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대구여행*문화탐방/문경시

석문구곡 원림과 석문구곡가

자즐보 2015. 8. 3. 15:58

 

 

석문구곡(石門九曲) 원림과 석문구곡가

 

석문구곡(石門九曲) 원림(園林)은 문경시 산양면과 산북면 일대에 자리하는 원림으로 금천(錦川)과 대하천(大下川)을 따라서 약 9Km에 걸쳐 전개되고 있다. 태백산의 한 줄기가 뻗어나와 금계봉(金鷄峯)을 이루고 이 봉우리 맞은편에 석벽(石壁)이 높이 솟아 봉우리를 이루니 이 두 봉우리가 석문(石門)을 이루었다. 이곳에 근품재(近品齋) 채헌(蔡瀗;1715-1795)이 석문정(石門亭)이라는 정자를 짓고 복거(卜居)를 하였는데 주변의 아름다운 경치를 중심으로 구곡원림을 경영하며 석문구곡(石門九曲)이라 명명하였다.

 

채헌(蔡瀗)은 자가 계징(季澄), 호가 근품재(近品齋)이다. 그는 조선 영조 29년(1753) 생원시에 합격하였으나

더 이상 과장(科場)에 나아가지 않고 자연에 묻혀서 살았다. 채헌은 청대(淸臺) 권상일(權相一;1679-1760)의

문하에서 수학하여 고제(高弟)가 되었는데 자태가 옥결(玉潔)과 같았고 장자(長者)의 풍모를 갖추었다.

효우(孝友)가 빼어나고 친지와는 돈목(敦睦)하게 지냈으며 한 번 말한 것은 바꾸는 일이 없었으므로 향당(鄕黨)이 모두 그를 따랐다. 만년에 석문정(石門亭)을 짓고 석문구곡(石門九曲)을 경영하며 「석문구곡가(石門九曲歌)」를 지었다.

채헌(蔡瀗)은 석문구곡의 제1곡에서 제9곡까지 금천(錦川)과 대하천(大下川)을 거슬러 오르며 아홉 굽이를

가사(歌辭)로 읊었다. 「석문구곡가(石門九曲歌)」는 한 편의 가사이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서사에 해당하는 부분, 아홉 굽이를 읊은 부분, 결사에 해당하는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이는 가사의 일반적 형식을 취하면서 주자(朱子)의 「무이도가(武夷櫂歌)」형식도 취하는 방식을 택하였다. 또 아홉 굽이를 읊은 부분에서 매 굽이마다 ‘어위야’라는 감탄사를 첫머리에 배치하여 어부가(漁夫歌) 형식을 취한 점도 주목된다. 이점은 서사를 살펴보면 확인할 수 있다.

서사에서 채헌(蔡瀗)은 석문구곡의 어부(漁夫)가 되었다. 물론 채헌은 자신이 실제로 고기를 잡아서 생활하는 어부는 아니었다. 채헌은 서사에서 ‘어부 노릇 하여보세’라고 하였는데 그가 어부 노릇을 하려는 까닭은 석문구곡의 아름다운 굽이를 경영하기 위해서이다. 시내를 거슬러 오르며 자연을 벗 삼아 존심양성(存心養性)하기 위해 어부가 되는 것을 자원하였다.

 

1곡 농청대(弄淸臺)

채헌(蔡瀗)의 「석문구곡가(石門九曲歌)」를 보면 제1곡을 농청대로 설정하고 있다.(지금은 농청정弄淸亭) 농청대는 문경시 산양면소재지에서 금천(錦川) 상류 쪽으로 1Km정도 가다보면 좌측에 자리한다. 바위 위에 높다랗게 세워진 농청대는 청대(淸臺) 권상일(權相一;1679-1760) 선생이 장수(藏修)하던 장소였다.

석문구곡 제1곡의 경관을 살펴보면, 농청대(弄淸臺) 앞으로 금천(錦川)이 흐르는데 이 시내에 구금도보와 존도보가 자리하여 물이고였다 흐르기 때문에 보의 맑은 물과 농청정이 어우러져 아름다운 경관을 형성한다.

