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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청 덕천서원(德川書院)

자즐보 2015. 11. 2. 00:35

 

 

 

덕천서원(德川書院)

경남 산청군 시천면 원리 222-3 소재

 

남명 조식(1501~1572년) 선생의 학덕을 기리기 위해

1576년(선조 9) 창건된 사원이다. 임진왜란 때 소실된 것을

1602년(선조 35)에 중건하였으며,  1609년(광해군 원년) 덕천서원으로

사액을 받았다. 1870년(고종 7) 화재로 소실되어 중건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외삼문인 시정문(時靜門)

 

 

 

덕천서원 편액이 걸린 강당

 

 

강당에는 경의당(敬義堂) 편액이 걸려있다. 

 

 

동재, 진덕재(進德齋)

 

 

서재, 수업재(修業齋)

 

 

 

내삼문(內三門)

 

 

숭덕사(崇德祠)

조식선생과 제자인 최영경의 위패를 모셨다.

 

 

창주 하징이 지은 덕천서원 중건기(德川書院 重建記)

1572년 2월 8일 남명 선생이 덕산 사륜동에서 별세하였다. 4월 산천재 뒷산에 장례를 치렀다. 세상을 떠난 후 선생의

학덕을 기리기 위해 제자들이 모였다. 수우당 최영경, 각재 하항, 영무성 하응도, 무송 손천우, 조계 유종지 등이었다.

이들은 임종 때까지 남명을 모셨던 제자들로서 선생의 정신을 기리기 위한 사우(祠宇) 창건을 논의했다.

1575년 겨울, 제자들은 진주 목사 구변과 함께 땅을 살펴본 후, 구곡봉 아래 살천가에 서원터를 정했다.

산천재가 서로 바라보이는 곳이었다. 현재 덕천서원이 있는 그 자리이다.

1576년 봄, 남명선생 생전에 영무성 하응도는 이 곳에 초옥을 지어놓고 매양 선생을 모시고 놀았는데,

이때에 그 집을 철거하고 터를 헌납하였다.

덕천서원 자리는 원래 제자 영무성의 소유였는데, 선생이 살아계실 때, 복사꽃이 흐드러지게 필 때면

선생을 모시고 자연을 완상하던 곳이었다.

수우당을 비롯한 제현들이 서원 건립을 주관하였으며, 손승선(孫承善)이 작업에 필요한 음식을 맡고, 공사를 검사하고 책임을 맡은이는 승려인 지관(智寬)이었으며, 고을 아전인 강세견(姜世堅)이 장부와 기록을 담당하였다.

진주 목사 구변과 경상 감사 월정 윤근수의 적극적인 협력으로 1년이 채 안돼 사우 강당 서재가 완성되었다.
이해 가을에 위패를 봉안하고 덕산서원(德山書院)이라 이름을 짓고 남명선생께 제사를 올렸다.

사우· 강당 ·동재 ·서재를 아울러 완공하였으니 강당은 경의당(敬義堂)이라 하고 동재와 서재는 경재(敬齋)와

의재(義齋)로 이름 지었다.
이렇게 하여 남명선생을 모신 덕천서원은 제자들에 의해 ‘덕산서원(德山書院)’이란 이름으로 1576년 창건이 되었다.
창건 이듬해인 1577년, 서원 꾸미는 것과 단청을 끝내고 담을 둘렀다. 담안으로 샘물을 끌어 들여 좌우에 네모난 못을 만들고 그 속에 연꽃을 심었다. 이후 봄 가을로 제례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이때의 원장은 각재 하항이었다.

서원이 처음 창건될 당시에는 서원에 물을 끌어들여 못을 만들고 연꽃을 심었으니 그 규모는 현재와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였다.
이렇듯 장엄한 규모를 자랑하던 덕산서원은 1592년 임진왜란을 만나 불행하게도 강당 재실 정자가 모두 불에 타

버렸다.

그로부터 9년후인 1601년 진주목사 윤설(尹說)이 진주 선비들의 요청에 의하여 서원 중수를 계획하였다.

이때 청주목사를 역임한 모촌 이정과 당시 원장인 백곡 진극경, 창주 하징이 교대로 서원의 중수를 담당하였다.
그 이듬해 서원의 건물들이 비로소 완성되었다. 임란 때 불탄 지 10년만이었다.

1603년 남명 선생의 위판을 다시 봉안하고 제례를 지냈다. 위판은 바위굴에 감추어 다행히 보전하기는 하였으나

글씨가 더러워져 새 판으로 고쳤으며, 수우당 최영경을 사당에 배향하였다.
1609년에 강당 동재 등 서원의 건물들이 완성돼 옛 모습을 거의 회복하였다. 이해 봄 나라에 서원의 이름을 청하니

덕천서원이란 이름을 하사하였다. 이후로 덕산서원에서 덕천서원으로 이름이 바뀌었으며, 사액 서원이 되었다.

경재, 의재이던 동재와 서재를 진덕재(進德齋) 수업재(修業齋)로 고쳤다.


이후 덕천서원은 1690년, 1796년 중수를 거쳐 70여 년을 내려오다가 1870년 대원군 서원 훼철령으로 훼철되었다.

덕천서원은 훼철이후 46년간 방치되어 있었다. 그러다가 1916년 진사 하재화와 주사 박재구가 도내 유림과 더불어

진주향교에서 도회를 열어 덕천서원 강당인 경의당 중건을 결의하였다.

그로부터 2년 후 1918년 3월 1일 수곡선비 하재화의 주선으로 경의당을 중건하였다. 이때 회봉 하겸진이 상량문을

지었는데, 지금 서원에 걸려 있지는 않다.
이때 강당인 경의당만 복원 중건되었던 덕천서원은 1926년에 건물들이 대략 복원되었다, 지금 현존하는 덕천서원은

이때 만들어진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후 부분적인 보수와 건물 개축 등을 거치면서 1576년 창건 당시와는 많은 차이가 있으나 남명의 숨결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이어지고 있다.

 

 

안에서 본 외삼문

 

 

 

은행나무 보호수, 수령 약 470년

 

 

 

세심정(洗心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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