에 그려진 이 초상화는 직무를 볼 때 쓰는 관모와 가슴에

2마리 학이 수놓인 흉배가 있는 자주색 비단 관복을 입고 오른쪽을 바라보며

앉아 있는 전신상으로 조선시대의 전형적인 공신 초상화이다.

 

 

 

24.약포유고 및 고문서 (藥圃遺稿 및 古文書) - 보물 제494호(1~13호)

안동시 도산면 퇴계로 1997, 한국국학진흥원 소장

 

 조선 중기의 문신인 약포 정탁(1526∼1605) 선생의 문서들이다.
정탁은 이황의 문인이었다. 1558년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대사헌에까지 올랐으며,

임진왜란이 터지자 좌찬성으로 왕을 의주까지 호종했다. 천문, 지리, 군사에 이르기까지

능력을 보였으며, 임진왜란 중에는 곽재우, 김덕령 등 뛰어난 장수들을 추천하기도 하였다.

1597년 3월에 이순신이 옥중에서 죽게 되자 적극 말려 그를 구했다.


정간공교지 1장, 위성공신교서 1축, 『용사일기』 상하 2책, 『용사잡록』 1책,

『용만문견록』 1책, 『임진기록』 1책, 『선조시집유묵』 1책, 『약포선조유묵』 2책,

약포선조간첩』 2책, 『선조초고유묵』 1책, 기로연시화첩 1첩, 관립,

벼루와 벼루집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조선시대의 공문서를 연구하는데 귀중한 자료들이며, 당시의 사회상과

특히 임진왜란 당시를 연구하는데 훌륭한 자료로 평가된다.

 

 

 

25.이황필적 - 퇴도선생필법 및 퇴도선생유첩 - 보물 제548호(1~2호)

안동시 도산면 퇴계로 1997, 한국국학진흥원 보관

 

 조선 명종 11년(1556)에 퇴계 이황(1501∼1570) 선생이

그의 제자인 송암 권호문(1532∼1587)에게 글씨체본으로 써준 것이다.
퇴계선생유첩은 2책으로 장첩되어 있는데, 이것은 모두 퇴계선생이

권호문에게 보낸 편지를 모아 놓은 것이다.

 선조유묵첩은 퇴계(退溪) 이황이 자손에게 보낸 서한을 비롯하여

자신의 시문 원고, 타인의 저작을 베낀 것, 당송의 시를 서예적으로 쓴 것 등

젊어서부터 노년에 이르는 여러 필적을 모은 것이다.

 

 

 

 

26.권주 종가 고문서 - 보물 제549호(1~2호)

안동시 도산면 퇴계로 1997, 한국국학진흥원 보관

 

연산군 때 학자인 화산 권주(1457∼1505)선생의 종손가에 대대로 전해오는 문서들이다.

권주는 성종 때 문과에 합격하였고, 중국어를 잘하여 요동에 질정관으로

다녀오기도 하였다. 후에 도승지, 충청도관찰사를 거쳐 동지중추부사에 이르렀는데,

연산군 10년(1504)에 갑자사화에 연루되어 평해로 귀양한 뒤 극형을 당하였다.

중종반정이 있은 후 우참찬에 추증되면서 억울하게 되집어 쓴 누명을 벗게 되었다.

문서는 2건으로 「한성부황화방소재가대매매문서」와 「재산양도문서」로

조선 전기의 경제 및 가족관계사를 연구하는데 중요한 자료로 평가된다.

 

 

 

27.예안이씨 충효당(禮安李氏 忠孝堂) - 보물 제553호

안동시 풍산읍 우렁길 73 (하리1리)

 

임진왜란 때 의병장으로 활약하다가 순국한 이홍인 부자의

충과 효가 얽혀있는 유서 깊은 집이다. 이홍인 공의 후손들이 사는 집으로

명종 6년(1551)에 지은 것으로 보아 조선 중기 건축으로 추정되며 ‘충효당’이라 부른다.