농(弄)은 ‘희롱하다’는 의미이고 청(淸)은 ‘맑다’는 의미는 ‘물이 맑다’와 ‘마음이 맑다’는 두 가지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따라서 농청은 ‘대 앞으로 흐르는 맑은 물을 완상하다’는 의미뿐만 아니라 이를 통해 ‘마음의 맑음을 완상 하다’는 의미를 가진다.

 

인간의 마음은 태어날 때 하늘로부터 맑은 마음을 받아 태어났다. 그러나 인간은 살아가는 가운데 이 맑은 마음에 티끌이 끼이게 된다. 권상일(權相一)은 이러한 인간의 마음을 언제나 맑은 상태로 유지하려는 의미에서 농청대를 창건한 것으로 보인다. 그는 이곳에서 앞으로 흐르는 금천(錦川)의 맑은 물처럼 자신의 마음도 언제나 맑은 상태로 유지하려 하였다.

 

一曲溯洄學海船   일곡이라 학해선으로 거슬러 오르니

淸臺瘦竹映前川   청대의 수척한 대나무 앞내에 비친다

先生去後無人弄   선생이 가신 후 완상하는 이 없으니

太古巖頭鎖暮烟   태고암 머리에 저문 안개 드리우네

 

 

2곡 주암(舟巖)

제1곡에서 약1.6Km정도 올라가면 현리(縣里)에 이르는데 이 마을 앞으로 흐르는 금천(錦川)의 왼쪽에 부벽이 자리하고 오른쪽에 주암이 자리한다. 주암의 맞은편에 있는 부벽(浮碧)은 현리 앞 금천 가에 있는데 현재 이곳에는 경체정(景棣亭)이 자리하고 있다. 주암정(舟巖亭) 뒤로는 나지막한 산이 자리하고 앞으로는 작은 연못이 있다. 금천의 물줄기가 예전에는 이 연못이 자리한 곳으로 흘렀는데 큰 홍수로 인하여 물줄기가 바뀌면서 이곳은 밭이 되었다. 최근 이 주암정을 보수하는 과정에서 연못을 만들었는데 주암정과 연못이 잘 조화를 이루고 있다. 연못에는 말밤이 자라고 있다. 주암정 오른쪽에 큰 벚나무가 서 있고 뒤의 산에는 소나무 등 여러 나무들이 우거져 있다. 주암정은 현재 그의 10대 손인 채훈식(蔡勳植)씨가 관리하고 있다.

 

주암정 뒷산에는 도천사(道川寺)가 있었는데 지금은 폐허가 되어 터만 남아 있다. 도천사에 있었던 통일신라 말기(9세기경)에 만들어진 삼층석탑 3기는 1974년에 김천 직지사로 옮겨져 그 중 2기는 대웅전 앞에, 나머지 1기는 비로전 앞에 자리잡고 있다. 대웅전 앞의 석탑은 보물 제 606호로, 비로전 앞의 석탑은 보물 제 607호로 지정 되어 있다. 주암정 앞으로는 근품산(近品山)이 의연히 자리하고 있다.

 

二曲東亞日月峯   이곡이라 동쪽에 일월봉이 솟아있고

雙巖枕水弟兄容   두 바위 물을 베니 형제의 모습이라

亭前浮碧千年久   정자 앞의 부벽은 천년이나 되었고

望裏竹林翠幾重   대숲을 바라보니 푸르름이 몇 겹인가

 

 

3곡 우암대(友巖臺)

우암대는 현리(縣里)에서 현리교를 건너 오른쪽으로 작은 길을 따라 400m 정도 걸어가면 금천(錦川) 왼쪽 야산 아래에 있다.(지금은 우암정友巖亭) 우암정은 문경시 산북면 서중리 36번지에 소재한다. 창건한 연대는 조선 준조 1년(1801)으로 다의당(多義堂) 채귀하(蔡貴河)의 후손인 채덕동(蔡德東)이 선조인 채유부(蔡有孚)를 기리기 위하여 세웠다. 채덕동은 자(字)가 군상(君尙), 호(號)가 우암(友巖)으로 형제간에 우애가 있었고 부유하면서도 검소하였으며 많은 선비들과 사귀었다.