이홍인이 임진왜란 때 의병장으로 나서 왜적과 싸우다 장렬하게

순국한 충의를 기리고 그 후손 한오의 지극한 효를 기리는

쌍수당( 한 집안에 충과 효를 다 갖추었다)이라는 별당이 있다. (진사 자즐보)

 

 

 

 

28.이현보초상 (李賢輔肖像) - 보물 제872호

안동시 도산면 퇴계로 1997, 한국국학진흥원 보관

 

조선 중기의 문신이자 시조작가인 농암 이현보(1467∼1555)의 초상화이다.

이현보는 연산군 4년(1498)에 문과에 급제하여 여러 직책을 거친 후 말년에는

후진양성에 힘썼다. 크기는 가로 105㎝, 세로 126㎝로 비단에 채색하여 그렸다.

위가 뾰족한 패랭이를 쓰고 붉은색이 감도는 옷을 입은 모습으로 허리에는 물소뼈로 만든

각대를 두르고 있으며 오른쪽을 바라보며 책상 앞에 앉아 있다. 조선시대 초상화는

손이 나타나지 않는데 비해 한 손에는 지휘봉 모양의 불자를, 다른 한 손은 책상을 잡고 있다.

책상 아래로는 검은 가죽신이 보인다.
이 그림은 선생이 관찰사로 있던 중종 32년(1537)에 동화사의 승려이자

화가인 옥준이 그렸다고 전해진다. 그 후 순조 27년(1827)에 훼손을 우려한

후손들에 의해 이 그림의 모사본이 만들어졌다.

 

 

 

 

29.재령이씨 영해파 종가 고문서 - 보물 제876호(1~12호)

안동시 도산면 퇴계로 1997, 한국국학진흥원 보관

 

재령 이씨 영해파 종가에서 소장하고 있는 문서들로, 총 12종 394점이다.
자녀들에게 재산을 나누어주면서 작성한 문서인 분재기 54점,

호구(戶口)사항을 적어놓은 호적단자 84점, 명문 173점,

일반 백성들이 관에 제출하는 진정서인 소지 49점,

남녀가 결혼할 때 양쪽 집안에서 주고 받는 글인 예상지 15점,

과거에 응시했던 시험지인 시권 4점, 한 집안에서나 같은 일을 하는 사람들끼리

공지사항을 전달하는 문서인 통문 3점, 관에서 일반 백성들에게 어떤 사실을 알리거나

특전을 부여할 때 확인하는 문서인 완문 3점 등이다. 이밖에도 소장된 문서는

사령장 입안을 요청하는 소지, 상량문 등 500여 건에 달한다.
이것들은 재령이씨 가문을 파악하는데 있어 매우 중요한 자료로 평가된다. 

 

 

 

 

30.이탁영 정만록 (李擢英 征蠻錄) - 보물 제880호

안동시 도산면 퇴계로 1997, 한국국학진흥원 보관

 

조선 선조 때 경상감사의 막하 참모였던 이탁영(1541∼1610)의 일기로

건(乾)·곤(坤)의 단 2권 2책으로 되어 있다. 이탁영은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순찰사였던 김수의 막하로 들어가 참모로 활동했으며, 1593년에는 학봉 김성일의

막하에서 전쟁의 여러 전술을 건의하여 승리에 공헌한 바가 많았다. 전쟁이 끝난 후에는

나라에서 내리는 상을 굳이 사양하였고, 후에 중추부사에 증직되었다.

이것은 1592∼1598년까지의 일기로 건권은 표지 뒷면에 임진왜란 당시

참전한 영상 이하 여러 관리들의 좌목(座目:자리의 차례를 적은 목록)이 있고,

다음에 ‘임진변생후일록’이라는 제목 아래에 그날그날 보고 듣고 겪은 일들을 적고 있다.

곤권은 임진왜란의 시작과 하루하루의 기록, 통문 등을 기록하게 된 이유를 적고,

이어 7년 동안에 있었던 중요한 교서, 통문, 격문 등을 고스란히 싣고 있다.


이 책은 임진왜란 연구의 매우 귀중한 사료로 평가되며, ‘정만록’이라는

책이름을 선조 임금이 정해준 것이라는 점에서 자료로서의 가치가 더해진다.

 

 

 

31.김성일 종가 전적 (金誠一 宗家 典籍) - 보물 제905호

조선 선조 때의 명신이며 학자인 학봉 김성일(1538∼1593) 선생의

종손가에서 보관하여 온 각종 전적류이며, 보물로 지정된 것은 55종 261책이다.

지정된 전적은 임진왜란 이전에 간행된『국조오례의』,『삼강행실도』등

28종 156책이 지정되었고, 필사본 중에서는『퇴계사전초』,『북벌일기』등

27종 85책이 지정되었다. 이 전적류들은 임진왜란 이전의 활자체를 연구하는데

도움이 될 뿐만 아니라 임진왜란사를 연구하는 데에도 도움이 된다.

 

 

 

32.김성일 종가 고문서 (金誠一 宗家 古文書) - 보물 제906호

학봉 김성일(1538∼1593) 종손가에서 보관하여 온

각종 고문서 중에서 보물로 지정된 것은 17종 242점이다.
임금이 신하에게 내리는 명령서인 교지,교서,유서,분재기 등

10,000여 점이나 되지만, 그 가운데 지정된 문서는 교서 1점,

교지 및 첩지 59점, 첩 4점, 시권 7점 등이다.
김성일 선생 개인의 전기를 파악함은 물론이거니와

의성김씨 가계를 파악하는데 도움이 되는 자료들이다.

 

 

 

33.배자예부운략 목판 (排字禮部韻略 木板) - 보물 제917호

안동시 도산면 퇴계로 1997, 한국국학진흥원 보관

 

시나 운문을 지을 적에 운(韻)을 찾기 위하여 만들어진 기초사전이다.

주로 과거에 응시하는 선비들이 참고하기 쉽도록 만들어졌으며, 과거를 맡아보던

부서인 예부(禮部)의 이름을 붙인 것이다. 송대, 원대로부터 내려오던 책을 우리나라가

수입해 와서 사용한 것으로, 조선시대에『동국정운』등 비슷한 성격의

책이 만들어졌으나, 여전히 이 책을 사용하는 사람들이 많았을 정도였다.

판목은 서(序:머리말), 본문, 옥편, 발(跋:맺음말) 등 4개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크기는 가로 46.2㎝, 세로 20.5㎝, 두께 1.8㎝이다. 수량은 162매이며,

숙종 5년(1679) 박동부가 조판한 것이다.

 

 

 

34.권주 종가 문적 (權柱 宗家 文籍) - 보물 제1002호

안동시 도산면 퇴계로 1997, 한국국학진흥원 보관

 

조선 성종~연산군 때까지 문신 권주(1457∼1505) 선생의

종손가에 소장된 고문서와 전적이다. 총 9종 14점이다.

권주는 1480년 문과에 급제하여 승정원주서, 공조정랑 등을 거쳐 승정원 도승지,

충청도관찰사 등의 벼슬을 지냈다. 성종 13년(1482) 연산군의 생모인 폐비 윤씨가

사약을 받을 때 사약을 받들고 갔다는 이유로 벼슬을 빼앗겼으나, 임무에 따랐을 뿐이라는

이유로 사형을 면하고 귀양을 떠났다. 그러나 1505년 6월 다시 그 문제가 불거져나오자

결국 사약을 받고 죽었다. 성품이 검소하고 단아하였으며, 맡은 직무에 최선을 다하였다.

고문서로는 15∼16세기 이전에 작성된 것으로 문과급제를 알리는 교지,

권주가 충청관찰사였을 때 받은 교서, 관찰사에게 특권을 부여하는 내용의 유서,

자식에게 재산과 노비를 나누어 주면서 작성한 분배기록인 분재기로

총 4종 7점으로 구성되어 있다.

전적으로는 성균관 생원, 진사들의 시문을 모은 『동방록』,

권주 선생이 직접 손으로 쓴 편지글들을 모아놓은 『경수첩』,

『선세수찰』등 총 5종 7책이 있다. 크기는 연도와 내용에 따라 다르다.

이 가운데 고문서는 15∼16세기 이전에 쓰여진 것으로 경제사연구의

역사적 자료가 되며, 전적류는 당시 사회상황을 살필 수 있는 자료이다.

특히 권주가 직접 쓴 책들은 그 필체가 훌륭하여 문화재로서의 가치가 크다.