 

석문구곡 제3곡의 경관을 살펴보면, 우암정(友巖亭) 앞으로 금천이 흐르고 오른쪽은 바위가 솟아있는데 바위에는 ‘우암채공(友巖蔡公) 장수지소(藏修之所)’라고 새겨져 있다. 이것은 우암(友巖) 채덕동(蔡德東)이 은거한 곳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우암정 뒤에는 야산이 자리하였고 앞에는 금천이 흐르고 현리가 있으며 현리 뒤로 근품산(近品山)이 자리한다.

 

다만 지금 확인할 수 없는 부분은 모래마당에 자리한 화주(花柱)와 그 맞은편에 자리했던 화수헌(花樹軒)이라는 집이다. 이러한 기둥과 집은 시간의 흐름과 함께 사라진 것으로 보인다.

 

三曲灘頭倚暮船   삼곡이라 여울가에 저문 배가 걸리니

友岩臺古幾千年   우암대 지은 지가 얼마나 되었는가

亭亭華柱沙頭立   우뚝 솟은 화주가 모랫가에 서 있고

回首濂巖只自憐   염바위 바라보니 다만 절로 어여쁘네

 

 

4곡 벽입암(壁立岩)

제3곡인 우암정(友巖亭)에서 현리교를 건너면 넓은 현리 들판이 나타난다. 이 현리 들판을 가로지르는 농로를 따라 약 1.4Km정도 걸어가면 금천(錦川)의 새들보에 다다른다. 금천의 제방에서 새들보를 굽어보면 맑은 물이 고였다가 흘러간다. 이 맑은 물에 비치는 바위 벼랑이 있는데 이것이 벽입암이다. 금천의 제방을 따라서100m 정도 길이의 바위 벼랑이 솟아 금천에 임하고 있는데 봄이 되면 이 바위 벼랑 위에 붉은 꽃이 만개하여 아름다운 경관을 이룬다.

 

마을 사람들은 이 벽입암을 두꺼비 바위라고도 부르는데 이 바위가 풍수지리상 뱀산이 노리고 있는 두꺼비 바위 형상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두꺼비 바위에서 멀지 않은 곳에 뱀산이 자리하고 있다. 더욱 흥미로운 사실은 이 뱀산을 노려보는 황새바위가 두꺼비 바위 맞은편에 자리하고 있다는 것이다.

 

四曲蒼蒼壁立岩   사곡이라 솟아 있는 푸른 바위 벼랑에

岩苔含露翠毿毿   바위 이끼 이슬을 머금어 푸르게 드리우네

高見形體無人識   높다랗게 보이는 형체를 아는 이 없고

汪汪後川只滿潭   넓고 넓은 뒷내엔 다만 못물이 가득할 뿐

 

 

5곡 구룡판(九龍坂)

제4곡에서 북서방향으로 바라보면 용이 서려있는 듯한 산 아래로 마을이 자리하는데 이 마을이 구룡판이다. 이 마을에는 옛날에 수양버들이 많았던 것으로 보이는데 지금은 세월과 함께 사라져 그 흔적을 확인할 수 없다. 마을 앞으로 흐르는 금천(錦川)과 함께 한 동천(洞天)을 이루는데 빼어난 경치를 가졌다기보다는 일상적 마을의 모습을 하고 있다.

 

마을 뒷산 봉우리가 아홉 마리의 용이 서로 다투어 승천하려는 형상을 하고 있으며 그 산기슭에 평평한 곳이 있어 이곳에 마을을 세우고 구룡판 이라 하였다. 임진왜란 때 명나라 장수 이여송이 이 마을을 지나다가 산세를 보고 큰 인물이 날 지세라고 하면서 산혈(山穴)을 끊어 버리자 흙의 색깔도 붉게 되고 산 고개도 잘록해졌다고 전해진다.

 

주자(朱子)의 무이정사(武夷精舍)가 자리한다. 다른 굽이와는 달리 제5곡은 넓은 공간이 있어서 정사를 지을 수 있었다. 그 안에 평평한 공간은 집을 짓고 거주하기에 가장 알맞은 공간이 되었다. 주자는 무이구곡 제5곡의 무이정사에 거주하며 후학에게 가르침을 베풀었다. 석문구곡 제5곡도 이러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五曲溪邊路轉深   오곡이라 시냇가에 길이 돌아 깊고

九龍板下柳成林   구룡판 아래에는 버드나무 수풀을 이룬다

林間幽趣誰能會   숲 사이에 그윽한 흥취를 그 누가 아는가

一曲棹歌爽客心   한 곡의 뱃노래에 객의 마음 상쾌해라

 

 

6곡 반정(潘亭)

반정(潘亭)은 길을 가는 사람들이 쉬어 가는 정자로 그 옆에 우뚝 솟은 한 그루 나무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를 통해 볼 때 반정이 자리한 지점은 사람들이 오고가는 길옆이고 동시에 앞으로 물굽이가 둘러있는 공간으로 짐작된다. 그러나 지금은 자리했던 정확한 위치를 알아낼 수 없다.

 

「석문구곡가」는 이러한 반정의 위치를 짐작할 수 있게 하는 중요한 지점을 언급하고 있는데 ‘비파산’과 ‘황새바위’이다. 조사 결과, 황새바위는 산북초등학교 뒷산 정상에 황새 모양을 한 바위이고 비파산은 황새바위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뱀산을 가리키는 듯하다. 황새바위는 마을 주민들이 정확히 알고 있었지만 비파산은 그 위치를 잘 알지 못했다.

 

六曲盤亭一帶灣   육곡이라 반정에 물굽이 둘러 있고

白雲深處洞門關   흰 구름 깊은 곳에 동문이 닫혀 있네

琶山草綠江花落   비파산 풀 푸르고 강가의 꽃 떨어지며

黃鳥綿蠻春意閒   황새가 우지지니 봄뜻이 한가롭다

 

 

7곡 광탄(廣灘)

광탄은 두 줄기 물길이 만나서 넓은 여울을 만드는 지점이라 광탄이라 이름 하였다. 광탄은 석문정(石門亭)에서 내려오는 대하천(大下川)과 화장골에서 내려오는 동로천(東魯川)이 만나 넓은 여울을 이루는데 이 여울과 야산이 어우러져 아름다운 동천(洞天)을 이루고 있다.

 

 

광탄 옆의 언덕에는 큰 소나무가 있는데 그 모습이 자못 신비롭다. 천연기념물 제426호로 지정된 대하리 소나무는 반송(盤松)의 일종으로 2개의 우산을 맞대어 놓은 듯한 형태로 아름답다. 수령은 약400년 정도로 추정된다.

 

과거에는 이 나무 주위에 황희 정승의 영정(影幀)을 모신 장수 황씨 종택 사당과 사원이 있었다 하여 이 마을 이름을 영각동(影閣洞)이라 하였다. 마을에서는 매년 음력 정월대보름에 마을의 평안과 풍년을 기원하는 영각동제를 지내는 등 마을의 수호신으로 신성시하고 있다.

七曲行舟上廣灘   칠곡이라 배를 저어 광탄에 오르며

嘉猷書塾更回看   다시금 가유서숙을 되돌아 보노라

却憐夜雨蓬山過   안타까워라 밤비가 봉산을 지나가니

活水源頭添一寒   활수의 원두에 찬 물이 불어나네

 

 

8곡 아천(鵝川)

석문구곡 제7곡인 광탄(廣灘)에서 대하천을 따라서 200m 정도 서북으로 굽어 돌아 올라가면 왼편에 돌산이 나타난다. 여기서 1Km정도 더 올라가면 눈 앞에 아름다운 계곡을 만나는데 이 계곡이 아천이다. 아천은 오른편에 야산이 자리하고 왼편에 시내가 흐르는데 야산과 시내는 어우러져 아름다운 경치를 이룬다. 시내에는 작은 돌이 깔려 있어 이 돌 사이로 흐르는 물이 매우 맑다.

 

채헌(蔡瀗)은 광탄에서 배를 타고 아천으로 올라가며 화장골을 바라보았다. 광탄에서 바라보는 화장골은 산등성이 가로막혀 보이지 않지만 동로천을 통하여 올라갈 수 있는 마을이다. 채헌은 배를 저어 산 너머에 자리하는 아름다운 화장골에 가고 싶었지만 석문구곡의 극처인 석문정(石門亭)을 향하여 나아가야하기 때문에 마음을 접은 것이다.