 

 

 

35.광산김씨 예안파 종가 고문서 - 보물 제1018호

안동시 와룡면 오천리 385번지 소재

 

광산 김씨 예안파 종가의 21대 6백년간에 걸쳐 전해내려오는 고문서들로

1,000여점이 보관되어 있다. 이 가운데 교지 등 7종 429점이 보물로 지정되어 있다.

교지, 교서, 교첩, 차첩 등은 총 82점으로, 임금과 관에서 보내는 각종 사령서와

김씨가의 역대 문서들이다. 호적단자는 총 43점으로, 원본이 아니라 후에 베껴 쓴 것이다.

고려에서 조선시대의 여러 시대상황을 살필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다.

 

 

 

36.광산김씨 예안파 종가 전적  - 보물 제1019호

안동시 와룡면 오천리 385번지 소재

 

광산김씨 예안파 종가댁의 문중에는 고문서 이외에도

전적 약 3천여권이 보관되어 있다. 그 중 서첩을 포함한

13종 61점이 보물로 지정되어 있다.

 

 

 

37.이현보 종가 문적 - 보물 제1202호

안동시 태사길 69-7 (옥정동) 소재

 

조선 중종 때의 문신이며 시조작가로 유명한 농암 이현보(1467∼1555)의

종손가에서 소장하고 있는 교지 고문서와 전적류, 회화류 등이다.

고문서류인 교지는 총 23매로써 연산군 4년(1498)∼명종 15년(1560) 사이의 것으로

이현보(14매), 이파(1매), 이문량(8매)과 관련된 교지들이다. 전적류로서는『애일당구경첩』으로

모두 2책으로 되어있다. 한책은 당시 명사들의 친필로 쓴 시를 모아 하나의 첩으로 만든 것이고,

『애일당구경별록』은 생일가를 포함한 국문가사 등 이현보의 작품과 행적을 별도로 모아

편성한 것이다. 또한 회화류의 『은대계회도(銀臺契會圖)』는 이현보가 동부승지로

재직시 승정원 관원 10명과 계모임하는 모습을 그린 것이다.

 

 

 

38.김진 초상 (金璡 肖像) - 보물 제1221호

안동시 도산면 퇴계로 1997, 한국국학진흥원 보관

 

청계 김진의 초상화로 크기는 가로 109㎝, 세로 142㎝이다.

김진은 중종 20년(1525)에 과거에 합격하여 이조판서까지 오른 인물이다.

모시바탕에 채색하여 그린 이 초상화는 오른쪽을 바라보며 앉아 있는 모습으로

두 손은 소매 안에서 마주잡고 있다. 머리에는 높고 테가 넓은 전립을 썼으며

녹색의 옷을 입고 있다. 얼굴은 몇 개의 선으로만 처리했고 눈매는 매우 가늘다.

명상에 잠긴 듯한 얼굴과 전체적인 분위기가 학자로서의 면모를 암시하고 있다.

깔고 앉은 호랑이 가죽의 방석은 부피감이 없고 매우 평면적이지만 그림이 어색하지 않다.

묵선만 사용한 것이 아니라 다양하게 갈색선, 붉은 선 등을 사용한 점이 특징이다.

선조 5년(1572)에 그려진 이 초상화는 인물을 정확하게 묘사했으며

선생의 성격이나 기품이 잘 나타나 있다. 이현보 선생의 초상화와 함께

안동지역의 사대부상을 대표하는 귀중한 작품이다.  

 

 

 

39.보광사 목조관음보살좌상 및 복장유물 - 보물 제1571호

안동시 도산면 서부2리 산50-7번지 보광사 소재

 

보광사 목조관음보살좌상은 정교성과 화려함을 두루 갖춘 이국적이면서도

우아한 귀족풍의 얼굴모습, 단정하고 엄숙하면서도 안정된 신체비례, 간결하지만

탄력 넘치는 옷주름의 표현, 불신 전반에 걸쳐 정교하게 장엄된 영락 장식 등 품격 높은

고려 불교문화의 한 단면을 뚜렷이 보여준다. 이 관음보살좌상은 조성발원문이

남아있지 않지만 현존하는 작품과의 비교를 통해 13세기 전반기에 조성된

보살상으로 추정되는데, 현재 이 시기의 보살상이 거의 남아 있지 않은 점에서

그 자료적 가치는 매우 높다고 한다.