 

아천에 다다른 채헌은 아천의 모습을 ‘흰 돌이 시내에 깔려 있고 복숭아꽃이 물 위에 떠내려 온다’고 묘사하였다. 채헌이 묘사한 흰돌은 지금도 아천에서 확인할 수 있다. 물론 돌의 빛깔이 하얀 빛을 띠고 있다는 말은 아니다. 이 때의 흰 돌은 채헌의 관념상에 존재하는 돌이다. 복숭아꽃이 물 위에 떠내려 온다는 표현은 석문구곡의 극처가 가깝다는 의미를 드러낸다.

 

八曲鵝川石路開   팔곡이라 아천은 돌길이 열리고

洗心臺下水縈回   세심대 아래에 물이 돌아흐른다

渡頭不說桃花網   나루서 복사꽃 줍는 일 말하지 말아라

遊客尋眞逐水來   유객들이 진처 찾아 물을 좇아 오리라

 

 

9곡 석문정(石門亭)

석문정은 제8곡 아천(鵝川)에서 대하천을 따라 1.6Km 올라가면 시내 왼쪽에 자리한다. 일현교(日峴橋) 앞으로 펼쳐진 석문구곡의 제9곡은 절경을 이루고 있는데 상류에서 흘러오는 맑은 물이 석문정 앞에서 수많은 돌들과 만나면서 잔잔한 물살을 이룬다.

 

왼쪽 언덕에 자리한 석문정은 지어진 지가 오래되어 낡은 상태지만 그 옛날 선비들이 시문을 읊조린 장소로 손색이 없다. 석문정 서북쪽 시내 양편에 바위 벼랑이 솟아있는데 이 바위 벼랑이 자연스레 문을 이루므로 석문(石門)이라 이름하였다. 근품재(近品齋) 채헌(蔡瀗)이 이곳에 정자를 짓고 이 지명을 따서 석문정 이라 이름 하였다.

 

채헌(蔡瀗)은 친척과 지인을 불러 석문정에서 노닐면서 시문을 짓고 연회를 즐겼다. 문경뿐만 아니라 인근 고을의 많은 문사들이 이 정자를 찾아서 아름다운 경치를 시문으로 남기고 시조와 가사를 읊음으로써 하나의 소박한 석문가단(石門歌壇)을 형성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지금 전하는 필사본 채헌의 문집들은 모두 이 과정에서 지어진 시문과 시조를 모은 책이다.

 

채헌(蔡瀗)은 석문구곡의 제9곡에서 ‘도화(桃花)를 따라서 석문정 찾아가자’고 하였다. 제8곡 아천(鵝川)의 시내 위에 떠내려 오는 복숭아꽃을 좇아서 제9곡 석문정(石門亭)을 찾아가자는 것이다. 채헌은 제9곡을 도원(桃園)으로 설정하였다. 이것은 아홉 번째 굽이를 인간 세상과는 다른 공간으로 설정하기 위해서이다. 그는 속세의 티끌이 존재하지 않는 청정한 공간에서 태어나면서 가졌던 청정한 마음을 유지하고 싶었던 것이다.

 

이 굽이에 존재하는 금계봉(金鷄峯), 관란대(觀瀾臺), 조대(釣臺) 등은 하나 같이 인욕에 물들지 않은 청정한 존재이다. 그는 이 공간은 광풍제월(光風霽月)이 가득하다하였다. 이것은 선비가 지향하고 싶어 하는 세계이니 천리가 유행하는 세계이다. 이러한 세계를 채헌은 ‘깊은 못 뛰는 고기, 맑은 하늘에 나는 솔개’로 표현하였다. 바로 연비어약(鳶飛魚躍)이 아닐 수 없다. 그는 못에 뛰는 고기와 하늘에 나는 솔개의 자연성을 바라보면서 자신의 본성을 찾고자 하였다. 바로 석문정의 아름다운 공간에서 이것을 이루고자 하였다.

 

九曲石門道豁然   구곡이라 석문에 길이 확 열리며

光風霽月滿晴川   광풍과 제월이 청천에 가득하네

等閒識得尋芳路   등한히 꽃을 찾는 길을 알아내니

飛躍鳶魚摠是天   연비어약이 모두 이 동천이로다

 

[자료출처] 문경문화연구총서 / 문경의 구곡원림(경북대학교 김문기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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