보광사 목조관음보살좌상에서는 10종 194점에 이르는 복장유물이

함께 발견되었다. 복장유물 중 ‘저고리’는 현전하는 예가 드문 고려시대의

저고리로 복식사 및 직물사 연구에 중요한 자료이다.

 

 

 

40.봉정사영산회상벽화 - 보물 제1614호

안동시 서후면 봉정사길 222, 봉정사 소재

 

이 벽화는 현재 정확한 제작시기를 단정할 수 없지만 대웅전 해체수리 때

종보 하단에 덧댄 통보아지 상면에서 발견된 1435년의 「대웅전중창기」,

1436년의 정면 어칸 기둥 묵서명 등을 통해서 볼 때 1435년을 전후한 시기에

제작되었을 것으로 추증하고 있다.

화면은 중방부분이 휘어지면서 부분적으로 균열이 생기고, 자연적 또는 인위적으로

훼손된 부분이 많아 제 모습을 상당히 잃었으나 구도 및 색채 그리고 일부의 문양 등은

판별이 가능하다. 내용은 설법인(說法印)을 짓고 있는 중앙의 본존불을 중심으로

여러 권속들이 에워싸고 있는 도상으로, 남아 있는 화기를 통해 석가모니불이

영축산에서 『묘법연화경(妙法蓮華經)』을 설하실 때의 장면을 도해한

영산회상도(靈山會上圖)이다.

 

 

 

41.봉정사 목조관음보살좌상 - 보물 제1620호

안동시 서후면 봉정사길 222, 봉정사 소재

 

목조관세음보살좌상은 여러 개의 나무들을 접합한

접목조기법으로 이루어졌으며 눈은 수정을 감입하였다. 사찰에 전하는

대웅전관음개금현판(大雄殿觀音槪金懸板)과 1753년의 중수원문(重修願文)을

통하여 1199년에 처음 조성되어 1363년에서 1364년 사이와 1751년에서

1753년 사이에 중수된 상임을 알 수 있다.

 

 

 

42.봉정사 영산회괘불도 - 보물 제1642호

안동시 서후면 봉정사길 222, 봉정사 소재

 

이 그림의 화면구성은 기본적으로 경상도 지역 영산회괘불화 도상과

유사하나 좌우 8구의 협시보살을 비교적 크게 배치하고 있다는 점이 특징이다.

중앙에 커다랗게 표현된 석가모니를 중심으로 8보살과 10대 제자가

둘러싸고 있는 간단한 구도를 취하고 화면에 도상들을 부각시켜 꽉차게 묘사하였다.

이 작품은 18세기 괘불탱 중에서 이른 시기에 조성되었을 뿐만 아니라 화풍도 뛰어난 작품이다.

 

 

 

43.봉정사 아미타설법도 - 보물 제1643호

안동시 서후면 봉정사길 222, 봉정사 소재

 

이 그림은 조선조 후기 아미타설법도상의 규범이 되며 또한 17세기와 다른

18세기 초반의 화풍 경향을 잘 보여주고 있어 불교회화사의 중요한 자료이다.
1713년 도익(道益) 등이 조성한 아미타불화로서, 본존 아미타불을 중심으로

좌우에 10보살과 범천, 제석천, 10대제자, 벽지불, 사천왕, 팔금강 등을 배치하였다.

다른 불화에 비해 본존의 비중을 작게 함으로서 다수의 권속들을 표현함에도 불구하고

안정적이면서도 답답하지 않은 화면을 구성하였다. 원만한 상호묘사와 균형 잡힌 신체묘사,

유려한 필치, 금니의 화문 등 동일한 화승이 제작한 1731년 수다사 영산회상도 및 삼장보살도와

유사한 특징을 보여준다. 18세기 전반 경상북도 지역 불화의 특징이 잘 표현된 작품이다.

 

설명과 문적, 초상화 사진 등 자료출처는 안동관광정보센터

기타 사진 출처는 자즐보의 답사 사진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